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38)
r 138 – 허튼 짓
‘결국 이렇게 됐네.’
오늘부로 내 뒤를 따르게 된 기사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함이 잔뜩 섞인 얼굴이었고, 나 역시 그랬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금빛 황혼 기사단의 편제는 기사단장 1명에 부기사단장 10명, 기사단원 100명이니 그 절반이라면 정확히 55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아이리스나 에리카한테 조언이라도 구해야 할 듯 싶었다. 내가 기사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을 턱이 없으니까 말이다.
“……고마워, 델타. 덕분에 살았어.”
아우로라가 거의 10년은 건너뛴 것처럼 핼쑥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크게 긴장했던 건지, 표정이고 행동이고 힘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영주님이 제게 고마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설마 거기서 은빛 여명 기사단의 복직을 반대했겠는가. 카이킬리아가 그런 질문을 던진 시점에서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 알았어. 더 말 안할게. 그래서, 넌 이제 어떡할 건데? 세워놓은 계획이라도 있어?”
아우로라는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으며 나와 내 뒤의 기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식을 떨진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역시 아우로라는 말이 잘 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생각해놓은 게 없으니 지금부터 고민해봐야죠. 설마 황제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실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거든요.”
“하긴, 금빛 황혼 기사단을 반으로 쪼개서 너한테 준다니,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어? 은빛 여명 기사단 복직 건도 그렇고, 저번부터 계속 놀랄 일 투성이네.”
그 말을 들은 내 시선이 자연스레 아우로라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기사단장 모두가 몇 년만에 다시 모이게 된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넷은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해서 이쪽을 흘끗거렸지만, 아우로라와 나도 대화를 하는 중이었기에 쉽사리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아우로라가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너도 황궁에서 근무할거지?”
“아닌데요?”
“……응?”
씁쓸한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동그란 형태로 변했다.
“제가 황제 폐하께 뭐라고 답했는지 잊으셨습니까? 황궁에 남을 생각이었다면 그런 대답은 안 했을겁니다. 앞으로 황제 폐하 얼굴을 볼 낯이 없을 테니까요.”
“어…… 그러면 계속 내 영지에 남아있을 거란 뜻이야?”
“무슨 악덕 영주도 아니고, 혹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쫓아낼 생각이셨나요? 어차피 성에 공간도 많지 않습니까. 쩨쩨하게 굴지 말고 머무르게 해주시죠.”
내가 간단한 농담을 던지자, 상황 파악을 끝낸 아우로라가 쿡쿡 웃었다.
“그래. 넘치는 게 빈방일 테니까 마음껏 써. 이제 원래 있던 사람도 떠나게 생겼는데, 남은 자리는 채워야지.”
‘아, 맞네. 기사단장들은 황궁으로 돌아가겠구나. 왜 당연히 성에서 같이 생활할 거라고 생각했지?’
어쩐지 아우로라가 물어볼 때 너‘도’ 황궁에서 근무할 거냐더니 그래서였나. 아무래도 추후의 계획을 살짝 수정해야 할 듯 했다.
우리 시선이 자신들을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네 명이 양해를 구하고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우로라가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 빈자리를 기사단장들이 채웠다.
“일단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지. 고마워, 델타. 또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네.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을게.”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라우디아였다. 클라우디아는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영주님께도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감사 인사라면 됐습니다. 제가 설마 거기서 안된다고 대답했을까봐요?”
“잠깐, 아직도 우리한테 존댓말 쓰게?”
“네?”
내 의문 섞인 되물음에, 클라우디아가 피식 웃었다.
“너도 이제 엄연히 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잖아. 우리한테 더 이상 말 높일 필요 없으니까, 그냥 클라우디아라고 불러. 기사단장도 빼고.”
“그러길 원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나는 말꼬리를 슬쩍 흐렸다가, 아이리스와 리제, 에리카를 차례대로 훑어본 다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머지 셋한테는 진작부터 말 놓고 있었는데.”
“뭐?”
이번에는 클라우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제는 은빛 여명 기사단에 가입했던 첫날부터 대뜸 내가 마음에 들었다며 반말을 쓰라 했었고, 에리카도 리제의 강력한 주장 탓에 어영부영 말을 놓게 됐다.
아이리스랑은 왜 말을 놓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실질적으로 내가 존댓말을 하는 대상은 클라우디아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이런 맹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듯,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델타 너 왜 여태껏 나한테만 공손하게 대했냐? 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셋이랑은 진작에 말 놓고 다녔다고?”
“나도 모르지.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와, 이거 혼자서만 거리두기 당한 느낌인데?”
아이리스와 에리카가 연신 투덜대는 클라우디아를 옆으로 밀어냈다. 클라우디아는 입으론 투덜대면서도 군말 없이 밀려났다.
“호의에 감사한다, 델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델타 씨.”
핑크 머리를 옆으로 밀어낸 두 명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리스는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고, 에리카는 조금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 인사는 됐다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저희도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도움을 받은 이상 그냥 덮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에리카의 말이 옳다. 영주님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델타 네 도움이 결정적이었지 않나.”
‘……그런가?’
내가 뜬금없이 지목당했어서 그렇지, 은빛 여명 기사단이 복직될 수 있도록 아우로라가 물밑 작업을 펼치고 있던거였다면 비록 시간은 조금 더 오래 걸리더라도 성공하긴 했을 텐데.
물론 카이킬리아가 트집을 잡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공 확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축하해, 델타. 오늘부터 기사단장이네?”
리제가 내게 다가오자, 아이리스와 에리카는 호닥닥 자리를 비켜주었다. 리제의 얼굴에는 약간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하겠지. 델타 너라면 잘 할거야.”
“어째 나보다 네가 더 확신하는 분위기다?”
“당연하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제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키 차이가 제법 많이 났기에, 얼굴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리제가 뺨을 이리저리 부벼댔다.
나도 리제를 마주 끌어안아주었다. 주변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겨우 그런걸로 애정 표현을 못 해줄 정도라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리제가 까치발을 들었다. 머리가 위쪽으로 낑낑대며 올라왔다. 순간 여기서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입술의 방향이 약간 비스듬한 걸 보니 일단 그건 아니었다.
의도를 알아채고 머리를 숙였다. 내 귓가에 바싹 붙은 앵둣빛 입술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내일부터 당분간은 못 볼 테니까, 오늘 찐하게 떡이나 칠래?”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감동이 싹 날아가는 단어 선택이었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리제를 내려다보았다.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돼?”
리제가 깔깔 웃으며 날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안 쓸쓸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울면서 보내고 싶진 않은걸. 끝까지 나다운 모습으로 있어줘야지.”
가볍게 쥔 주먹이 내 가슴팍을 톡 건드렸다. 리제의 몸이 멀어지자, 물컹물컹한 가슴의 감촉도 사라졌다.
리제답다, 라. 확실히 그렇긴 했다.
아이리스와 에리카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렸고, 클라우디아는 씨익 웃으면서 나를 팔꿈치로 툭툭 치고 떠나갔다.
나름대로 속삭인다고 속삭인 말이었겠지만, 기사단장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모양이다. 이내 은빛 여명 기사단은 모두 황궁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우로라는 나를 미묘한 얼굴로 잠시 쳐다보다가, 다음 진도는 사람 없는 곳에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분위기로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남은 것은 살벌한 기세를 풍겨대는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어쩔 줄을 몰라하는 부기사단장들과 기사단원들, 그리고 나 뿐이었다.
저쪽의 기사단장은 건틀릿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톡, 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은 낌새였다.
분명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내부의 얼굴이 훤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뭘 봐? 할 말이라도 있어?”
“할 말이라면 많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무한한 영광을ㅡ”
“오늘부터 너랑 똑같이 기사단장인 사람한테 놈이 뭐야, 놈이. 나도 너한테 반말 중이니 존댓말 쓰라고는 안 하겠는데, 그래도 예의는 갖추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나는 황금빛 갑옷의 말을 싹뚝 잘라먹었다. 굳이 더 듣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 입 닥쳐라!”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잘못한 게 있던가? 전부 다 황제 폐하께서 지시한 사항이잖아. 아니면 황제 폐하의 결정에 토를 달기라도 하려고?”
“뚫린 입이라고…….”
“그리고 너, 너랑 결탁했던 인간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 못 들었냐?”
멈칫, 놈이 동작을 멈췄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하는 모양새였다. 자신이 아우로라의 아버지였던 것과 엮였었단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일테니까.
나는 그 근처로 다가가서, 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우리 둘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지금부터 할 말은 듣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너랑 짜고 은빛 여명 기사단 찢어놨던 그 놈, 악마랑 연관돼서 죽었어.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처리하셨지.”
놈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법상으로 악마와는 연관되기만 해도 사형인 거 알지? 생각 잘 해. 내가 황제 폐하께 그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넌 끝이니까.”
거짓말이다.
전 영주놈이 악마와 연관되어 죽어버린 건 얘랑 결탁한 지 한참 뒤의 일이고, 따라서 이놈이 악마와 엮일 건덕지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얘는 그걸 모르잖아.’
아마 지금부터 미친 듯이 불안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설마 그놈이 자신과 엮이기 전부터 악마를 숭배하고 있었는지, 혹여나 자신도 그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만약에 정말로 영향을 받았더라면 진작 성검이 반응해서 목을 날려버렸을 테지만, 이 놈이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여태껏 은빛 여명 기사단이 받아온 마음 고생을 되돌려 줄 시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