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26)
세계를 먹는 자의 첫 보스전 한정으로만 등장하는 특수 기믹.
그건 바로, 무기의 내구도였다.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에는 전통적으로 무기의 내구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플레이어에게 어려운 경험이 아니라 불쾌한 경험만을 제공해 줄 뿐이라는 제작사의 아주 확고한 개발 철학 덕분이었다.
무기의 내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일단 한손 검이기만 하면 종류 불문하고 튕겨내기를 쓸 수 있다는 특성과 합쳐져, 다 낡아빠지고 녹슨 칼날로 집채만 한 마물의 공격을 가뿐히 받아쳐보이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기에만 황당할 뿐, 온갖 악랄한 함정들과 몹 배치로 인해 죽어나가기 바쁜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덜 신경써도 되도록 만들어준 아주 고마운 개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계를 먹는 자와의 첫 만남에서 주인공의 무기가 파손된 것을 목격했을 때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큰 충격과 공포에 빠졌을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강제 패배 이벤트의 조건도 그거였다. 무작정 닥돌해서 죽는 게 아니라, 놈을 공격해서 무기의 내구도를 전부 닳게 만들기.
그래야만 무기가 부서지는 컷신과 함께 보스전이 클리어된다.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나는 칼날 밑동의 일부분만을 남긴 채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흩어지는 피 묻은 검의 파편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오만가지 무기와 괴물의 공격을 흠집 하나 없이 튕겨내왔던 무기가, 고작 저놈 비늘에 한 번 닿았다고 아주 박살이 나버렸으니.
나중에는 이 무기로도 얼마든지 저놈이 하는 공격을 튕겨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체중을 실어 내려찍는 앞발이건, 광범위한 공간을 휩쓸어버리는 꼬리건 전부 다.
칼자루만 남은 피 묻은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세계를 먹는 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벤트 플래그는 다 끝내놓았다. 남은 일은 저놈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놈은 자신에게 씨알도 안 먹힐 발악을 한 눈앞의 인간을 잠깐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치켜올리기 시작했다.
목을 최대한 위로 빼며 상체를 바로 세우고 두 앞발을 쾅 내딛어 몸을 지탱하자, 가뜩이나 컸던 몸집이 한층 더 거대해보였다.
‘……진짜 크기는 더럽게 크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부러진 무기를 든 채로 덤덤히 서 있었다. 사실 여기서 뭔가를 더 해볼래야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고.
ㅡ용감하다…… 인간…….
머릿속에 또다시 사념이 때려박혔다. 역시 예고 따윈 없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몸이 잠시 휘청거렸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대화를 건넬 목적이었던 듯 충격은 금방 가라앉았다.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놈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내 행동이 제법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 이쪽에서 먼저 공격을 했는데도 분노했다거나 반격을 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선도 아주 약간 호의적으로 변한 낌새였다.
물론 날 보는 시선이 조금 호의적으로 변한 것과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별개였다. 놈의 세로 동공이 또다시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자루만 남아버린 피 묻은 검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내 기억을 모조리 읽어낸 다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죽이려 들겠지.
“……윽?!”
순간, 머리 안에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무언가가 나를 단단히 감싸안은 듯한 감각이었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세계를 먹는 자의 눈동자가 원래처럼 흉흉한 붉은색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어떻게 되먹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의 행동이 끝났단 사실만은 알 수 있었으니까.
ㅡ그렇게 되었나…….
하지만, 놈의 말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차분했다.
ㅡ납득했다…… 인간……
‘납득했다고? 뭘?’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상과 전혀 달랐다. 지금쯤 자기 비밀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냐면서 날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할 텐데, 뜬금없이 납득했다니.
저게 대체 뭔 소리지.
ㅡ태양…… 달…… 그것들이다…….
저놈은 알 수 없는 단어를 툭툭 내뱉으며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사념을 들이밀어대고 있었다. 그걸 듣는 나로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양이랑 달이면, 성국에서 모시는 신들인데…… 교황들이 나한테 뭘 했었나?’
무슨 초록머리 고양이 수인 여자도 아니고, 왜 자기 혼자서만 다 아는 듯이 지껄여대는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듣는 사람 궁금할 여지도 없게 속으로만 생각하던가.
오래 산 것들은 다 저런 성격인건지 의문이었다. 듣는 사람은 답답해서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자기는 쓸데없는 단어나 툭툭 내뱉어대니 말이다.
지금 내가 입을 열 수 있었다면 제대로 설명하라며 냅다 소리를 질렀을테지만, 계속해서 몰아닥치는 사념 탓에 도저히 입이 열리질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은 이미 한계였다.
ㅡ신의 힘을 견딜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처치할 수 있었겠지…….
‘신의 힘을 견뎌?’
문득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놈은 분명 나한테서 태양과 달의 신성력이 느껴진다고 했었다.
죽기 직전에는 원래 그 힘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릇이 버티지 못해서 녹아내렸어야 한다고도 했었고.
그때는 나도 출처를 몰랐으니 적당히 내 것 아니라는 말로 넘겼었는데, 그게 정말로 신의 힘이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대충 설명이 됐다.
물론 그런 게 대체 왜 내 몸에 깃들었었냐는 의문이 새로 생겨나겠지만.
ㅡ신의 힘을…… 견디는 인간…… 흥미롭다…… 허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머리를 휘젓던 사념이 사라졌다. 마침내 행동이 자유로워졌다.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과 아픔이 자취를 감췄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놈은 두 쌍의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쳐선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그냥 돌아가버리려는 모습이었다.
나는 안도감과 어리둥절함이 반씩 깃든 표정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놈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내 기억을 못 읽은건가? 그렇다기엔 자기 혼자서 뭔가를 납득했던 듯한ㅡ
‘아, 설마.’
세계를 먹는 자가 내 기억을 읽으려고 했을 때 느껴졌던,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무언가가 전신을 감싸는 감각.
그 힘을 감지하고선, 내가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뭘로 죽였는지 혼자 납득하고 물러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놈은 이런 내 혼란에도 아랑곳 않고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훌쩍 날아올랐다. 그 여파로 인해 땅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건물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늘 저 편으로 날아오른 세계를 먹는 자의 몸이 점점 더 멀어져갔다. 정말로 나한테 볼 일은 전부 다 끝났다는 태도였다. 이내, 그 거구의 몸체가 태양 저 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랑곳 않고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일단 생각나는 후보군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좁혀지긴 하는데.’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 보스전에서 사용했던 막대한 양의 신성력과, 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교황들이 내게 걸어주었다던 축복.
세계를 먹는 자가 확인한 것은 아마도 전자였겠지만, 후자의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뭔가 확실하게 밝혀지기 전까진 속단은 금물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냥 교황들한테 물어보면 될 일 아니었나?’
나중에 질문하자고 속으로 다짐까지 해놓고 새하얗게 까먹어버렸다.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처치한 이후에도 이래저래 사건이 많았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고.
‘모르겠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기절한 사람들 수습하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동강난 무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벤트성으로 파괴된 것이니만큼 대장간에서 비용 없이 수리가 되기는 한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피 묻은 검은 포기하고 새 무기를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결국 이런식으로 기억 안 읽히고 결론이 날거였으면 무기를 괜히 깨먹은건가 싶긴 했지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카이킬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마자 섬짓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세계를 먹는 자와 직접 나눈 대화는 사념이 머릿속에 때려박히는 형식이라 엿들을 여지가 전혀 없지만, 마나 인간과 나눴던 대화는 혹시 들렸을지도 모른다.
괜히 나한테 관심 가질 빌미를 더 제공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나는 치솟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카이킬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황제 폐하?”
카이킬리아는 모두 보았다.
포효에 휩쓸렸다 깨어난 여파로 인하여 사지를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눈은 뜨고 있었으니 델타가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드래곤의 포효를 들었음에도 두 발로 굳건히 버티고 선 것, 혼자서 드래곤의 앞을 가로막은 것, 드래곤의 위협에도 전혀 밀리지 않고 대적하는 것.
드래곤이 푸른 마나를 뭉쳐 한낱 인간과 대화를 나누려 하는 것, 그러다가 또다시 포효를 터뜨려 델타를 위협하는 것, 갑자기 마나로 만들어진 인간의 목을 날려버린 것.
그리고, 델타가 드래곤에게 무기를 빼들고 덤벼드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을 말이다.
비록 델타가 휘두른 무기는 드래곤의 비늘에 닿자마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으나, 그런 결과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것이…… 가능하단 말이더냐……?’
있을 수 없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낱 인간이 드래곤과 대적한다고? 그것도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크기의 드래곤과?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나?
허나,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믿어야만 했다. 저 사내는 그것을 해내었다고.
‘어떻, 게…….’
들고 있는 무기가 박살났음에도, 이제 자신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음에도 그 뒷모습은 여전히 당당했다. 일말의 움츠러듬조차 없고, 겁먹은 기색은 더더욱 없었다.
상체를 치켜든 드래곤이 금방이라도 브레스를 내뿜을 것처럼 살기를 피워올리는데, 저 살기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는 카이킬리아조차 그 여파로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떨려대는데.
델타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이, 무슨…….’
경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델타와 마주본 채로 한창 기세를 피워올리던 드래곤이 먼저 하늘로 날아올라 돌아가버린 것이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 하나만은 명백했다. 드래곤은 돌아가버렸고, 델타는 아직도 제자리에 자신의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다는 것.
카이킬리아는 그 뒷모습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쳐다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늘 저 편으로 멀어져가는 드래곤을 잠시 쳐다보던 델타는, 동강난 자신의 무기를 슥 훑고선 그걸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카이킬리아를 발견하고 멈칫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황제 폐하?”
멈칫거림은 잠깐이었다. 델타는 곧장 카이킬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자 온 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아아…….’
방금의 광경으로, 카이킬리아는 확신했다. 이 자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노라고 말이다.
침실로 불렀을 때부터 반쯤 확신하던 사항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확신을 넘어 경외로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었는가…….’
미네르바가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자신을 갖는 건 좋지만, 자만은 하지 말라던 말. 카이킬리아가 그 충고에 뭐라고 답했더라?
정말로 저 사내가 그런 존재라면, 생각을 바꿀 의향이 있다고 답했었지.
“폐하? 괜찮으십니까?”
바로 옆까지 다가온 발소리를 느끼며, 카이킬리아는 피로를 더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커다란 만족감과 함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