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48)
r 148 – 약속
“다시 뵙습니다, 델타 기사단장님.”
라나는 예상치 못한 등장을 보고 제자리에 멍청히 굳어버린 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평소처럼 무척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동작이었다.
몸 곳곳에 풀잎이 묻어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일단 라나가 이렇게 태평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저택에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는 불안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알쏭달쏭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정문을 지켜야 할 기사들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있고,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라나는 풀숲 안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영주님께서 저러라고 시키셨습니까?”
“내가 미쳤다고 그랬겠어?”
격한 부정이 되돌아왔다. 아우로라가 시켜서 저런 기행을 벌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문이 점점 커져갔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신 듯 합니다, 주인님.”
라나는 이런 우리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일이 좀 있었거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당사자가 저리도 태연한 표정이니 그래도 대답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우로라는 영 찝찝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던 소녀는, 어느새 도시의 영주로 돌아와 있었다.
“저택은 어때? 별 일 없었어?”
“예. 저희는 괜찮았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무슨 일이셨습니까?”
“그…….”
입술을 달싹이던 아우로라가 덜컥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입을 다문 상태로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이어가더니, 내 목을 감싸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델타. 나 잠깐만 내려줘.”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응. 이제 괜찮을거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 말대로 아우로라가 내리기 쉽도록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받쳤던 손에 힘을 풀었다. 말랑거리는 허벅지의 감촉이 사라졌다. 손바닥에 서늘한 바람이 몰려들었다.
또각, 하고 하이힐을 신은 발이 대리석을 딛었다. 잠시 휘청거리던 아우로라는 곧 균형을 잡았다. 가녀린 손가락이 몸에 걸친 와이셔츠의 이곳저곳을 툭툭 털었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와이셔츠 끝자락 아래로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살짝씩 보였다. 팬티를 입지 않았기에, 일자로 갈라져 있으면서 앙 다물어진 균열까지 모두.
상당히 야한 모습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아우로라가, 라나 옆으로 다가가선 그 귀에 대고 무언가를 조곤조곤 속삭였다.
라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 주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셨습니까. 알겠습니다.”
설명이 끝났는지, 귓가에 바싹 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라나는 칠흑색의 눈동자로 나를 빤히 응시했고, 아우로라는 그 옆에서 내 눈치를 흘끗흘끗 살펴대는 중이었다.
대체 어떤 설명을 했길래 저런 반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델타 기사단장님.”
아랫배 앞에 두 손을 모은 라나가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우선, 제 주인님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뭐.”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고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예시가 제국의 수백 년 역사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특히, 주인님께서 말씀해주셨듯이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주인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행동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한 행동이 저럴 정도였나 싶기도 했지만, 보상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님께서는 이제 어떡하시렵니까? 곧장 성으로 돌아가실 것입니까?”
라나가 연이어 질문했다.
“그래야지. 아직 일이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니까. 그 여자한테 물어봐야 할 것도 많고.”
“델타 님을 찾아온 것이라 하신 줄로 압니다.”
“맞아. 그런데 정작 내가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이지.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려고.”
닉스의 외형이 흔히 음침 거유 찐따녀라 불리는 캐릭터처럼 변해 있는거야 외형 변경 모드의 영향이라 치더라도, 날 보러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려면 본인한테 직접 묻는 방법 뿐이었다.
사실상 아우로라를 내버려두고 떠나는 꼴이 되는지라 무척 미안했지만, 닉스를 그 상태로 성에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여자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델타 씨.”
아우로라에게 고개를 숙여 이만 물러가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돌아서려는 나를, 라나가 멈춰세웠다.
“오늘 해내지 못한 것은 추후에 이어서 하실 예정이십니까?”
저 말이 뭘 의미하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아마 흐지부지 끝나버린 아우로라와의 외출을 의미할 확률이 높았다. 그거라면 당연히 이어서 해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무조건 그럴 생각이야.”
“예. 알겠습니다, 델타 씨. 제 주인님께서도 분명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실 것입니다.”
내 대답이 흡족했던 듯 아우로라와 라나는 군말 없이 나를 보내주었고, 나는 라나와 아우로라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떠났다.
곧바로 저택을 떠났기에, 델타는 아우로라와 라나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만족스럽게 무감정하다는 모순된 표정을 짓고 있는 라나의 얼굴과, 제 메이드가 말했던 ‘오늘 해내지 못한 것’의 정체를 눈치채고 뺨을 붉히는 아우로라의 얼굴을.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오늘 하지 못했던 것을 이어서 해주겠단 확답을 받으셨군요. 무척 좋으시겠습니다.”
“……이걸 좋아해야 되나? 델타를 속인 셈이잖아?”
“진실을 감추었을 뿐이니 속인 것은 아닙니다. 주인님도 그 차이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우로라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알고야 있다. 하지만, 이런 쪽으로 써먹을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봤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무기? 그게 뭔데?”
“주인님이 델타 님을 좋아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분명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자길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함부로 대할 남자는 거의 없으니까요.”
라나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니 진위 여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데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과 알고 있어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기 마련이었다.
특히 아우로라처럼 남녀 관계에 대한 지식이 사실상 전무해서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라면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잠깐. 그런데 방금 델타한테 말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그 말을 들은 라나가 표정에 조금의 변화조차 주지 않은 채 어머, 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벌려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델타 님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면…… 농담입니다.”
라나는 아우로라의 표정을 확인하고 깔끔하게 한 발짝 물러났다. 아우로라도 저 말이 그냥 해본 소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언제부턴가 당돌함을 넘어 뻔뻔해지기까지 한 자신의 메이드를 추궁하는 대신, 황금빛 동공을 새끼손톱보다 훨씬 더 작아진 델타의 뒷모습으로 돌렸다.
“……간 거 맞지?”
“예. 주인님. 델타 님께서 이대로 돌아가신 것이 아쉬우십니까?”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지. 사건 터지기 전까지 분위기는 나름 좋았거든. 그런데…….”
아우로라가 라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턴다고 털었지만, 메이드복 치마 곳곳에 묻은 얼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옅은 갈색과 초록색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기사들은 사라져 있질 않나, 문은 열려 있질 않나. 너는 또 왜 풀숲에서 튀어나왔고?”
“주인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언뜻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대답에, 아우로라는 어디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겠단 태도로 팔짱을 꼈다.
“만약 주인님께서 처음의 목적을 달성하셔서 델타 님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시게 된다면, 방으로 향하시면서 괜히 저희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셨을겁니다. 반대로 목적을 달성하시지 못한 채로 혼자 돌아오시게 된다면, 머리를 식히실 시간이 필요하셨을 것이고요.”
“둘 중 어느쪽이든 사람은 없는 편이 좋으니 자리를 비워줬다?”
“예. 물론 저택의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기사들은 숙소 내부에서 창문의 커튼 사이로 정원을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다른 것들은 다 그렇다 치자. 라나 너는 왜 풀숲에 있었는데?”
“대답을 해야한다는 명령이십니까?”
명령까지는 아니라고 말해주려던 아우로라는, 라나의 태도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명령이야.”
“그럴듯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진실을 원하십니까?”
“진실.”
비슷한 문답이 한번 더 이어졌다.
제발 더 이상은 묻지 말아달라는 라나 나름의 간절한 부탁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채긴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건 사람을 궁금하게 만든 쪽의 잘못이니까.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역을 맡아야 할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어야 했고, 그 역할을 제가 자처했을 뿐입니다.”
나름 빙빙 돌려서 말하긴 했어도, 요약하면 대놓고 제 주인의 관계를 지켜보려 했다는 뜻이다.
역시, 이번에도 그 주인에 그 메이드였다.
“닉스는?”
“명령하신대로 단장님의 방에 넣어놓았습니다. 감시도 착실히 붙였고요.”
나는 최대한 빨리 성으로 돌아왔다.
이곳으로 도망쳐왔다던 사람들은 마음이 진정되자 집으로 돌아갔는지, 투구를 벗은 기사들만이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사방을 배회하고 있었다.
마녀가 성 안에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한 듯 무기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성으로 복귀한 나를 보자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왔다.
“감시로는 몇 명이나 들어갔어?”
“다섯입니다. 원래는 그 이상을 투입하려 했습니다만, 공간이 협소해서 그 이상은 방해만 될 듯 하더군요.”
“대놓고 감시를 붙였는데 불쾌한 기색은 없었고?”
“제가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단장님께서 명령하신거라면서 군말 없이 따를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은 했었습니다. 가끔씩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걸 제외하면 방에 들어갈 때 까지도 얌전했고요.”
라크시아의 이마에 옅은 협곡이 생겨났다. 떠올린 것 만으로도 불쾌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키히힛, 하고 웃어대던 걸 말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모더들이 성격을 건드리면서 음침한 캐릭터는 저렇게 웃어야지, 라고 설정을 바꾸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알았어. 그리고, 내가 방에 도착하면ㅡ”
까지 말했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닉스가 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모르니, 대화는 단 둘이서만 나눠야 하긴 했다. 정말로 만에 하나지만, 내가 여기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는거고 말이다.
하지만 호위 없이 닉스와 독대를 하기에는 약간 불안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서 그런지, 라크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 들어가면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려 했거든.”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도 잘 몰라. 그래서 방금 고민한거고. 그런데 안 괜찮아도 해야지. 밖으로 새어나가면 큰일 날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라크시아는 내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내게 강압적으로 굴다가 망가진 직검으로 실컷 두들겨 맞으면서 앙앙거리는 신음 소리를 냈던 게 첫 만남인지라 첫인상은 좀 그랬는데, 막상 부관 역할을 시키니 본인의 유능함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중이었다.
뜬금없이 내 휘하가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도 없는 듯 하고. 이건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놈이 워낙에 꼬인 성격이라 내가 상대적으로 선녀처럼 보여서 그런 거겠지만.
“크루아. 열어라. 단장님께서 도착하셨다.”
방 앞에 도착한 라크시아가 노크를 했다. 곧 문이 열리며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단장의 방이라고 단원들의 방보다 훨씬 더 크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중무장 기사들로 인해 내부 공간은 거의 꽉 차다시피 했다.
저래서야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어보일 지경이었다.
“아, 왔어? 헤헤.”
그리고, 감시 대상인 닉스는 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로 번데기처럼 누워 있었다.
“……?”
나는 제자리에 멈춰섰고, 라크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왜 저러고 있나?”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저희가 제지할 틈도 없이 단장님의 침대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했습니다만, 워낙 완고하게 버티는 통에 더 힘을 줬다간 이불이 먼저 찢어질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자기가 저러겠다는데 뭐 어쩌겠어. 내버려둬야지.”
나는 기사들을 다독였다. 여기서 그냥 넘어갔다간 라크시아가 얘들을 가만 안 둘 테니까.
“라크시아. 애들 데리고 나가 있어.”
“예. 단장님.”
라크시아가 기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우리 둘만 남자, 닉스는 특유의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무척 짜리몽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기, 그거 알아?”
닉스가 히죽 웃었다.
“나 지금, 알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