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45)
r 145 – 계책 – 3
“안 합니다.”
“어, 어? 왜?”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여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붕대로 감싸인 가슴은 그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중심을 유지해주었다.
내가 저 부탁을 거절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저거, 배달 퀘스트거든. 게임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지겹도록 해본 거라서 아주 잘 안다.
여기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하는데, 보상이라고 해봤자 대장간 1회 무료 이용이 끝이니 귀찮음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압도적으로 적었다.
게임에서야 무기 강화에 각잡고 돈을 사용하기 힘든 초반이나, 대량의 돈이 소모되는 속성 부여를 할 때 굉장히 유용하겠지만, 지금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일단 해두면 유용하기야 하겠다만, 굳이? 하는 느낌이지.’
물론 빛을 머금은 성수처럼 조건이 지랄맞은 배달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퀘스트처럼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고 빠른 이동이든 뭐든 사용해서 돌아오면 끝이다.
조각상을 사용하지 못하니 귀찮아서 건너뛸 뿐.
“그리고, 저 오늘 처음 보신 거 아닙니까?”
“일단은 그렇지?”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런 거래를 제안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게임에서는 저 퀘스트를 받으려면 대장간의 총 이용 횟수가 5회를 넘어가야 했는데, 여기 오늘 처음 방문한 나한테 뭘 믿고 부탁을 하려는건지 의문이었다.
“응?”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여기 있는 그…… 뭐더라. 아무튼 여기 기사단장 아니야?”
“맞습니다.”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뭘 떼먹을 리가 없잖아? 뭐, 가끔씩 자기 실력이나 뒷배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놈들이 있긴 하다던데, 네가 그런 성격이었다면 소문도 안 퍼졌겠지.”
바로 납득했다. 하긴, 지금의 나는 평범한 신입 기사가 아니라 이곳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니 신원 보증은 확실할 것이다. 오늘 처음 봤더라도ㅡ
‘잠깐.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소문이 퍼져?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제 너희 애들이 돈 쓰러 나왔었잖아. 그때 들었지. 황궁에서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오신 기사단장님이라고. 하나같이 칭찬만 해대길래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럴만 하긴 하네.”
“…….”
왠지 여기 올 때 사람들 시선이 심상치가 않더라니, 그래서였나.
“어떤 종류의 소문인지도 알려줄 수 있으십니까?”
“뭐 이것저것 많긴 하지만…… 제일 대표적인 게 드래곤 잡았다는 거?”
“…….”
그놈의 드래곤 잡았다는 내용은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나중에 진짜로 하나 잡든가 해야지.
어차피 세계를 먹는 자와 만났을 때, 일방적으로 사념이 때려박히는 게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어느정도 성립시키려면 드래곤 한 마리 쯤은 필수적으로 처치해야 한다.
토벌 증거를 챙겨야 하니 겸사겸사 꼬리도 좀 자르고.
“알겠습니다. 대답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역시 부탁을 들어드리기는 어렵겠네요.”
나는 의뢰를 거절하고 금화 주머니를 끌러 여자가 부른 값만큼의 돈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돈을 챙긴 여자는 날개 잃은 악몽을 들고선 안쪽의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낙담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쉽게 됐네, 하는 정도였다.
게임에서는 UI 창에서 무기를 선택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즉시 강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는데, 여기서는 직접 무기를 건드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브닼 4에 강화 실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앉아서 기다리자, 오로라.”
“아, 네.”
나는 가게 옆에 늘어선 의자에 앉았다. 오로라도 쪼르르 따라와 내 옆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앉으며 상반신과 하반신이 수직으로 굽혀진 탓에, 오로라가 입은 와이셔츠의 끝자락이 상체 쪽으로 조금 말려올라가며 가뜩이나 아슬아슬하던 치골 부분을 훤히 노출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그 사이의 비부가 드러날 분위기였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렸다.
오로라는 아까부터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탓에 제법 더운 모양이었다.
“더우면 잠깐 벗고 계시죠, 영주님? 모르는 척은 해드리겠습니다.”
오로라는, 아니, 아우로라는 잠시 멈칫거렸다가 사양은 않겠다는 듯 모자와 마스크를 풀어헤쳤다. 그 뻔뻔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쪄 죽는 줄 알았어.”
“대체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랍니까?”
“왜? 재밌잖아, 이런 거. 예전부터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거든. 정체 숨기고 영지 돌아다니는 거 말이야. 지금까지는 기회가 안 돼서 못해봤지만.”
정체불명의 여자인 오로라에서 뻔뻔한 영주 아우로라로 돌아온 여인이, 한 손으로는 모자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스크의 끈을 검지에 끼워 빙빙 돌리며 말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재미있진 않던데요. 우리 애들 어처구니 없어 하던거 못 보셨어요?”
“돈 주는 사람이 나인데 뭐 어때? 가끔 이런 장난도 칠 수 있는거지. 싫었으면 말해. 다음 봉급은 두 배로 줄게.”
“뻔뻔하기 짝이 없으시네요, 영주님.”
“내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아우로라는, 갑자기 흠칫 하더니 급히 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 썼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저 멀리서 날개 잃은 악몽을 든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여자는 손에 들린 무기를 쿵, 하고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빙그르, 손잡이 부분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회전했다. 끝난 건가 싶어 카운터로 다가갔다.
“다 된겁니까?”
“맞아. 워낙에 좋은 무기라서 내가 딱히 손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 몇 번 건드리니까 다 끝나있더라. 그런데…….”
가늘게 떠진 그 눈이 아우로라와 나를 차례대로 훑었다.
“옆은 애인이야?”
“아닙니다.”
나는 칼같이 부정했다. 여기서 괜히 대답을 어물쩡거렸다간 그 즉시 새로운 소문이 덧칠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 여자, 척 보기에도 입이 가벼워 보였다.
아우로라가 옆에서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겨댔다. 마스크에 가려서 눈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황금빛 동공이 샐쭉하게 변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칼 휘두르는 직업 가진 여자는 아니어 보이는데. 그런 사람을 데리고 이런 곳에는 왜 왔어? 있던 애정도 떨어지겠다.”
“원래는 저 혼자 오려고 했었습니다.”
“아, 그러면 여자 쪽에서 반한거야? 하긴, 얼굴 보니까 그럴만 하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영주인 줄 모르는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긴 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만약 정착 과정에서 아우로라와 만난 적이 없었다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영주를 안 만나고 여기 정착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말이다. 내가 중세 시대의 이사 과정을 알 리가 있나.
“또 와!”
나는 여자의 배웅을 들으며 대장간을 나섰다. 강화 비용을 제대로 치르고 나니 여자도 더 이상 배달 퀘스트와 관련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호기심에 기반된, 지극히 사적인 의뢰였다. 그 광물이 없으면 당장에 빚을 못 갚아서 대장간이 망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가져와달라는 거다.
따로 급박한 사정이 있다거나 했으면 고려를 해봤을 테지만, 그것조차 아니니 구태여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혹시 근처로 지나갈 일 생기면 잠깐 들러서 챙기든가 하지 뭐.’
“이제 어디 갈거야?”
옆에 있던 아우로라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장간 안에서 보여주던 샐쭉한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기대감으로 가득 들어찬 눈빛이었다.
이제 오로라 컨셉은 포기한 건지 아주 그냥 대놓고 반말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지적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런 일 자체가 상정 외였던지라 딱히 돌아다닐 장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데 돌려보내기도 조금 그랬다. 슬슬 아우로라가 내게 지닌 감정에 대해서도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여러 가지로 골머리가 아팠다.
“일단 옷가게부터 갈까요?”
“옷가게?”
“네.”
옷을 파는 곳이라면 혹시 정상적인 의복이 한두개 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단추를 한껏 풀어헤친 노팬티 와이셔츠라니.
이쯤 되니 흰 민소매와 돌핀팬츠 조합이 선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속옷을 안 입긴 했어도, 최소한 음부를 드러내는 옷은 아니니까 말이다.
“델타 네가 사주는 거야?”
“물론이죠. 어차피 제 돈도 아니잖아요.”
“뻔뻔하기 짝이 없으시네요, 기사단장님.”
일부러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아우로라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톡 건드렸다. 말은 그렇다지만 절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라크시아는 난감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초록색과 보라색이 반씩 섞인 머리카락과, 가뜩이나 짧은데 커다란 구멍이 두 개나 뚫려선 골반을 그대로 내놓다시피 한 하의, 만들 때 천이 모자랐나 싶은 느낌의 와이셔츠 상의.
‘옷차림은 별로 특이할 게 없는데?’
대체적으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옷차림부터 이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입은 옷은 멀쩡했다. 옷차림만 떼어놓고 보면 완벽한 정상인이었다.
“닉스, 닉스요. 헤헤…….”
자신을 닉스라고 소개한 여자가 터무니 없이 커다란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라크시아의 의구심이 더욱 커져갔다. 아직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질문했다.
“음, 그러니까, 그쪽이 저희 단장님이랑 아는 관계다 이 말씀이시죠?”
“히, 히히. 맞아요. 아는 사이예요.”
닉스는 또다시 괴상하게 웃으며, 저러다 목이 부러지지는 않을까 싶을만큼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가슴도 그에 못지 않은 격렬한 속도로 흔들렸다.
곤란했다. 아주 곤란했다. 자신도 아직 델타 밑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저 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할 방법이 없었다.
기사단장의 인간 관계를,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라크시아가 어떻게 알겠는가? 당장 델타와 이곳의 영주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알아차린 참인데 말이다.
그렇다 해서 기사단장의 지인이라는 사람을 무작정 내쫓기도 힘들었다. 만에 하나 저 말이 진실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었으므로.
“으음…….”
라크시아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닉스는 마치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려대고 히히거리는 이상한 웃음 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크시아의 마음 속에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옷차림은 정상인데, 행동이 비정상이었다.
“알겠습니다.”
“데려와 주는 거에요……?”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사항입니다만, 단장님께서는 현재 외출중이십니다. 그러니 성에서 기다리시겠다면 방을 하나 내어드리겠습니다. 대신, 감시가 붙기는 할 겁니다만.”
사람을 보내 모셔오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라크시아로서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보고는 나중에 돌아왔을 때 해도 늦지 않을거다.
어쩌면 오늘은 안 돌아올 수도 있긴 한데.
“외출…… 외출…… 네. 알겠어요.”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여자는 흐느적거리며 일어섰다. 지끈거리를 이마를 감싸쥐던 라크시아의 귀에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떡해? 찾으러 가?”
“히, 히히히…… 너 바보야? 그럼 여기까지 와서 또 돌아가게?”
“어제 왔는데 오늘 또 온 것부터가 잘못이잖아!”
“또 오자는 말에 입 다물고 찬성한 건 잘못 아니고?”
방을 나가는 닉스의 목소리였다. 라크시아는 점차 멀어지는 그 짜리몽땅한 뒷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이상한 사람 맞네.’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