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42)
r 142 – 바니걸
유두와 밑가슴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뿐 나머지는 거의 드러내다시피 하는 상의와, 하이레그에 가까운 각도로 파인 하의.
무슨 진공포장이라도 한 듯이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선 배꼽의 굴곡마저 보여줄만큼 조여드는 겉옷. 까치발을 선 것과 다를 바 없는 높이의 굽이 달린 하이힐.
정수리 부근에 삐죽 솟아있는 토끼 귀 머리띠.
“…….”
부기사단장들이 정복이랍시고 가져온 옷은 바니걸이었다.
그것도 노출도가 상당히 높은.
정복의 착용자로 낙점된 기사는 굉장히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으나, 부끄럼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흰 민소매와 돌핀팬츠, 스포츠브라와 레깅스 조합이 그랬듯이 말이다.
저 입장에서는 그저 기사단의 정복이 될지도 모를 옷을 입은 것 뿐일테니 당연했다.
“충분한 논의 끝에, 실용성을 중심으로 멋을 가미하여 디자인했습니다.”
‘실용성?’
터져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실용성을 중심으로 디자인했다고?
하긴, 바니걸 복장을 입은 절세 미인이 금방이라도 유두가 삐져나올 것 같은 사이즈의 가슴을 출렁출렁 흔들어대며 싸운다면 남자 상대로는 실용적이긴 할 것이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약점을 쉽사리 노출할테니까.
‘아, 이 세계 남자들은 아니려나.’
알몸 와이셔츠, 혹은 크롭티에 핫팬츠마저 평범한 의복으로 인식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여자가 야한 옷을 입었다며 눈이 돌아가는 남자는 한 번도 못 봤다.
그나마 성국에서 저걸 옷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던 천쪼가리들을 본 경험이 있었기에 헛웃음 정도로 끝난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표정 관리부터 실패했다.
마음 같아서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얘들도 처음에는 선택권을 모두 내게 일임하려 했지 않은가.
꾸역꾸역 명령까지 해가며 정복을 직접 디자인 하라길래, 기사단 전원에게 의견을 구해 샘플까지 만들어서 입혀 왔더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반려시키고 다시 해오라며 쫓아보낸다?
내가 저 입장이었어도 욕했다. 나한테야 저 바니걸 복장이 황당하겠지만, 이곳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정복일테니까.
‘그렇다고 남자들이 입는 제복을 줄 수도 없고.’
이 세계는 남자용 의복과 여자용 의복이 아주 엄격하게 구분된 세계였다. 남자가 여자용 의복을 입는다거나, 반대로 여자가 남자용 의복을 입는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남성용 의복이 모두 ‘정상적’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모더들이 남성용 의복은 거의 안 건드려놨거든. 사실 이런 모드의 주 소비층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나마 제복류의 디자인은 나름 멋지게 변해 있긴 했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였다.
이런 속사정이 칠흑 성야 기사단에게 내 기준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옷들을 정복이랍시고 입힐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명령을 내린다면 따르기야 하겠다만, 괜히 나 때문에 손가락질 받게 하기는 싫었다.
남성용 의복은 여자가 입기 애매하고 여성용 의복은 죄다 저런 꼴이니 차선책을 선택한 건데…… 결과는 보다시피였다. 나는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일단 알았다. 그리고, 이 종이는 뭐지? 따로 요청할 거라도 있나?”
“단장님도 저희들의 편제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기사단장 밑에 바로 일반 단원들이 있는 은빛 여명 기사단과는 달리, 금빛 황혼 기사단은 쪽수가 훨씬 더 많으니 기사단장 밑에 부기사단장을 둬서 계급을 한번 더 나눴다.
나도 이 부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은 바꾸지 않기로 했다.
괜히 없애봐야 바뀐 편제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더러, 나 없을 때도 기사단이 멀쩡히 돌아가려면 명령권자가 있어야 하니까.
“편제의 구분을 위한 바리에이션입니다.”
바리에이션이라는 단어에 귀를 의심하기도 잠시, 나는 책상 위에 엎어진 종이를 펼쳐들자마자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종이에 그려진 건 여섯 가지의 바니걸 그림이었다.
평범하게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색 스타킹의 바니걸.
골반까지 완전히 덮는 검은색 스타킹의 바니걸.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색 망사 스타킹의 바니걸.
골반까지 완전히 덮는 검은색 망사 스타킹의 바니걸.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맨다리의 바니걸.
마지막으로.
‘……역바니?’
내가 여기 빙의되기 전에도 인터넷에서 잠깐 유행했던 역바니 그림까지. 하반신에는 그나마 속옷으로 보이는 걸 입었지만, 유두는 별 모양의 스티커로 가린 역바니였다.
“……이건 뭐야?”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역바니를 가리키자, 라크시아가 가슴을 쭉 펴며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저희 부기사단장만을 위한 특별 정복입니다. 부기사단장은 일반 단원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여기서 쓸데없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간 복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거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복장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맞긴 하지만.
억지로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려다, 바니걸 복장을 입은 채로 바짝 긴장해 있는 기사단원에게 눈길이 갔다. 옳다구나 하고 주제를 바꿨다.
“저건 언제 만들었지? 옷을 만들 정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은 것 같던데. 미리 준비해둔 건가?”
“겉모습만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입니다. 손재주가 좋은 녀석이 몇 명 있어서요.”
‘정복을 만드는 게 손재주가 좋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었나?’
바니걸 기사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겉모습만 흉내냈다는 게 겸양의 말은 아니었던 듯, 만듦새가 은근 엉성했다.
가슴 부분은 바느질 자국이 티가 확 나는데다 사이즈가 안 맞아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위태로웠고, 복부 근처의 천은 팽팽히 당겨져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다리 사이의 하이레그도 정중앙에 위치한 게 아니라 왼쪽으로 살짝 엇나가 있었다. 그 밑으로는 도톰한ㅡ
“히끅.”
들려오는 딸꾹질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속으로 아차 싶었다. 너무 오래 쳐다봤다.
슬쩍 눈치를 살폈다. 바니걸 기사는 애써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중인지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이리저리 꼬아댔다. 의외로 부기사단장들도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아, 미안. 너무 쳐다봤나?”
“아니요오오…… 괜찮, 습니다.”
괜찮다는 말과는 별개로 얼굴은 점점 더 시뻘개지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간 픽 쓰러질 것 같았기에 일단 알았다며 먼저 돌려보냈다.
바니걸 기사는 이곳의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엉덩이를 강조하는 특유의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역시 바니걸이라는건지 꼬리뼈 부근에 달린 토끼 꼬리는 덤이었다.
“이대로 가고, 만약 수정할 게 있으면 너희들끼리 수정해. 예산은 최종안 확정지으면 나한테 와서 청구하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바니걸 바리에이션들이 그려진 종이를 도로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든 라크시아는 그걸 품 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아까부터 내 말투가 점점 더 평소처럼 돌아간다는 건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눈치를 채긴 했지만, 분위기를 깨면서까지 지적할 사항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위엄있는 말투라는 게 유지하기가 진짜 더럽게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려 했다간 말은 말대로 꼬이고 위엄은 위엄대로 박살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편히 쉬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부기사단장들이 사라진 뒤, 나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앞으로는 성에 있는 내내 바니걸이랑 역바니를 봐야 한다 이건가.
차라리 흰 민소매와 돌핀팬츠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성에는 식량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 여기는 영주놈이 은빛 여명 기사단더러 먹고 저주나 걸리라며 준비해둔 고기 스프와 빵만이 식량의 전부였던 장소니까 말이다. 식량을 비축할만한 장소도 크게 마땅치 않았고.
부기사단장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주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이 문제를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받아라.”
더 많은 돈이었다.
내가 이단심판관과 엮여서 성국으로 향하게 됐을 때 아우로라가 여비로 쓰라며 줬던 돈은, 당시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성의 물품 보관용 창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성국에 가서는 돈을 쓸 일 자체가 없었던데다, 영지로 돌아온 이후에도 황제를 알현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 몫으로 조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싹 다 나눠줬다. 금화를 전달받는 기사단원들의 눈빛은 엄청나게 반짝거렸고, 부기사단장들 역시 꿀꺽 침을 삼켰다.
평생토록 충성하겠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장난을 걸어오는 단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했다. 살짝 경직됐던 분위기가 단번에 풀어졌으니 말이다.
‘뭐, 나야 굳이 돈 벌려고 아등바등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만.’
당장 미네르바한테 고대의 스크롤을 팔겠다고만 해도 금화에 깔려 죽을 수준으로 돈이 들어올테고, 기둥서방 같은 발언이긴 하지만 교황에게 손을 벌릴 수도 있다.
그리고 아우로라까지 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 했으니, 돈 문제로 고민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계십니까, 영주님?”
단원들에게 돈을 쥐어줘서 도시로 보낸 다음, 새롭게 취임한 기사단이니 놀라지 말라며 경비대에게 미리 언질을 준 나는 곧장 아우로라의 저택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라나를 비롯한 저택의 메이드들은 내가 여기를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깍듯이 인사를 해올 뿐이었다.
“열려있으니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처럼 창문 앞에 놓인 커다란 책상과 그 사이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아우로라가 보였다.
나를 흘끗 쳐다본 아우로라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벌써 정리가 끝났어?”
“성에 남아있는 게 있어야죠. 정리할 것도 없던데요?”
“하긴, 그 마법 때문에 텅텅 비었긴 했겠네. 없는 걸 찾는게 아니라 있는 걸 고르는게 더 빨랐지?”
나는 필요한 보급품의 목록이 적힌 종이뭉치를 건넸다. 아우로라는 그걸 눈대중으로 대충 훑어보고선 책상 한 켠에 고이 모셔놓았다.
“식량 문제는 이틀 내로 해결해 줄 수 있긴 한데, 그동안은 어쩔거야? 돈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줄테니까.”
아우로라는 성에 걸린 마법이 풀렸다는 전제 하에 말하고 있었다. 정작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아마 보급품 목록에 식량이 끼어있는 걸 보고 추측한거겠지.
게임에서도 유능하기로 소문났던 NPC답게, 굉장히 날카로운 통찰력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넉넉하게 쥐어줬으니까요.”
“넉넉하게 쥐어줘? 너희한테 돈 나올 곳이 어디 있다고…… 아, 내가 저번에 성국 갈 때 줬던 거?”
“네. 쓸 곳이 없었으니까요. 거의 그대로 남아있던데요?”
“좋아. 알뜰살뜰하게 사용중이네. 그래. 쓰라고 준 돈은 써야지. 그거까지 얌전히 모시고 있으면 준 사람이 뭐가 되겠어?”
아우로라는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 채로 으으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매끈한 겨드랑이가 드러나고, 가슴이 한껏 강조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기지개를 끝낸 아우로라가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벌떡 상반신을 일으켜세웠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그래서, 델타 넌 이제부터 뭐 할거야?”
날 향한 황금색의 눈동자는, 마치 카이킬리아처럼 찬란한 금빛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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