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41)
r 141 – 복귀
“늦었네.”
나를 미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우로라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착용했던 제복이 아니라 저택에서 입고 돌아다니던 예의 그 신도시 미시룩을 걸쳤고, 드레스의 색깔은 흰색이었다.
속옷은 당연히 입지 않았다. 그 탓에 봉긋 솟아오른 언덕 위로 어렴풋한 핑크빛의 돌기가 비쳐보이는 것만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리스와 에리카, 클라우디아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리제와 시선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리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은빛 여명 기사단 내부에도 우리 둘의 관계가 소문이 쫙 퍼졌는지, 기사단원들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사단장을 보는 눈이 아니라 딸을 보는 아빠의 눈에 가까웠다.
리제 얘는 평소에 대체 무슨 행동을 하고 다녔길래 저런 취급인 건가 싶었다.
이제는 칠흑 성야 기사단 소속이라고 불려야 할 55명 또한, 리제와 내 관계를 눈치챈 듯 시선이 묘했다. 나는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은 당연히 있었겠지. 중요한 건 몇 번이나 있었냐잖아?”
나는 방금 아우로라가 내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잠시 고민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뜻을 깨닫고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본 아우로라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늦은 걸로 화 안났다고 말해주려는 거였으니까 표정 풀어.”
“그런 거라면 평범하게 말하셔도 됐을텐데요.”
“평범하게 괜찮다고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 이 많은 사람들을 여기에 세워둔 값은 받아야지. 안 그래?”
“……그렇게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나름 약속시간보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건만. 조금 더 서둘러야 했었나.
“아니. 나 여기 도착한 지 5분밖에 안됐는데? 쟤들이랑 비슷하게 왔어. 그리고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30분쯤 남았으니까, 얼마나 기다리든 일찍 나온 쪽 책임이지 뭐.”
아우로라가 손가락으로 은빛 여명 기사단과 칠흑 성야 기사단을 가리켰다. 약속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았다면 왜 벌써부터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이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아우로라가 덧붙였다.
“델타 너라면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것보다 더 일찍 나온 거지.”
그걸 예측하네.
“뭐, 잡담은 이쯤 하고. 기사단장들이랑 작별 인사는 끝냈어? 할 말 있으면 더 해도 돼. 어차피 시간 많으니까.”
“어제 다 끝내놔서 딱히 없ㅡ”
“여는 있노라.”
소름끼치도록 싸늘하면서도 고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우로라는 물론이고, 은빛 여명 기사단의 가사단장들과 기사단원들, 칠흑 성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들과 기사단원들, 그리고 나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그렇기에 여가 친히 이곳까지 당도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카이킬리아였으니까.
카이킬리아는 평소대로의 제복을 입은 채로 혼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단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주위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격에서 제일 먼저 회복한 사람은 아우로라였다. 아우로라는 드레스가 흙과 풀로 더럽혀지는 것 따윈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 행동을 보자마자 정신이 돌아온 우리도, 한 발짝 늦게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카이킬리아가 여긴 왜 온거지?’
생각이 복잡했다. 황제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던가? 바로 어제 우리더러 영지로 돌아가도 좋다고 해놓고선?
“아우로라.”
“예. 말씀하십시오, 폐하.”
“고모님이라 불러라. 여는 이곳에 리바누스로서 온 것이 아니라 카이킬리아로서 온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카이킬리아가 아우로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높은 굽이 달린 가죽 부츠가 정원의 잔디를 짓밟으며 거침없이 움직였다.
저 둘이 한 자리에 있는 걸 보니 새삼스레 아우로라와 카이킬리아가 닮은 꼴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원인은 모드를 제작할 때 모델링을 돌려 썼기 때문일 테고.
아우로라가 약간 더 미성숙한 느낌이라는 걸 제외하면,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체형이었다. 어느 하나 닮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잘 가거라.”
“알겠습니다.”
그 짤막한 대화가 끝나자, 카이킬리아는 아우로라에겐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렸다.
‘저게 끝이라고?’
고작 잘 가라는 한 마디를 위해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건가?
내가 속으로 황당해 하고 있는데, 몸을 돌린 카이킬리아가 나를 보며 특유의 오만방자하고 고압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고작 저런 말 때문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 목적은 나였던 모양이다. 아우로라에게 인사를 건넨 건 여기까지 찾아온 김에 겸사겸사 해본 행동일테고.
카이킬리아는 내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다음에야 발을 멈췄다.
“여를 보아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첫 알현 때도 보았던, 손바닥 하나를 감쌀 크기조차 되지 않는 검은색 란제리 속옷이 훤히 드러나는 각도였다. 카이킬리아는 내게 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어쩐지 약간의 흥분마저 느껴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카이킬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식은 들었노라. ‘칠흑 성야 기사단’의 기사단장.”
“……예, 폐하.”
“기사단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너의 황제께 직접 보고하지 않고 아랫것을 시킨 이유가 무엇이더냐?”
“…….”
될 수 있으면 카이킬리아와 단 둘이 만나는 일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제정신으로 그런 대답을 내놓을 순 없었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시선을 피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다리 사이로 눈길이 갔다. 재질이 무척이나 얇은 탓에 그 너머의 윤곽이 고스란히 비쳐보이는 검은색 란제리가 점차 더 많은 습기를 머금어가고 있었다.
그와 비례해 카이킬리아의 뺨에 떠오른 오싹한 미소와 홍조 또한 더욱 짙어졌다. 약간의 희열마저 깃들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어렴풋이 복숭아 향기마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카이킬리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허벅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면, 좋다. 이번만은 여가 자비를 베풀어주겠노라.”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그냥 넘어가주려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여를 절대로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좋다. 너의 그 충정,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영원토록 지니고 있거라.”
이대로 대화가 끝날 듯 하자, 나는 속으로 안심했다.
하지만 내가 안심하기도 잠시, 허리를 살짝 숙인 카이킬리아가 내 턱을 붙잡고 위로 끌어당겼다. 나는 상반신을 쭉 펴며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카이킬리아는 내 얼굴을 위로 바싹 끌어당겨 눈높이를 맞추고, 허리를 살짝 숙여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미네르바는 왼쪽이더니 카이킬리아는 오른쪽이었다.
“그 이름, 마음에 들었다. 안목이 제법 뛰어나지 않느냐.”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었다. 손을 놓은 카이킬리아는 특유의 오만방자한 웃음을 띄우고, 약간의 복숭아향만을 남긴 채 몸을 돌려 황궁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드디어 진짜 끝이었다. 게임에서 황제가 직접 정해주었던 이름이니만큼, 카이킬리아의 마음에도 쏙 들었던 듯 했다.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제복을 입은 뒷모습이 황궁 정문 너머로 사라지자, 우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방문 직전에 느껴지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느샌가 싹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우리는 어영부영 인사를 끝낸 채 순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하기 위해 한 군데로 뭉쳤고, 아이리스를 필두로 한 기사단장들과 단원들은 어색하게 우릴 배웅했다.
나는 순간이동 스크롤을 손에 쥐고, 마나를 끌어올려 아우로라와 기사단을 감싼 원을 그린 다음 스크롤을 찢었다. 푸른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부유감이 몸을 뒤덮었다.
이제 정말로 네 명과 잠시 떨어질 시간이었다. 설마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항상 그랬듯, 부유감은 곧 잦아들었다. 눈을 떴다. 우리들은 어느새 영주 저택의 정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우로라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우로라 님.”
푸른 빛기둥을 봤는지,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리고 라나를 비롯한 메이드 전원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우로라 앞에 질서정연하게 선 메이드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특이 사항은?”
“없었…… 아,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 말해봐.”
“보라색과 초록색이 반씩 섞인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분께서 영주님을 찾으셨습니다.”
모르는 머리색이었다.
어차피 외형이 죄다 갈아엎어진 탓에 머리카락이 아니라 얼굴을 봐도 얘가 원본 게임에서 누구인지를 맞추기조차 불가능한 마당이니, 알았어도 별 쓸모는 없었겠지만.
“보라색이랑 초록색을 반씩 섞어놓은 머리카락이라니, 처음 듣는데.”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르기는 아우로라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는 안 밝혔고?”
“예.”
“뭐라고 대답했어?”
“영주님께서는 부재중이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직도 안 돌아온거냐고 중얼거리다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떠났습니다. 다만, 대화의 상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정체를 모르니까 확실히 그 정도가 최선이었겠네. 수고했어, 라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짤막한 대화를 끝내고, 아우로라는 우리더러 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성이 좀 정리되면 밤 늦게라도 좋으니 나 혼자 저택으로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나는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더 이상 은빛 여명 기사단의 것이 아니게 된 성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이끄는 입장이 되니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이제 마법이 벗겨져 평범한 건물이 된 성으로 들어가자, 기사들은 성의 규모를 보고 살짝 놀라더니 이 커다란 장소를 고작 5명이서 썼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마굿간과 연무장, 지하 식당 같은 시설을 대충 설명해주고, 방을 하나씩 골라잡으라고 한 뒤 내 방을 성의 최상층으로 옮겼다. 원래는 다른 기사단장들이 쓰던 층이었다.
기사단장이랑 같은 층을 쓰는 건 아마 쟤들이 안 괜찮아 할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지하 식당에서 싸늘히 식어가던 고기 스프와 빵을 정리하고, 아우로라에게 요청할 보급품 목록을 끄적이면서 부기사단장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라크시아, 기사단장으로서 내리는 첫 명령이다.”
“네. 말씀하십시오.”
“정복은 어떻게 하고 싶나?”
그리고, 내가 기사단장으로서 내린 첫 명령은 정복 고르기였다.
내가 입을 거 말고, 얘들이 입을 거.
부기사단장들은 처음엔 아무거나 괜찮다며 내게 일임하려는 듯 하다가, 등을 떠밀자 단원들과 상의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도 솔직히 골라주고 싶었다. 저 인간들한테 맡기면 또 어떤 기상천외하게 음란한 천쪼가리를 정복이랍시고 들고 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사례들을 고려해봤을 때, 내가 고른 옷이 저 기사들한테는 불편한 의복이 될 수도 있었다. 내 감각과 이 세계 사람들의 감각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불편한 옷과 신발만큼 행동을 제약하는 것도 없다. 특히 정복 위에 갑옷까지 걸치고 무기를 휘둘러야 되는 기사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제발 정상적인 옷을 골라달라고 속으로 비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기도가 무색하게도.
“…….”
부기사단장들이 정복이랍시고 가져온 옷은 아주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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