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18)
ㅡ최후의 불사. 처단하겠습니다.
ㅡ인간으로서 울고, 인간으로서 웃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주십시오.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커다랗고 오래된 대검이, 스스로의 목을 겨누었다. 언제든 제 목을 칠 수 있는 자세였다.
주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행복을 바라는 덤덤한 표정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조금 멀어졌다가, 스스로의 목을 향해 힘껏 휘둘러졌다. 오래되어 녹슬고 이가 다 빠져버린 모습의 칼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내의 목을 파고들었다.
벚꽃이 휘날렸다.
‘역시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을 덮었다. 역시 언제 읽어도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방금 덮은 책의 이름은 외팔 늑대.
브닼 시리즈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수집품인 ‘서적’이었다. 오픈월드 곳곳에 흩어진 서적의 페이지들을 찾아서 책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어느 감자서버 회사가 오픈월드를 만들 때 흔히 사용하는, 플레이타임 늘리기용 꼼수성 수집 요소에 불과했겠지만, 이 수집품의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소설이 어마어마하게 재밌다는 점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수집품을 확인하지 않고 건너뛴 사람이라면 몰라, 일단 재미를 붙이는 순간 메인 스토리마저 뒷전으로 미뤄놓은 채 눈에 불을 켜고 페이지만 찾으러 다니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누군가 커뮤니티에 해당 소설의 완성본을 PDF 파일로 뿌리기 전까지는, 그 재미 하나로 정말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줬던 수집품이었다.
나 역시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게 여기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역시 황궁에 있는 도서관이다 이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찾아봤는데, 브닼 1~3에 수록됐던 소설은 없었다. 여기가 브닼 4의 세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거겠지만.
브닼 1부터 3까지에 수록됐던 소설이 차례대로 검은 영혼 1, 2, 3이었고, 브닼 4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시리즈인 외팔 늑대라는 소설이 나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명작이었다.
더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에는 ‘오래된 반지’라는 이름의 소설이 수록될 예정이라는 루머가 있긴 했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브닼 5가 나왔어야 알지.
‘왜 5편을 안 내주냐고. 나오면 무조건 사겠다는데.’
나는 속으로 그 쓰레기같은 제작사를 마구 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 먹는게 억울하면 브닼 5로 증명하라 해라.
외팔 늑대를 책장에 갖다놓은 다음 책을 읽던 자리로 돌아왔다. 리제를 깨워서 나가려다가, 리제가 자기 가슴에 반쯤 파묻힌 채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멈칫거렸다.
정확히는, 가슴이 너무 큰 탓에 엎드려서 자려면 저런 방법밖에 없었다. 혹은 책상 끄트머리에 엎드려서 가슴을 밑으로 축 늘어뜨리든가.
‘……거유는 저런 짓도 가능한 건가?’
가슴을 책상 위에 올리고 가슴골에 턱을 파묻은 상태로, 팔을 이용해 반쯤 감싸안다시피 한 불편한 자세를 하고선 잘도 자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입고 있는 옷이 민소매인 탓에 맨살이 훤히 드러나있는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리제. 다 됐어. 가자.”
“우웅…….”
리제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가볍게 칭얼거리다가 꿈뻑꿈뻑 눈을 떴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옆에 서 있는 날 보자마자 베ㅅ배시시 웃으며 두 팔을 좌우로 벌렸다. 나는 그 몸을 정면에서 껴안아 일으켜주었다.
“다 읽었어?”
“그러니까 깨웠지. 이제 뭐 할래? 졸리면 방에 들어가서 더 잘래?”
“아니. 잠 다 깼으니까 괜찮아. 연무장이나 가보자.”
어제 카이킬리아를 알현하는 일이 끝나고 난 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할 것이 없었다.
아침 일찍 불렀던지라 뭔가 하루종일 걸릴 줄 알았는데, 정작 알현에는 30분도 안 걸렸을 뿐 아니라 그 짧은 시간마저 대부분 나와 대화하는 것에 썼으니까.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온종일 각자의 방에서 대기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이 되고 나서야 황제 폐하께서 다시 부르기 전까지 자유롭게 행동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데, 저택을 그렇게 오래 비워도 되는 겁니까?”
“1년 정도는 라나 혼자서도 문제 없을걸? 진짜 큰 거 아니고서야 알아서 처리하게 권한 다 부여했고, 라나도 엄청 유능하고. 영지에 뭔가 커다란 사건만 안 터진다면…… 아.”
아우로라는 말을 하다 말고 이러면 꼭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던데, 하면서 자책했다. 나는 여기에도 플래그라는 개념이 있었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 뒤에는 각자 할 일을 하자고 결정이 내려졌다.
아우로라는 오랜만에 여기 돌아왔으니 옛날 추억이나 되새기겠다며 혼자서 어디론가로 향했다. 리제를 뺀 기사단장들은 무언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챙겨 황궁의 연무장으로 떠났다.
나는 혹시 브닼 4에 나오던 책인 외팔 늑대의 완본이 있는가를 찾아보러 도서관에 왔고, 리제는 나를 따라왔다.
그런데 진짜 있어서 무진장 놀랐다. 역시 여기서도 명작 대접을 받는구나 싶었다.
“다른 기사단장들은 아직 연무장에 있겠지?”
“아마 그럴걸? 나도 그래서 가자고 하긴 한 건데. 델타, 나 얼마나 잤어?”
“내가 책 반쯤 읽었을때부터 자기 시작했으니까 얼마 안 됐어. 대충 1시간?”
“그게 얼마 안된 거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복도를 걸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연무장에 거의 다 도착한 듯 무기끼리 서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먼저 갔던 기사단장들이 신나게 대련을 벌여대는 중인 모양이었다. 기나긴 복도를 벗어나자 연무장의 풍경이 보였다. 쇳소리가 훨씬 더 커졌다.
마치 콜로세움을 작게 축소시켜놓은 듯한 모습의 연무장 중앙에서, 누군가 무기를 맞대고 있었다.
에리카였다.
일본도에 화염이 넘실거리고,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연무장 곳곳에 아직까지도 미처 꺼지지 못한 화염이 이글거렸다.
에리카의 몸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몸을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완벽한 원을 그렸다. 검의 궤적을 따라 벚꽃과 불씨가 흩날렸다.
1타와 2타가 연속해서 이어지고, 허공에서 잠시 뜸을 들였다가 3타부터 5타까지가 들어갔다. 그리고, 0.5초 가량의 딜레이 후에 마지막 6타가 휘둘러졌다.
갈수록 쇳소리가 더 커졌다. 챙챙, 채앵, 챙, 쨍, 째앵!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서 3타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따라서 5타가 엇박인지 아닌지 결정되고.
참고로 방금은 엇박이다. 저 더럽고 치졸한 이지선다에 얼마나 많이 낚였던지. 나는 옛날의 기억에 치를 떨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에리카와 맞상대하던 여기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그러자 일본도의 칼머리가 이마 정중앙을 찍어버렸다. 빠악! 하고 경쾌한 파열음이 들렸다.
이마를 얻어맞은 여기사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승패가 갈린 모양이었다.
“왔나.”
“뭐 하고 있었어?”
“보는 대로다. 대련을 하는 중이지.”
“그렇다기엔 분위기가 살벌한데?”
나는 연무장을 흘끗 쳐다보았다. 에리카도 갑옷만 안 챙겨입었다 뿐이지 이를 악문 표정이었고, 우리 반대편에 앉은 금빛 황혼 기사단 쪽 기사들의 얼굴에도 결연함이 엿보였다.
“이유는 알지 않나.”
“하긴. 그렇겠네.”
나는 알아서 납득하고 그 옆에 앉았다.
은빛 여명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그 전 영주놈을 도와 자기네를 갈갈이 찢어놓은 금빛 황혼 기사단을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는 황제였긴 한데, 카이킬리아가 그놈을 살려준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반쯤 제멋대로인 짓거리를 묵인해준 행동도 아주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그놈이 얼마나 제멋대로 굴었든, 다른 황가 친척들이 벌인 짓에 비하면 선녀처럼 보였겠지. 적어도 내가 꼼수를 써서 죽여버리기 전까지는 인간으로 남아있긴 했고.
정작 금빛 황혼 기사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아, 오셨나요. 델타 씨.”
가뿐하게 승리를 거두고 자리로 복귀한 에리카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웬 대련이야?”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시비는 저쪽이 먼저 걸긴 했지만요. 우리가 셋뿐이라서 만만해보였나봐요.”
에리카의 눈이 연무장을 흘끗 훑었다. 기사 여럿이 바닥에 널브러진 동료를 업고 어디론가로 급히 향하고 있었다. 아마 의무실일 거다.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기사들 전원이 여자였다.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다 이겼지?”
“물론이죠. 숫자는 저쪽이 더 많아도 전부 일반 기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한들, 일반 기사에게 패배할 만큼 저희들은 약하지 않아요.”
에리카가 짧게 웃었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면 쟤들 기사단장은 어디로 갔는데?”
“모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네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여태껏 내리 지기만 해서 그런지 불안한 표정으로 전전긍긍하던 금빛 갑옷의 기사가 나를 쳐다보곤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거기, 너!”
그 강압적인 목소리에, 우리들의 시선이 단체로 그 놈을 향했다. 건틀릿을 낀 손가락이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저 놈도 여자였으니 외형으로 누군지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 하는 놈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다가, 허리춤에 걸린 무기를 보고 간신히 기억해냈다.
게임에서는 중간 보스로 취급되던, 금빛 황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들 중 하나였다.
“너는 누구지? 누군데 그쪽에 앉아있나?”
“어, 그러니까…… 신입…… 이죠?”
내가 신입이라는 단어로 불려도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아직 정식 기사로 승급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잘됐군. 검을 들어라. 너도 은빛 여명 기사단의 일원이라니, 대련에 참가해야 한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얼굴이었다. 의도가 뻔히 보였다. 내가 신입 기사라니까, 날 두들겨패면서 승리를 챙기는 겸 해서 겸사겸사 자존심도 좀 회복하려는거겠지.
엄청나게 치졸한 짓이었지만, 그런 치졸한 짓을 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옆에서 리제와 에리카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우디아도 같이 끅끅대는 중이었고, 아이리스마저 황당하다는 눈초리를 했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저도 참가해야 합니까?”
“너도 은빛 여명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을텐데. 혼자서 내뺄 셈인가?”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의도대로는 안 흘러갈 것 같아서요.
내가 이걸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리제가 방긋 웃으며 내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갔다 오라는 의미였다.
아이리스와 클라우디아, 에리카도 비슷했다. 저쪽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아주 그냥 박살을 내버리라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싱글싱글 웃는 네 쌍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 그러죠, 뭐.”
기사단장들이 저렇게까지 기대하는데 뭐 어떡하겠는가. 원하는대로 해줘야지.
저 인간이 까불어대는 걸 보니, 자기네 기사단장이 나한테 대련을 신청했다가 아주 개박살이 났던 일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쪽팔려서 말을 안 해줬을 테니까.
무기들이 놓인 상자로 향했다. 피 묻은 검을 방에 놔두고 와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무기를 써야 했다. 도서관에 가면서 검을 챙길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기사단장들에게 무기를 빌리지 않는 이유는, 그랬다간 무기 때문에 졌다는 소리가 나올수도 있어서다. 아주 더럽고 치사한 주장이긴 한데, 쟤들이라면 혹시 모른다.
그 사이를 뒤적거리다가, 제일 밑에 깔린 무기를 집어들었다.
역시 있을 줄 알았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내가 집어든 무기는 망가진 직검이었다.
이런 다 낡아빠진 무기가 왜 다른 무기들이랑 같이 놓여있냐면, 금빛 황혼 기사단이 내부 인원에게 벌칙을 줄 때 이 무기를 들고 대련을 펼치게 한다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인챈트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풀강을 해도 맨손보다 대미지가 약해서 고인물들이 할거 없고 심심할 때 사용하는 무기들 중 하나였다.
내가 집어든 무기를 본 금빛 갑옷 여기사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후회는 없나?”
“후회할 거면 이걸 안 들었죠.”
내 입장에서는 이게 맨손보다야 훨씬 나았다. 이건 그래도 꼴에 한손검이라고 양잡을 하면 튕겨내기를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맨손은 튕겨내기가 안 된다.
“그게 소원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마!”
금빛의 기사가 씩씩대며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왔다. 나도 그에 맞춰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웃음이 가득 담긴 네 쌍의 시선이 콕콕 꽂혔다.
반대로, 금빛 황혼 기사단 쪽은 쟤들이 대체 왜 저러는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자기편 신입이 대련에 망가진 직검을 사용하겠다는데, 조금의 불안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쿡쿡 웃어대기까지 하니. 뭔가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겠지.
나는 망가진 직검을 들고, 뒤편에 있는 기사단장들을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기사단장님들. 제가 원래 쓰던 무기는 따로 있지만, 애석하게도 안 들고 왔으니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이가 잔뜩 빠지고 너덜거리는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는 일단 예쁘기는 더럽게 예쁜 금빛 황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있었다. 저런 악에 받친 표정인데도 여전히 예쁜 걸 보니 역시 모드의 힘이 위대하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괜히 그러다가 삐끗해서 한 대 맞을라. 망가진 직검을 든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여유를 부린 거다. 나는 칼 끝을 눈앞의 황금빛 여기사에게로 향했다.
“망가진 직검으로 해볼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