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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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어떤 게임의 최종 보스라고 한다면, 그 위치에 걸맞은 강력함과 무게감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말 그대로 게임의 끝판왕이니까.
아예 처음부터 개그 컨셉의 보스이거나 스토리상으로 하찮다는 빌드업을 꾸준하고 충실하게 깔아놓았다면 모르겠지만, 최종 보스전이 빈약하다면 일단 좋은 소리는 못 듣기 마련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최종 보스인 ‘세계를 먹는 자’는 플레이어들의 염원을 아주 정확히 충족시키는 보스였다.
브닼 4의 모든 보스들을 통틀어 유일무이하게 4페이즈가 존재하고, 페이즈 별로 컨셉도 확연하게 다른데 각각의 페이즈 하나하나가 바닐라에서마저 미친 듯이 어렵다.
배경 설정 역시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데다, 그 강함을 게임에서 실제로 보여주기도 하며, 페이즈마다 달라지는 컨셉까지 사람들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적 강화 모드를 제작하는 모더들이 세계를 먹는 자에 특히나 더 많은 공을 들인다고 해도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아예 세계를 먹는자‘만’ 강화시킨 모드의 숫자가 10개를 넘어갔으니 말 다한거다. 특히 닼라 모드는 그 10개가 넘는 바리에이션을 죄다 하나로 합쳐놓기까지 했고.
하지만.
그 어떤 적 강화모드에서도 세계를 먹는 자가 메인 스토리 초반에 난입하지는 않았다.
ㅡ!!!!!!
포효가, 아니, 단순히 포효라는 단어로 지칭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무형의 덩어리가 그 머리에서 토해졌다.
복도 창문 너머로 그 여파에 휩쓸려 금이 가거나 심지어는 무너져내리기까지 하는 건물들이 보였다. 단순히 괴성을 내지른 것만으로 건물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나는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박살나는 건물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움직였다. 일단은 카이킬리아의 말을 따라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와 피 묻은 검을 챙긴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제의 방을 확인했다. 쌍단검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다행히 제때 챙겨서 나간 듯 했다.
나는 황궁 밖으로 향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여기서 그놈이랑 싸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세계를 먹는 자와 싸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공략법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데다, 어차피 언젠가는 쓰러뜨려야 할 녀석이니까.
‘지금은 아무도 못 이겨.’
하지만, 지금 여기서 싸우는 건 문제였다.
세계를 먹는 자는 특정한 퀘스트를 끝마치기 전에는 무적 상태라 대미지가 아예 안 들어갔다. 그 특정한 퀘스트라는 건 메인 스토리의 최후반부에서나 등장하고.
브닼 4 메인 스토리의 최후반부는, 주인공이 세계를 먹는 자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뒤 그 비밀을 파헤쳐가는 과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반대로 말해 그 비밀을 파헤치지 않는 이상에야 저 놈을 죽일 수는 없단 뜻이다.
그 주인공마저도 세계를 먹는 자와의 첫 만남에서 놈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압도적으로 패배한다. 아예 첫 보스전만을 위한 특수 기믹까지 존재할 정도니 말 다한거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아.’
어차피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세계를 먹는 자의 비밀을 건드려대기 전까지는 세계를 먹는 자 또한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다.
첫 번째 보스전이 치러진 이유도 오해에 가까웠다. 주인공이 수상한 파동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향한 자리 근처에, 우연히 그놈과 연관된 비밀이 존재했던 것이다.
세계를 먹는 자가 전투에서 패배한 주인공의 기억을 읽은 뒤, 여기에 온 목적이 자신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것과는 무관하단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그냥 가버려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거고.
‘그놈이랑 지금 싸우는 건 절대 안 돼.’
내 기억이 읽히는 것과,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우리 쪽에서 선공을 시작하는 상황만 조심하면 된다. 그 두 가지만 조심한다면 전투 없이 끝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세계를 먹는 자와 맞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델타! 괜찮나!”
황궁 정문으로 나가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전투를 준비하던 기사단장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갑옷은 모두 저택에 놔두고 온지라 어쩔 수 없이 정복 차림이었다.
그 옆에는 황금색의 갑옷으로 중무장한 금빛 황혼 기사단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무기도 다양했다. 칼, 대검, 창과 방패, 도끼. 모두 한 번씩은 본 적 있는 바리에이션들이었다.
금빛 황혼 기사단의 옆에는 은색의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또 그 옆에는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마법 지팡이를 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이 병력들이 아마 드래곤과의 전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전부일 것이다.
“나야 당연히 괜찮지. 상황은 어때?”
“굉장히 좋지 않다만,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어떻냐고 묻는 걸 보아하니 델타 너도 소식은 들은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굳이 설명을 하진 않겠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리스도 얼굴을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나도 저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저게 평범한 드래곤이었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성검을 지닌 황제 본인과, 수백 년을 살아온 대마법사에, 그 대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물론, 제국 최고의 기사들까지 있는데 평범한 드래곤을 왜 걱정하겠는가.
아무리 드래곤이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존재라지만, 내 짐작으로는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덤벼볼 만 했다. 정 안되겠으면 내가 혼자서 상대해도 되고.
단지 여기서 드래곤과 싸움판이 벌어진다면 그 여파를 제국이 고스란히 뒤집어쓴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지만, 세계를 먹는 자는 달랐다.
지금 전투를 준비하는 병력의 열 배, 백 배를 불러와도 무적 상태를 해제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기기는 커녕 생채기를 내는 일조차 불가능할테니까.
그러니 더더욱 전투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일단 여기 모인 병력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중이다. 놈이 언제 도착하냐에 따라서 어느정도의 피해는 각오해야 되겠지만.”
평범한 기사들은 드래곤을 상대로 시간끌기용 고기방패조차 되지 못한다. 브레스 한 방으로 수십, 혹은 수백이 일거에 쓸려나갈테니. 여기 있어봤자 그냥 개죽음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당연히 일반 시민들 대피시키는거다.
“폐하께서 오시는군. 따라와라, 델타.”
바로 앞에 푸른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걸 본 아이리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아이리스의 뒤를 따라 기사단장들이 자리잡은 곳에 섰다. 나머지 세 명 역시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빛기둥이 솟아오르고, 그 안에서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가 나타났다. 이곳에 모인 전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고개를 들라. 쓸데없는 행동으로 빈틈을 보이는 짓이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네르바는 평소의 목욕 가운 비스무리한 옷차림 그대로였고, 카이킬리아는 나를 침실에 불렀을 때 입었던 정장을 완벽히 갖춰 입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정장이 원래 어떤 옷이었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전투용 예복이구나.’
아무래도, 황제와의 보스전에서 2페이즈로 진입할 때 걸치고 나오던 전투용 예복이 정장으로 바뀐 듯 했다. 황제가 입는 옷이라고는 두 가지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잠깐. 그러면 나 부르기 전에 저거 입고 뭘 했던거지?’
내가 아는 황제의 전투용 예복이 정장으로 바뀐거라면, 날 부르기 전에 대체 뭘 했길래 저걸 입었는지 의문이었다.
누군가랑 싸우기라도 했던 건가.
“전원, 준비하라.”
카이킬리아는 성검을 빼들며 짧게 읊조렸다. 짤막한 말이었지만, 그 하나로 충분했다. 미네르바를 필두로 한 마법사들이 지팡이에 마나를 불어넣고, 기사단장들이 무기를 겨누었다.
말려야 했다.
지금 당장은 저놈한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할거라고, 덤벼들어봤자 오히려 우리만 당할 뿐이라고. 전투를 벌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 잠시만 멈춰달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이 상황을 멈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기사단장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내 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겠지만,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는?
그 둘이 내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한데, 과연 이런 상황에서 무기 내리고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내 말에 그렇구나 하고 따라줄지는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여기서 더 재수가 없다면 세계를 먹는 자가 내 말을 듣고 호기심을 가져 기억을 읽으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이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로서도 드래곤과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설마 감정적인 이유만으로 저것에 선제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겠지.
저편에서 소름끼치게 커다란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지상에 어마어마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게임에서 보던 모습과 비슷했다. 드래곤 하면 생각나는 형상의 거대한 머리와, 그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뿔. 전신을 촘촘히 뒤덮은 두 가지 색깔의 비늘.
네 쌍이나 달려있는 커다란 날개. 울퉁불퉁한 근육 그 자체인 팔과 다리. 몸 뒤로 쭉 뻗어나가 있는 꼬리.
‘……뭐 저렇게 커?’
게임으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크기를 제외한다면, 외형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게임에선 주인공이 휘두르는 무기가 그럭저럭 머리에 닿을 크기라면, 지금은 팔을 아무리 힘껏 뻗어도 저기 닿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할 크기였다.
금빛 황혼 기사단 사이에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벌벌 떨며 무기를 놓치는 기사도 있었다. 나머지 기사단장들 역시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어보였다.
그나마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가 조금 잘 버티고 있는 듯 했지만, 성검과 마법 지팡이를 든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거였나.’
세계를 먹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생명체가 공포에 빠진다는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오직 주인공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 효과에서 자유로웠고.
지금의 내가 멀쩡한 것이 게임 속 주인공은 저놈에게 영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내 머리에 걸린 흑마법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ㅡ콰아아아앙!
세계를 먹는 자가 우리 앞에 그 거대한 몸을 펼치며 내려앉았다. 바닥에 내려앉은 여파만으로 주변의 건물들이 무슨 수수깡처럼 박살났다.
멀리서 날아올 때도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눈앞에 내려앉으니 체감 높이는 그 이상이었다.
고층 아파트와 비슷한 크기인 암석 지네와 맞먹거나, 혹은 그보다 더할 듯 싶었다. 단순히 쳐다보기 위한 동작조차 목을 위로 한참 꺾어야 했다.
ㅡ!!!!!!
놈의 입에서 소리 그 자체라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을 포효가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나도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공포에 질려서가 아니라, 그냥 시끄러워서였다.
털퍽, 근처 기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도, 클라우디아도, 에리카도, 리제도, 금빛 황혼 기사단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외가 아니었다.
기사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뒤떨어지는 마법사들이 제일 먼저 기절하고, 그 다음으로 일반 기사들이 쓰러지고,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장들이 의식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대마법사와 성검에게 간택 받은 제국의 황제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
포효 한 번.
고작해야 포효 한 번에 불과한 행동이 훑고 지나갔을 뿐인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흉흉하기 짝이 없는 붉은색의 동공이 날 향했다.
다음화는 10월 29일 01시 업데이트 됩니다.
붉은 안광을 내뿜어대는 커다란 눈을 보자마자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저 눈동자 한 개의 크기가 내 키와도 맞먹을 듯 했다.
그런데, 내 키와도 맞먹을 크기의 저 눈동자조차 몸 전체로 따진다면 별 것 아닌 수준이었다. 정말 더럽게 크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브닼 4의 주인공은 저걸 대체 어떻게 쓰려뜨렸나 싶을 만큼, 정말 말도 안되게 컸다. 패턴이고 나발이고 그냥 브레스만 뿜어도 못 피하고 죽을 것 같았다.
흉흉한 기색의 세로 동공이 날 향했다. 나는 혹시라도 저놈이 내 기억을 읽으려는 낌새를 보이는 순간, 뒷감당이고 뭐고 바로 피 묻은 검을 뽑아 덤벼들 생각으로 만반이었다.
어차피 내 기억이 읽힌다면 거기서 끝이니까.
저놈으로서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를 여기서 무조건 죽여야 할 테고, 저 거대한 덩치에 나 혼자 콕 집어서 죽일 리가 없으니 이 근처가 통째로 증발해버릴 거다.
안 덤벼도 죽고 덤벼도 죽는다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지금 당장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건 다행이긴 한데.’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몰라도, 놈은 나를 빤히 응시하기만 할 뿐 덤벼들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설마 이대로 그냥 돌아가주려나, 하는 희망찬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ㅡ!!!!!!
이런 내 희망찬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주둥아리가 쩌억 벌어지더니 세찬 포효가 터져나왔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진짜 더럽게 시끄러웠다.
드래곤의 포효를 단순히 시끄럽단 감상만으로 넘기는 행동부터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짓일 테지만 말이다. 실제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죄다 기절해버렸기도 했고.
하다못해 그 황제조차도 버티지 못했으니, 내가 정말로 특수한 경우였다.
‘방금은…… 용언, 이겠지?’
설정상으로 저 포효는 드래곤들의 언어, 줄여서 용언이라고 불리는 개념이었다.
흔히 판타지의 드래곤이 사용하는 용언처럼 말에 힘이 담겨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대화하는 거다. 물론 그 평범이라는 건 당연히 드래곤 기준이고.
그러니 황궁 복도에서 들었던 포효 소리와 여기 착지한 다음에 내뱉은 포효 모두, 세계를 먹는 자 따름에는 무언가 대화를 시도한 흔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정작 듣는 인간은 그걸 못 버텨서 픽픽 쓰러지고, 포효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주인공조차 저놈이 뭔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용언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드래곤을 죽여 그 힘을 흡수해야만 했다. 메인 스토리의 중반부쯤에 드래곤 토벌이 필수 퀘스트로 들어가 있는 이유가 다 그래서다.
다만, 용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주인공은 용이 아니라 인간이니 당연했다.
‘그러니까, 저게 방금 나한테 대화를 시도했다는 건데…….’
일단 누군가와 싸우려고 여길 찾아오지는 않은 듯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다만, 내가 한시름 놓은 것과는 별개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저쪽에서 먼저 전달 방법을 바꿔야 했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놈은 몇 번씩이나 포효를 내지르다가, 눈앞의 인간이 그걸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동작을 멈췄다.
그러자, 내 앞에 순수한 마나가 떠오르더니 자기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마나 그 자체가 꿈틀거리며 모여들어선 인간의 형상을 갖춰갔다.
제일 먼저 두 다리가 땅을 디디고, 몸통이 생겼다. 어깨 옆으로 팔이 돋아난 다음 그 위에 둥그런 모양의 머리가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귀와 입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파란색의 인간 그림자처럼 생긴 형상이었다. 이런 형상까지 만들어 낸 것을 보아하니, 정말 어지간히도 내게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특이하다…….”
그림자 비스무리한 마나의 형상이 입을 열었다. 인간의 말처럼 들리지만, 인간의 것이라고 부르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우리의 언어를 듣고…… 쓰러지지 않으나……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드래곤 기준으로 손가락 하나 크기만도 못할 형상을 통해 대화를 하려니 영 힘든지, 말투가 더듬더듬 했다. 그래도 아주 못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었다.
“내가 특이하건 말건, 그쪽…… 이 상관 쓸 건 아니지.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온 건데?”
순간 저놈에게 예를 갖춰 존댓말을 써야 할지 아니면 그냥 반말을 써야 할지를 고민했으나, 어차피 저놈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일 것 같았기에 대충 반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드래곤한테 인간처럼 예의라는 개념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인간을…… 만나러 왔다…….”
“인간을 만나러 와? 누군데?”
“신이 창조하였으나……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 그것을 처치한…… 인간…….”
‘아니, 또 나야?’
잠시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날 만나러 왔다니, 정말 메인 스토리가 꼬여도 제대로 꼬여버렸다. 이런 걸 원하고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처치한 게 아니었는데.
설마 게임에서 했던 그대로 영주를 처리한 행동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져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질적으로 모든 뒤틀림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으니까.
카이킬리아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것도, 스텔라가 나를 찾아온 것도, 성국으로 향한 것도,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때려잡은 것도 전부 다 악마가 깃든 책을 가져온 행동이 시발점이었다.
이제는 또 그것 때문에 세계를 먹는 자까지 나타났으니,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인간이 여기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데?”
“그것의 힘…… 모두 흡수되었다…… 한 인간에게…….”
힘이 흡수됐다, 라.
애매모호한 표현이었지만, 정황상 경험치를 뜻할 확률이 높았다.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처치한 경험치가 내게 흡수되어 레벨이 올랐으니, 어떻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고.
세계를 먹는 자가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신경 쓰는 행동 자체는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 놈을 계속해서 방치하면 성국에 이어 세계까지도 멸망해버린다는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은 주인공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세계를 먹는 자와 대적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그렇다면 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소지가 다분한 녀석을 일찌감치 짓밟아놓지 않느냐. 그건 바로 놈의 홈그라운드인 심연에서는 세계를 먹는 자조차 승패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룬으로 심연에 잠식되는 것을 막았다고 해도, 그 속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모가지를 따버린 주인공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그 힘을 흡수한 인간이 나라는 거고.”
“정확…… 하다…….”
“그래서, 알아차렸으면 이제 어떡할 건데? 그 인간을 죽이기라도 하려는 건가?”
“죽여……?”
놈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듯 싶더니, 갑자기 드래곤 쪽이 포효를 내질렀다. 나는 또다시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아니, 필요 없어.”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괜히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가 브레스 맞고 산화할라.
“여기에 온 이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피조물을 누가 죽였는지 말인가?”
“그렇다…… 그 인간…… 위협이 된다면…… 제거해야 한다…….”
그 말과 함께 놈의 안광이 내뿜는 흉흉한 빛이 한층 강해졌지만, 흉흉한 기색은 곧 잦아들고 다시 세로 동공으로 되돌아왔다.
“허나…… 눈앞의 인간…… 약하다…… 쓰러진 인간보다…… 훨씬…….”
‘스탯만 보면 그렇긴 하지.’
처음에 버려진 자로 감옥에서 눈을 떴던 때보다야 압도적으로 강해지긴 했어도, 세계를 먹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거기서 거기였다.
저기 힘없이 쓰러져 있는 카이킬리아나 미네르바만 해도 스탯을 플레이어처럼 환산하면 훨씬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녔을거다.
인간형 NPC 혹은 보스가 그 정도인데,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처럼 마물형 보스로 넘어간다면 아예 플레이어 기준으로 환산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스탯을 더 많이 찍을수록 능력치의 상승 폭이 줄어드니, 기껏 시도한다 해도 체력 스탯 수만, 힘 스탯 수천, 내구 스탯 수천 이럴 테지.
그런 괴물들에 비하면 고작 62렙짜리의 능력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나아.’
괜히 저놈한테 눈도장이 찍히는 것 보단, 차라리 별거 없는 인간처럼 여겨져서 대충 넘어가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제발 이대로 착각하고 넘어가달라며 속으로 기도하는 찰나.
“무언가 다른 힘이…… 있을 것이다…… 그 놈을 처치한…… 힘이…….”
‘돌겠네.’
놈의 말이 바뀌는 걸 듣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무래도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되는 게 없냐.’
다른 보스들은 설령 지금부터 싸워야 한다 하더라도 투덜거리면서 시도를 해볼 순 있겠지만, 세계를 먹는 자만큼은 안 된다.
물리적으로 피해를 못 주는데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게다가, 게임에서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커진 지금은 그냥 저놈이 하늘로 날아올라서 밑으로 브레스 한 방만 쏴도 사망이 확정이었다. 더 암울한 것은 그런 패턴이 진짜로 있다는 사실이고.
“진실을…… 원한다…….”
‘젠장.’
놈의 안광이 검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나 인간의 머리에도 눈동자가 돋아났다. 드래곤과 똑같이 검은 안광으로 물든 세로 동공이었다.
나는 그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피 묻은 검을 빼들어 휘둘렀다. 칼날이 목을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잘려나간 머리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잘린 머리는 벽 근처까지 굴러가선 벽을 보고 멈춰섰으나, 이내 내 쪽을 향한 뒤통수에서 새로운 눈과 입이 돋아났다.
뒤통수에 새로 돋아난 입이 뻐끔거리며 문장을 만들어냈다.
“어떤 이유로…… 이것을 공격하였지……?”
‘……결국, 이렇게 되는건가.’
저 놈이 게임에서 보던대로 내 기억을 읽으려 하길래 반사적으로 팔이 나가버렸다. 이미 각오는 한 일이었는데도 막상 목전에 닥치니 입맛이 썼다.
인간끼리의 대화라면 니가 수상한 짓을 하길래 먼저 공격했다는 변명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저놈은 드래곤이다. 그것도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가진 드래곤.
자기가 먼저 수상한 짓을 했단 자각은 조금도 없이, 그저 기억을 읽는 행위가 방해받았으니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게임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한 번 나왔었으니까 말이다.
“말…… 해라……!”
잘려나간 인간 머리의 눈이 부릅떠지고, 놈의 본체가 붉은색 안광을 내뿜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