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37)
r 137 – 해야 할 일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나 했더만…….’
자기 것이 될 생각이 없냐니.
그래도 이 정도면 카이킬리아 치고는 상당히 무난하게 말한 편이었다. 협박이나 명령이 아니라 제안에 가깝다는 점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예전이었다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설마 스토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뒤틀릴거라곤 생각 못 했었으니 말이다.
성국은 게임 내에서 특유의 꽉 막혔던 분위기와 퀘스트 진행을 위해 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그놈의 배달 퀘스트 때문에 교황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았었다.
지금은 그냥 평범하게 태양이랑 달을 섬기는 종교 국가라는 느낌이고. 이것도 캐릭터의 성별과 외형이 바뀌면서 성격까지 같이 바뀐 여파인가 싶었다.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 한 이후의 일도 생각해봐야 하긴 해.’
브닼 4의 메인 스토리는 각 루트의 최종 보스를 잡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그러고 곧바로 엔딩 스크롤이 올라오는 건 아니다. 이후에 나올 주인공의 행적을 본 다음이 진정한 엔딩이었다.
작게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채로 목가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크게는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혹은 어디 적당한 귀족 작위를 받거나 성국으로 건너가는 수도 있고.
이외에도 퀘스트와 이벤트를 얼마나 진행했냐에 따라 수많은 엔딩이 존재했다.
나는 이곳에 빙의된 몸이니, 수많은 빙의물들이 그래왔듯이 엔딩을 본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못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사실 거처 자체는 별 문제가 안 됐다. 이미 성국에서 교황들과 함께 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상태에, 이대로 평생 아우로라의 영지에서 기사 직위를 유지한다는 선택지도 있다.
어느 쪽을 고르든, 내가 세계를 먹는 자를 처치한 다음에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 따윈 없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곳은 어떻게 되느냐가 더 문제였지. 리제나 교황들을 버려두고 가기에는 양심이 조금 많이 찔렸다.
“무엇을 그리도 골몰히 생각하느냐?”
“……죄송합니다, 폐하.”
어느새 카이킬리아의 얼굴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앵둣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가 부서져 흩어졌고, 살내음이 콧속으로 훅 끼쳐들어왔다.
나는 얌전히 사과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고개라도 숙이고 싶었지만, 카이킬리아가 내 턱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라 그러지도 못했다.
“방금, 여는 너에게 다른 잡것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할 자비를 베풀었느니라. 그만큼 여가 너를 좋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준 듯 하니, 이제 대답을 들어야겠노라. 너의 생각은 어떠하느냐? 여의 것이 되겠느냐?”
카이킬리아답지 않게 그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였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럴 수는 없을 듯 합니다.”
“…….”
호를 그렸던 카이킬리아의 눈꼬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살짝 올라갔던 입꼬리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무뚝뚝한 표정을 되찾은 카이킬리아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설마 내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건지, 아니면 진작 그러리라 예상했음에도 단지 나를 떠보기 위해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인지는 불명이었다.
마치 조각상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카이킬리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럴 수 없다고 하였느냐.”
“예, 폐하.”
“나는 인내심이 그다지 많지 않노라. 그러니, 무슨 연유로 여의 제안을 거절하였는지를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작위가 모자라느냐? 받은 것이 부족하느냐? 금빛 황혼 기사단이 아니라, 은빛 여명 기사단까지 너의 발 밑에 두기를 원하느냐?”
“결코 제가 가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폐하.”
“그렇다면 말하라. 어떤 연유로 여의 제안을 거절하였는지.”
턱이 놓아졌다. 카이킬리아가 허리를 쭉 펴고 다시 옥좌에 등을 기댔다. 오른쪽 팔꿈치가 팔걸이에 수직으로 올려지고, 주먹을 쥔 손이 오른쪽 뺨을 굈다. 황금색 동공이 날 향했다.
구도 탓인지, 저번 알현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슬쩍 카이킬리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자기 다리 사이에 내 머리를 처박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번에야말로 우리 뒤편에 위치한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음부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내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됐겠지.
“폐하께서 주겠노라 말씀하신 것은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게는 너무 과분할 정도입니다.”
흔한 미사여구처럼 그저 형식적으로 붙였을 뿐인 표현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인간 관계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채로 브닼 4만 줄창 파고들었던 놈이 나다. 그런 사람이 냅다 기사단장 자리에 앉혀진다 한들 제대로 이끌 수 있기나 하겠는가.
명령을 듣는 입장이라면 몰라, 명령을 내리는 입장은 나랑 안 맞는다. 굳이 직위를 받아야겠다면 아마 부기사단장 정도가 적당할거다.
“그렇다면 왜 거절한 것이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무어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에,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라도 하려는 듯, 카이킬리아의 눈이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덤덤히 서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건 엄연히 사실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메인 스토리를 그대로 진행하는 건 답이 없으니 포기한다 치더라도, 세계를 먹는 자 만큼은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놈을 내버려두기엔 내가 불안해서 안 된다.
게임에서야 메인 스토리를 아무리 오래 방치해둬도 그놈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지만, 여기서는 정말로 그런 짓거리를 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더욱이, 나한테 한 번 찾아왔던 놈이 두 번을 못 찾아오겠나. 최소한 무적 에센셜이라도 미리미리 제거해둬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도 제법 많았다.
전투 피로의 디버프를 무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룬도 얻어야 하고, 세계를 먹는 자를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잡기 위해 레벨업도 더 해야 하는데 근접캐릭터의 최종 빌드도 아직 덜 맞췄다.
날개 잃은 악몽. 특정한 룬. 인챈트용 흑마법. 그리고 그 흑마법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또다른 룬. 이렇게 네 가지가 닼라 모드 근접 빌드의 핵심이었으니까.
그 4개를 전부 모으기 전까지는 제국 내부를 열심히 돌아다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우로라의 영지에 계속 머무르는 편이 베스트였다.
“무슨 할 일을 말하는 것이더냐?”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염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함입니다.”
“…….”
무표정한 조각상 같던 카이킬리아의 얼굴에, 쩌적 균열이 일었다.
원래 악마를 때려잡을 생각 같은 건 없었긴 하지만, 예전에 카이킬리아에게 덮쳐졌던 일도 있고 하니 경험치도 수급할 겸 해서 겸사겸사 잡아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날개 잃은 악몽에 일식과 월식까지 있으니 악마 계열의 보스는 별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아무리 닼라 모드로 강화되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상성마저 사라진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적당히 틈이 날 때 찾아가서 족치고 돌아오면 되겠지. 제국과 성국에 있는 놈들만 때려잡아도 카이킬리아의 염원을 이루어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지옥 내부의 악마들은 내버려둬도 밖으로 안 나온다.
옥좌에 앉은 채로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카이킬리아가 문득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못 들었긴 한데, 일단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나쁜 쪽은 아닐 듯 했다.
“너의 의중이 그러하다면, 여 또한 강제로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되었으니, 선택하여라.”
“예?”
“너의 기사단에 복속될 인원을 고르라 하였다. 여가 네게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절반을 준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
“…….”
난감한 표정으로 금빛 황혼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카이킬리아가 알아서 골라주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거였나.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델타의 휘하로 복속된 금빛 황혼 기사단의 절반, 은빛 여명 기사단, 아우로라, 금빛 황혼 기사단의 남은 절반이 모두 사라진 중앙 홀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남은 카이킬리아는 옥좌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살짝 위로 젖혀 천장의 샹들리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예전의 자신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카이킬리아 리바누스조차 뛰어넘을 사내라면, 평생의 반려로서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남성이다, 라 하였던가…….”
당시에는 호승심으로 물들어 내뱉었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점점 진실이 되어가려 하고 있었다.
“필시 너 또한 그 사내에게 도움을 얻었을테지,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어제부터 마탑에 콕 틀어박혀선 도통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 중이었다. 그 휘하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저 상태 그대로 두문불출하리라.
마탑은 황궁의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그러니 마탑의 정원이란 곧 황궁의 정원이라는 말도 됐다. 그런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을 카이킬리아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미네르바가 크리스탈 스크롤을 가져왔다는 사실 쯤은 진작부터 알았다. 그리고 표면상의 스크롤 발견자가 미네르바라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카이킬리아는 그것이 되도 않는 거짓말이란 걸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
그 년이 정말로 크리스탈 스크롤의 위치를 알고 있었더라면, 마법사들을 단어 그대로 갈아넣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발버둥쳤을거다.
물론 미네르바는 그러지 않았고, 가능성은 하나였다. 진정으로 그 스크롤을 발견한 사람은 델타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둘이서 짜고 거짓된 증언을 했다는 것.
갈수록 그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하다하다 이제는 고대의 스크롤이 존재하는 위치까지 안다고?
“당장 곁에 두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기다려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카이킬리아의 불꽃이 먼저 꺼질 일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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