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36)
r 136 – 제안
시선이 너무 노골적으로 내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지금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카이킬리아가 날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구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작부터 한쪽 무릎을 꿇고 옥좌 쪽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중이었다. 우리 모습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 했다.
카이킬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듬뿍 담겨져 있었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에리카의 뒤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옥좌 쪽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라.”
내가 머리를 숙인 지 1초도 채 되지 않아 고개를 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었다. 나더러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명령이었다.
한 명의 사내에게 지독한 관심을 지닌 여인에서, 날카롭고 고압적인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로 돌아온 카이킬리아가 한쪽 턱을 괴고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가 그대들을 왜 불렀는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카이킬리아의 앞에 설 때면 으레 던져지곤 하는 형식적인 질문에, 금빛 황혼 기사단 쪽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저희 역시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우로라도 차분히 답했다. 형식적인 질문이었고, 형식적인 사과였다. 이곳의 그 누구도 저 물음에 올바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당사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옥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붙인 카이킬리아가 손등으로 턱을 괴고선 무심한 얼굴로 아우로라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아우로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요 근래들어 참으로 깜찍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더냐, 아우로라?”
“…….”
아우로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여가 언제 시선을 피하라 하였느냐?”
그러자마자 살벌한 경고가 되돌아왔다. 숙여졌던 머리가 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입으로 직접 털어놓거라.”
“……은빛 여명 기사단을, 복직시키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칭찬하여 주겠다.”
뒤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아우로라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건 내 앞의 기사단장 네 명과,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제일 뒤에 위치한 전 은빛 여명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이어졌다. 카이킬리아가 입을 열지 않는데, 그 누가 감히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장소의 어떤 인간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
중앙 홀에 깔린 침묵의 시간이 길어짐과 비례해, 아우로라의 떨림도 점차 커져갔다.
침묵이란,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었으니까. 특히 방금처럼 황제가 추궁하듯 질문을 던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델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카이킬리아가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재빨리 답했다.
“예, 폐하.”
“너의 생각은 어떠하느냐?”
“……예?”
“내가 은빛 여명 기사단의 직위를 되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저 인간이 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지 의문이었다. 카이킬리아는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묻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잠시 당황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건 은빛 여명 기사단을 되살릴 기회였다. 카이킬리아가 저러는 이유 따윈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다.
“그렇습니다.”
기사단장들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저기서 황제가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처우가 결정될테니까.
카이킬리아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다가, 아우로라에게 눈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너의 수고를 덜어주게 되었으니, 델타에게 감사하거라. 아우로라.”
“…….”
그 말을 들은 아우로라의 어깨가 살며시 늘어졌다. 긴장이 탁 풀려버린 듯 했다. 방금 전까지 혹여라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닌가 전전긍긍하고 있었을거다.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은빛 여명 기사단을 복직시키겠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기사단장들이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렸다. 카이킬리아는 그 감사 인사를 듣는둥 마는둥 넘기며 왼손을 까딱였다.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제일 뒷줄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흰 민소매와 검은색 돌핀팬츠를 입은 여자들이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오와 열을 맞추며 옥좌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머리가 꾸벅 숙여졌다. 이제 다시 은빛 여명 기사단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약간 어수선해지려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황금빛 동공이 다시 나를 향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델타.”
“예, 폐하.”
역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이킬리아의 입에서 나를 부르는 말이 튀어나왔다. 또 뭘 하려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내뱉어진 말은 내 예상을 훨씬 더 넘어서는 것이었다.
“네게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절반을 주겠다. 너는 이제부터 은빛 여명 기사단의 신입 기사가 아니라, 새롭게 창설될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될 것이다.”
“폐하! 그게 무슨!”
황금빛 갑옷이 경악에 차서 비명을 내지르다시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충격이 너무 컸는지 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이 굳어버리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럴만 했다. 자기가 기껏 찢어놓았던 은빛 여명 기사단이 다시 결합된 걸로도 모자라, 역으로 금빛 황혼 기사단이 찢어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카이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뭘 준다고?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절반?
‘……이것도 스토리가 뒤틀린 여파인가?’
이제 와서 원작의 스토리나 이벤트가 그대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건 멍청한 짓이겠지만, 이런 일은 당연히 있지도 않았다. 플레이어가 다른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는거라면 또 몰라.
그리고, 내가 저 자리에 앉아서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초반부 보스들이라면 쟤네도 그럭저럭 상대할 만 하겠지. 하지만 중반부 보스만 되더라도 평범한 기사들은 다 같이 덤벼봤자 일거에 쓸려나가버릴거다.
아무리 닼라 모드로 강화되었다 한들, 보스의 스펙 증가치는 일반 잡몹의 몇 배 혹은 몇십 배 가까이 되니까. 필드몹과 보스 사이의 근본적인 스펙 차이를 해결할 순 없었다.
자기네처럼 평범한 적 정도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겠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기사단장들을 데려가는 편이 훨씬 더 쉽고 간편하다.
‘딱히 달라질 게 없는데.’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정말로 위험한 놈들은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고,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는 방식으로 적당히 레벨링을 한다 치면 기사단장이 되더라도 결국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지금 여의 결정에 언성을 높인 것이냐?”
카이킬리아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황금빛 갑옷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저 따위가 어찌 감히!”
기사단장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을 확인한 카이킬리아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싸늘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황궁에 떠돌고 있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말하여라. 당장.”
그 서슬 퍼런 목소리에, 놈은 잠시 굳었다가 더듬더듬 답했다.
“드래곤의 습격이 있었을 때, 드래곤과 대적하여 격퇴시킨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드래곤을 격퇴시킨 자가…… 저, 신입 기사ㅡ”
“기사단장이다. 네놈이 정녕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느냐?”
“……저, 기사단장이라는, 소문입니다. 폐하.”
나를 신입 기사라고 호칭하려 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정정하는 걸 보아하니, 결정을 물릴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살짝 아찔해졌다.
“그렇다. 저 기사가 드래곤과 홀로 대적하여, 그것을 물러가게 만들었다지.”
길고 가녀린 손가락이 옥좌의 손잡이를 톡톡 건드렸다.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왠지 다음에 나올 말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소문은 진실이니라. 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나같이 경악에 찬 시선들이 날 향했다.
황궁 전체에 퍼져나간 소문이었으니 못 들을 수가 없었을거고, 진위 여부가 헷갈리던 와중에 황제가 직접 진실이라고 쐐기를 박아버린거다. 충분히 나올만 한 반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똑똑히 봤다고?’
포효 듣고 기절해있다가 정신 차렸던 거 아니었나.
카이킬리아가 언제부터 깨어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저 말을 무작정 불신하긴 애매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그놈이 내 기억 읽으려다가 자기 멋대로 이해했다고 지껄이더니 돌아가버린건데, 카이킬리아한테는 그게 내가 드래곤이랑 대치하다가 물리친 걸로 보였던건가.
오해를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풀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하, 하오나. 폐하ㅡ”
정말 어지간히도 충격이 컸던 듯, 저 놈은 말을 더듬거리며 뭔가를 반박하려 하고 있었다.
“네놈 역시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그 절반조차도 남지 않고 갈가리 찢겨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폐하.”
물론 씨알도 안 먹힐 행동이었다. 황금빛 투구가 아래로 푹 숙여졌다. 저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겠지만, 딱히 불쌍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방금 카이킬리아의 말마따나,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에 대한 업보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셈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단원이 절반이나 남았으니 은빛 여명 기사단에 비해 피해가 덜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악덕 영주놈과 함께 제국의 변방으로 쫓겨나지도 않았고.
“가까이 오거라, 델타.”
완전히 좌절해버린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카이킬리아가 나를 불렀다.
나는 얌전히 그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저번의 기억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처음부터 조금 가까운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카이킬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끌어올려졌다.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제안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는 울림이었다. 말만 제안이지 사실상 명령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카이킬리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무엇입니까, 폐하.”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기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카이킬리아가 허리를 숙였다. 제복의 구멍을 통해 윗가슴과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다.
엄지와 검지가 내 턱을 붙잡았다. 얼굴이 위로 살짝 젖혀지고, 마치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리가 좁혀들었다. 입술에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내 직속 기사의 자리를 주마. 너의 기사단을 이끌고, 나의 것이 될 생각은 없느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