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12)
‘……제대로 선택한 게 맞아야 할텐데.’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다시 아우로라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자꾸 치밀어오르는 찜찜한 느낌 탓에 괜스레 걸음을 빨리 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어서였다.
피 묻은 검 다음으로 사용할 무기를 얻는 걸 도와주는 대신, 크리스탈 스크롤이 보관된 던전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제안. 그게 내가 미네르바에게 시도한 거래였다.
물론 나라고 크리스탈 스크롤이라는 초강수를 꺼내고 싶어서 꺼낸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미네르바의 흥미를 끌 법하다고 생각되는 제안들을 먼저 내놓았는데, 죄다 거절당했으니까.
결국 내게 남은 카드는 크리스탈 스크롤, 혹은 그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 고대의 스크롤 뿐이었다. 그나마 고대 스크롤들 중에서 크리스탈 스크롤이 제일 얻기 쉬웠으니 그걸 고른거고.
다만, 반응이 좋을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그 정도로 좋을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크리스탈 스크롤이 있는 던전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하자마자 눈빛을 바꾼 미네르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를 가슴 사이에 끼우고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심지어는 지금 당장 출발하면 안되냐며 대마법사의 품위마저 다 내다버린 채 징징 보채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정말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던 듯 했다.
원본 NPC도 플레이어가 고대의 스크롤을 가져다줄 때만 유일하게 감정을 보여줬으니 아주 예상 못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미네르바의 행동은 원판보다 훨씬 더 격했다.
제안만으로도 나에 대한 신뢰도가 수직 상승하는 것이 눈에 보일 수준이었는데, 정말로 내가 말한 곳에 크리스탈 스크롤이 있을 경우에 어떤 반응일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써부터 미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순간이동이 없으면, 현실에서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년 단위로 걸릴지도 모르는 작업이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교황들에게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미네르바의 설명에 따르면 신성 주문을 사용한 순간이동은 작동 방식이 아예 달라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올거라나.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혼란은 진작 풀렸나. 하긴, 아직도 안 풀렸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겠지.’
복도의 창문으로 정원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미네르바가 나를 끌고 사라지며 혼란이 풀렸는지, 정원을 흐느적흐느적 배회하던 전투 수녀들은 어느샌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마 성국으로 돌아가든가 했을 것이다. 여기에 남은 목적부터가 은빛 여명 기사단을 대신한 아우로라의 호위였는데, 우리가 복귀했으니 더 머물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델타님.”
응접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세웠다. 저택 정문에서 우리를 맞이해주었던 메이드장이었다.
“왜 그러시죠?”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델타님을 응접실에 들어오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영주님의 당부이시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영주님이 그러셨다고요?”
“예. 허락이 내려지는 즉시 알려드릴테니, 지금은 저를 따라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응접실 문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메이드장을 따라 몸을 돌렸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우로라가 내린 명령이니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어…… 그, 메이드장…… 씨?”
“라나, 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눈앞의 메이드를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라나’라는 이름으로 소개해왔다.
생각해보니 아우로라가 영주의 자리에 오른지도 제법 시일이 흘렀고, 그동안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해준 사람이 이 메이드였음에도 지금껏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네, 라나…… 씨. 기사단장들도 저 안에 영주님이랑 같이 계시는건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은빛 여명 기사단의 기사단장님들과 대담을 나누고 계시는 중입니다만,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저한테 들어오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나 해서요.”
내 말을 들은 라나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목을 돌려 눈을 내게 향했다.
평소대로 무표정한데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어쩐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말로 설명하긴 애매한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대화의 내용을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지는 않으셨으니, 정말로 원하신다면 제가 들은 내용에 한하여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사견으로는 듣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델타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ㅡ”
“그걸로 됐습니다. 충분히 이해했어요.”
나는 라나의 말을 싹둑 잘랐다. 저기까지만 들어도 안에서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건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라나가 말한 그대로였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주제였다.
우리는 계단을 한층 더 올라가, 계단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방으로 향했다. 응접실만큼이나 충분히 호화로운 방이었다. 나는 라나가 가리키는대로 소파에 앉았다.
곧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과가 내어졌다. 이번에도 바로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서 사람 체하게 만들겠구나, 하는 내 생각과 달리 라나는 자기 몫의 차와 함께 소파로 돌아왔다.
풀썩, 그 몸이 쿠션 위로 안착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충격적인 광경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쳐다보자, 내 맞은편에 앉은 라나가 무슨 일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는 보는 제가 다 불편하니까 그렇게 앉으라고 말해도 거부하시더니, 이번에는 멀쩡히 앉으셨다는 사실이 놀라워서요.”
“저는 메이드입니다. 메이드가 스스로 모시는 주인님과, 그리고 주인님의 손님과 겸상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주인님께서 따로 델타님의 말벗이 되어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정확히는, 말벗이든 뭐든 좋으니 응접실에 다시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델타님을 심심하게 만들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입니다.”
말벗이라, 나는 무릎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우아한 포즈로 차를 홀짝이는 라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절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겠지만, 솔직히 있으나 없으나 별로 다를 게 없을듯한 사람이었다. 아이리스와 에리카가 한 단계 더 진화하면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은데.
“예. 보시는대로 저는 말재주가 그닥 뛰어나지 않으니, 주인님의 명령처럼 델타님의 말벗이 되어주기에는 크나큰 무리가 있습니다.”
라나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이쯤 되니 슬슬 속내를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도 연습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녀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꼭 입으로 하는 대화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예?”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라나가 옷깃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충격에 쩌적 굳어버린 채로 옷을 풀어헤치는 라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추가 하나씩 풀려가고, 뽀얀 쇄골과 검은색 어깨끈까지 드러난 후에야 정신이 돌아온 내가 후다닥 라나를 제지했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잠시만요.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갑자기 옷은 왜 벗으시는데요?”
“입의 대화로 시간을 보낼 재주가 없으니, 그 대신 몸의 대화를 하려는 겁니다. 아, 저는 여자이니 이것 역시 특정한 관점에서는 입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윗입이 아니라 아랫입으로 나누는 대화이긴 합니다만.”
그 말을 듣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어휘부터가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나는 간신히 쥐어짜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 행동 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멈추시죠.”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옷깃을 여민 라나가 다소곳이 무릎을 모았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느껴질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 짧은 시간에 목의 단추까지 전부 잠겨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주 훌륭하신 대답이셨습니다.”
라나는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려 아주 옅은 미소를 띄웠다. 보통 사람에게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변화겠지만, 라나에게는 혁명이나 마찬가지인 모습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저를 안으시기로 결정을 내리셨다면, 제가 주인님을 배신하는 상황이 됐을테니까요. 물론 원하시는대로 몸의 대화를 나누도록은 해드렸을겁니다만.”
“그 와중에 허락은 해주시는건가요?”
“한낱 메이드의 처녀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신, 아마도 주인님께서는 크게 분노하셨겠지요. 저를 안으신 분께서 책임을 져주시지 않으신다면, 필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말이죠.”
“…….”
“농담이었습니다.”
“…….”
방금 그게 농담이었다고? 정말로?
어떻게, 어디서, 뭘 보고 웃어야 할지 조금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자, 조금 올라갔던 라나의 입꼬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잊어주시길.”
순식간에 극도로 어색해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조용히 차만 홀짝이고, 라나는 자기 몫의 찻잔에는 손조차 대지 않은 채로 내 찻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차를 따라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꽉 막힌 분위기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은지 얼마나 흘렀을까,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또 다른 메이드 한 명이 얼굴을 비췄다.
“영주님께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를 내리셨습니다.”
“알았다. 즉시 가겠다고 전해드려라.”
대답을 끝낸 라나는 엄청난 속도로 자기 몫의 찻잔과 다과 접시를 정리했다. 나도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것마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워졌다.
순식간에 뒷정리를 끝내고 평소처럼 아랫배 앞에 다소곳이 손을 모은 라나가 나를 안내하듯 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모시겠습니다.”
얌전히 그 뒤를 따라갔다. 겉으로는 태연해보여도 아마 속으로는 부끄러워하는 중일 것이다. 아마 본인 나름대로 해본 회심의 농담이었을텐데, 정작 내 반응이 그랬었으니까.
괜히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되도 않는 대화를 시작할 바에는 차라리 얌전히 있는 편이 맞았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라나가 문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주려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보였던 추태는, 부디 잊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잠깐이지만 라나의 귀가 약간 붉어져 있던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제대로 확인을 못했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덜컥,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용한 분위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주 조용했다가 내가 들어오자마자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우로라는 얼굴에 히죽거리는 미소를 띄운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클라우디아도 아우로라와 비슷한 부류의 미소를 띄운 채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리카와 아이리스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저 둘이 내 시선을 피한다는 건, 분명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리제는 얼굴을 머리 끝까지 붉히고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중이었다. 안에서 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갔었는지를 추측하기란 그닥 어렵지 않았다.
클라우디아가 저런 미소를 짓고, 아이리스와 에리카가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도 흘끔흘끔 나를 쳐다보는 상황은, 이미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우로라가 히죽거리며 날 쳐다보는 모습 그대로 입을 열었다.
“굉장하네, 델타. 키가 큰 남자는 다른 쪽도 크다는 속설이 사실이었나봐? 새삼스럽게 다시 보게 되는걸?”
“여기 들어오자마자 그런 말을 들어야 되는 제 입장은 한 번도 생각 안해보셨습니까, 영주님?”
“그게 뭐 어때서? 너는 길이 칭찬하면 좋아한다던데. 저기 증언도 있어. 들어오자마자 기분 좋게 해준거잖아?”
아우로라의 손가락이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버린 리제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날 보고서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기사단장들이 저런 표정이길래, 괜히 분위기 어색해지지 말라고 한 번 농담 좀 해본거니까 얼굴 풀고 앉아.”
왠지, 라나가 그런 ‘농담’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소파의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우리가 모두 모이자, 순식간에 다시 영주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우로라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우선, 다들 성국 갔다오느라 수고했어. 그 종교쟁이들 사이에서 투닥거리느라 많이 빡셌을텐데, 당분간 도시 경계는 우리 쪽 애들한테 돌릴테니까 푹 쉬어. 그리고…….”
아우로라는 그 뒤로도 뭔가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대부분은 내가 아니라 기사단장들과 연관된 사항이었다. 특히 아이리스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제법 있었다.
“참, 델타 너는 나랑 할 이야기가 좀 많지? 내가 그 고생을 해가면서 찾은 정보들이니까, 아주 유용하게 써야 할거야.”
그러다 문득, 황금빛 동공이 날 향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래, 그래. 감사하면 나중에 몸으로 갚아. 이제 마지막인데, 델타 너는 무조건 남고, 나머지는 뭐 알아서들 해. 남아도 되고, 성으로 돌아가도 돼.”
이대로 나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명령을 내린 아우로라조차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아우로라의 설명을 들으며 드디어 메인 스토리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했고.
고작 이틀 뒤, 황제의 칙령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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