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28)
“재료를 구해주겠다고? 네가?”
“그렇습니다.”
다행히 비약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그대로였던 듯, 주황머리의 여자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렌지색의 동공이 나를 위아래로 슥슥 훑었다.
이렇게 보니, 미네르바와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키가 제법 컸다.
“……뭐, 내가 약 만들고 있단 사실까지 아는 걸 보니까 각 잡고 찾아온 것 같긴 하네. 일단 들어와. 여기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뭐하니까,”
문지방에 비스듬이 기대어 서 있던 여자가 몸을 돌리며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도 미네르바에게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미네르바는 아직 불만이 덜 가신 얼굴을 하면서도 얌전히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집 안은 제법 깔끔했다. 전체적으로 숲 속에 산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공간이었다.
주황머리의 여자는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에 앉으라는 눈짓을 주더니, 내 옆에 있는 미네르바를 쳐다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더러 다 들으라는 것처럼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쪽이 앉을 의자는 없어.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미안해보이는 얼굴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가 앉은 자리의 바로 옆에 대놓고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도가 뭘지는 뻔했다.
덩달아 불쾌한 표정을 짓는 미네르바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자칫 잘못했다간 무기를 구하기도 전에 냅다 싸움판이 벌어질 것 같았다.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턱을 괸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무기 만든단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건데? 대장장이 짓 내려놓은 지 꽤 됐는데. 최소로 잡아도 십 년이야. 너는 내 예전 소문을 들었다기엔 너무 젊기도 하고.”
“뭐, 적당한 정보 수급처가 있었습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게임에서는 어느 노인 NPC가 주는 서브 퀘스트를 끝까지 수행하면 그 노인이 여기로 가보라는 언질을 주지만, 지금은 그냥 바로 여기에 도착했으니까 말이다.
참고로 노인이 주는 퀘스트를 클리어 안하면 여기에 못 들어오도록 길이 막혀 있다.
‘잠깐, 그러면 이 사람은 대체 몇 살인거야?’
원작의 NPC는 20년 넘게 대장장이 일을 해온 사람이었고, 자기 입으로 그만둔지 10년이 넘었다고 했으니 설정이 그대로라면 10살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쳐도 현재로썬 40살이 훌쩍 넘어간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40대가 아니라 10대라고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얼굴에 주름살은커녕 잡티 하나 없었고, 반팔 밑으로 드러난 팔의 피부도 무척이나 탄력적이었다.
설마 이 세상 여자들은 늙어죽기 직전까지도 노화 없이 저런 외모를 유지하는건가.
“끙. 뭐, 보나마나겠지. 빌어먹을 노친네. 내가 여기 위치 알려주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주황머리 여자가 작게 투덜거렸다. 한동안 궁시렁대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그 노친네 탓해봐야 뭔 소용이겠어. 이왕 이렇게 된거 통성명이나 해보자. 내 이름은 세레스고, 직업은 너도 알고 찾아왔을 테니 생략. 나머지는 보는 대로인데, 그쪽은?”
“저는 델타입니다. 그리고 제 뒤에 계신 이 분은ㅡ”
“미네르바 스키엔티아란다. 영원의 마법사, 혹은 미네르바 대서고의 주인, 그것도 아니면 미네르바 마탑의 주인. 원하는대로 부르렴.”
내가 소개를 해주기도 전에 미네르바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은 이명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자기소개를 하는 이 순간만을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영원의 마법사 미네르바? 당신이 정말로 내가 아는 그 스키엔티아라고?”
자신을 세레스라 소개한 주황머리의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미네르바가 또 있다고 생각하니?”
세레스가 자신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자, 미네르바의 표정이 살짝 우쭐해졌다. 저런 걸로 득의양양하다니, 진짜로 400년 살아온 대마법사의 위엄은 다 내다버렸구나 싶었다.
“나 어릴 때도 진짜 오래 전 인물이라고 불리던 사람인데. 당신, 대체 몇 살이야?”
물론 곧바로 박살났지만.
나는 눈가를 씰룩이며 슬그머니 지팡이를 움켜쥐는 미네르바에게 다시 한 번 제발 진정해달라는 눈빛을 건네고, 세레스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부탁드리고 싶었던 거지만, 그런 언행은 되도록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레스 씨.”
“뭐, 내가 어릴 때부터 워낙 험하게 굴러다니면서 커서 말이야. 이렇게 살아온 년이라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무기 받으러 찾아온 건 그쪽이잖아? 아쉬운 것도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테고. 정 싫으면 돌아가도 돼.”
세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이대로 우리가 문 나가서 돌아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도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세레스 씨도 아쉽긴 매한가지일 텐데요?”
“나? 내가 왜?”
“그 비약 재료, 혼자서는 절대로 못 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몇 년째 만들 시도조차 못 해보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 그걸 구해다주겠다는 사람이 떡하니 나타났는데 아쉽지 않으실 리가요.”
“…….”
내 말에 세레스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꼬았다. 내가 저 여자를 이만큼 자신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는, 원작에서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 NPC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처음에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것처럼 굴지만, 정말로 플레이어가 그냥 돌아가버리겠다는 선택지를 고르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물론 자존심은 더럽게 강해서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한번 더 고르는 순간 나도 너 필요 없으니 그냥 꺼져버리라며 플레이어를 내쫓아버리긴 한다.
이 여자가 여태껏 보여준 언행으로 미루어보아 성격이 크게 바뀌지 않은 듯 해서 던져본 노림수였다. 그리고 내 노림수는 정확히 적중했다.
“……부정은 못하겠네. 너희들이 정말로 그 비약 재료를 구해주러 온 거라면, 나도 이대로 보내긴 아깝지. 알았어. 최대한 시비 안 걸려고 노력해볼게.”
세레스는 얌전히 한 발 물러났다. 저쪽이 먼저 꼬리를 내린 걸 확인한 미네르바도 지팡이를 쥔 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내가 비약 만들려고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을 테니까. 거래 조건은 간단해. 너는 나한테 비약 만들 재료를 구해다주고, 나는 너한테 원하는 무기를 건네준다. 맞아?”
“정확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세레스는 한 팔로 턱을 괴고, 다른 팔의 검지로 책상을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뭔 정보를 들었길래 저렇게 자신만만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네르바까지 데려왔으니 믿고 맡길만 하겠지. 어차피 내가 손해 볼 것도 없고.”
생각을 끝낸 세레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민은 얼마 하지도 않았다. 성격답게 시원시원한 결단력이었다.
“좋아. 거래 성립. 그러면 뭘 구해야되는지 재료부터 알려줄게. 지금 당장 시작해도 상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짝 집중했다. 이 여자가 만들려는 게 특정한 약이라는 사실까지는 게임과 같지만, 그 용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재료까지 달라졌는지도 알아야 했다. 재료도 같이 달라졌다면 그걸 찾는 일은 전적으로 미네르바에게 의존해야만 하니까.
“일단은 먼저 카드레이아스의ㅡ”
툭, 세레스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미네르바가 지팡이로 바닥을 건드렸다. 우리가 앉은 책상 위에 무언가 잘 다져진 물체가 소환됐다.
우리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일까? 카드레이아스의 생체 조직을 말하려는 것 아니었니?”
“그, 맞긴 한데. 아직 다 말하기도 전인데 어떻게…….”
“일반인이 평생 만지는 포션보다 우리 마탑의 마법사 한 명이 일주일간 만지는 포션이 더 많단다. 그것들을 다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포션의 재료 선별은 마법사들에겐 기본적인 지식이라는 사실을 알아두렴.”
“하, 하지만 이렇게 빨리 구해올 수는ㅡ”
“어지간한 포션의 재료는 모두 마탑에 구비되어 있고, 마탑주인 나는 그걸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지. 그래서 가져와준 것인데, 왜? 불만이라도 있니?”
“…….”
“…….”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탑에 비약의 재료가 구비되어 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맹점이었다. 미네르바가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무척이나 놀랐다는 눈을 하고 있구나, 아이야.”
“놀랄 수밖에 없죠. 설마 미네르바님께서 마탑의 물품을 제공해주실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한시라도 빨리 크리스탈 스크롤을 찾고 싶어서란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걸 다 계산하고 나를 데려 온 것이 아니었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저를 너무 고평가하셔도 곤란합니다.”
상식적으로 내가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예측했겠는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게임에서 나온 것 이외의 지식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인데.
그냥 재료 목록 듣고, 게임과 일치한다면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다 아니까 순간이동으로 왔다갔다 하려 했었다. 다르다면 미네르바의 힘을 빌리고 말이다.
“걱정은 접어두려무나, 아이야. 우리들이 크리스탈 스크롤을 가지고 복귀한다면, 제국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너를 떠받들어 모실 거란다.”
그건 제가 좀 많이 곤란한데요.
‘걱정이 접히는 게 아니라 활짝 펼쳐질 거 같은데.’
미네르바는 이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 보며 예의 그 고풍스럽고 신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가 세레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하렴.”
“어…… 어어…… 그러면…….”
그 뒤로도, 미네르바는 세레스가 비약의 재료를 말하는 족족 그걸 테이블 위로 순간이동시켰다. 나도 세레스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머릿속에 담긴 목록과 대조했다.
‘……전부 다 똑같네.’
6가지 모두가 게임에서 나오던 것과 완벽히 같았다.
이러니 오히려 더 큰 의문이 들었다. 재료까지 게임과 일치한다면, 대체 무슨 약을 만들려는 건가 싶어서였다.
‘일단 게임이랑 똑같은 종류는 절대 아닐 텐데.’
나는 목 뒤에서 찰랑거리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흘끗 곁눈질했다. 지금 만들어지려는 것이 게임이랑 똑같은 약일 리 없다는 증거가 저기에 대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빛을 머금은 성수.”
미네르바는 빛을 머금은 성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역시 마지막 재료까지 동일했다.
그리고 저 빛을 머금은 성수라 불린 아이템이, 세레스의 퀘스트가 브닼 4에서 가장 지랄맞은 퀘스트라는 말을 듣도록 만든 원흉이었다.
“그것만은 나도 줄 수 없겠구나. 마탑에 극소량이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극소량이지. 성국 밖으로는 반출조차 힘든 수준이라 아주 귀한 물건이란다. 그걸 가져오는 건…….”
“아무리 나라도 염치는 있어. 그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설마 멋모르고 내놓으라 할까봐? 그런짓은 절대 안 해. 뭐,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기도 하지만. 다른건 다 구한다 치더라도, 나 같은 놈이 빛을 머금은 성수를 어디서 구하겠어?”
“아, 그건 제가 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이니, 아이야?”
“정말로?!”
미네르바와 세레스가 동시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특히 세레스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놀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들어있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교황의 손님임을 증명하는 이 브로치만 있으면 빛을 머금은 성수 따위는 배럴 단위로 구할 수 있을거다.
여기서도 배럴이라는 단위가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문제는 그걸 여기로 가져오는 방법인데, 미네르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으니 운송 방법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 그러면 이제…….”
세레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자기가 염원하던 비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어대는 모양이었다.
“아, 그 전에 잠시만요. 세레스 씨.”
“왜?”
“그 비약이라는 거, 무슨 용도입니까?”
나는 무척 진지하게 질문했다. 원래는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기려 했는데, 재료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게임이랑 동일한 걸 보니 도저히 대충 넘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레스가 자신의 원본이 되는 게임 속 NPC랑 같은 약이 필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야, 게임에서는 이걸로 발모제를 만들려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아무리 봐도 발모제가 필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찰랑거리는 오렌지색 머릿결이 죄다 가발이라면 또 몰라.
“……그걸 꼭 말해야 돼?”
세레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말하기 싫으시다면야ㅡ”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하아아아…….”
말 안해도 됩니다, 라고 하려 했는데.
세레스는 내가 이걸로 협박이라도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자기 혼자 착각한 걸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고뇌가 잔뜩 담긴 표정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세레스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돌돌 말고선 입을 열었다.
“……풍유환이야.”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묻자, 세레스가 버럭 소리를 쳤다.
“가슴 키우는 약이라고! 됐냐, 씹새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심코, 정말로 무심코 세레스의 얼굴에서 살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안에 무슨 방탄판이라도 끼워넣은 것마냥 평평함 그 자체인. 아니, 안에 방탄판을 끼워놨더라도 저것보다는 굴곡이 있을 듯이 느껴지는, 저게 대체 뭔가 싶을 정도로 납작한 흉부.
벽? 아니었다. 나무로 이루어진 벽이라면 최소한 저것보다는 훨씬 더 굴곡이 있었다. 돌로 이루어진 벽이라도 마찬가지일거고. 그나마 대리석쯤은 돼야 저것과 비벼볼 만 하겠지.
설마, 미네르바한테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던 것도ㅡ
“야…….”
흠칫. 나는 꽉 깨문 이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레스가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야차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보냐?”
“아.”
이건 내 잘못이 맞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