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51)
r 151 – 도움 요청
‘뭐야, 이게?’
차분히 편지의 내용을 되짚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몇 번을 읽어봤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았다.
근처 영지에서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
게임의 메인 스토리가 중반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퀘스트였다.
아라크나이네라를 잡고 얻은 반지는 아직 여전히 내 방 서랍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지가 전달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서브 퀘스트에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이해를 했을거다.
스토리를 밀거나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보다 맵 돌아다니고 지도 밝히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저라면, 가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퀘스트를 달성해서 어리둥절해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라크나이네라를 때려잡고 프라트로이드 가문의 반지를 전달해주는 건 메인 스토리다. 즉, 중간에 스킵을 하거나 그것만 먼저 달성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이것도 세먹자랑 만난 여파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이게 만약 세계를 먹는 자가 스토리를 다 때려부수고 먼저 난입한 여파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면,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게임의 스토리대로 진행하는 건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이긴 한데, 세계를 먹는 자의 등장과 이번 도움 요청 편지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경우였다.
그 도마뱀 놈 같은 경우는 게임에서 아예 없었던 사건이 새로 벌어진거고, 이 편지 같은 경우는 게임에서 메인 스토리로 존재했던 사건이 앞당겨져 일어난거니까.
굳이 따지자면 성국에 들어가자마자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때려잡았던 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반부 필수 보스를 다 잡아서인가?’
일단은 제일 그럴듯한 가능성이었다. 초반부 필수 보스 3마리 중에 거미는 진작 때려잡았고, 골렘이랑 늑대도 이번 기회에 다 잡고 왔으니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게임에서는 이것저것 스토리와 퀘스트가 얽히며 결론적으로 필수 보스가 되는 놈들이지만, 나는 그런거 싹 무시하고 직접 찾아가서 때려잡았으니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라크시아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했다. 내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보고 편지의 내용을 제멋대로 추측한 모양이었다.
내용 자체가 심각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심각해져야 하는 건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나 한정이었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십니까?”
나는 얌전히 편지를 넘겨주었다. 편지를 받아든 라크시아는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더니,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심각한 내용은 없어 보입니다. 도움 요청이건, 그 보상으로 약속한 것이건. 둘 다 단장님께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단장님께 직접 요청했으니 그만큼 명성이 드높으시다고 볼 수도 있을거고요.”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도시의 영주가 나를 콕 집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자기 영지 근처에 생긴 던전을 토벌해 달라는 게 핵심적인 내용이고, 보상은 해당 던전에서 나온 모든 전리품과 부산물, 그리고 추가적인 금전이었다.
전체적인 윤곽은 게임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지만, 세세한 내용은 전혀 달랐다.
나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드래곤을 쫓아내고, 새롭게 창설된 기사단의 기사단장 자리를 얻고, 방계 황족인 아우로라를 보필하는 기사라는 것들이 나오면 안 됐다.
그것 말고 다른 이름이 나와야 했다. 세계를 먹는 자, 칠흑 성야 기사단, 아우로라의 이름이 아니라. 가문의 반지를 돌려준 이후에 진행될, 메인 스토리 초중반부 보스들의 이름 말이다.
플레이어가 그것들을 모두 토벌하는 게 편지를 받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날 향한 신뢰가 하늘을 찌르는 느낌인데.’
게임에선 최근에 이름이 드높아진 기사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내가 이번 사건을 무조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내 업적이라고 알려진 소문의 수준 자체가 달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도 알아. 수락하기는 해야지. 라크시아 네 생각처럼 거절하고 그러지는 않을거야.”
“……?”
라크시아의 얼굴에 드러난 의문이 더 커졌다. 결국 의뢰를 받아들일거라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인원은 몇 명이나 데려가시겠습니까? 준비하시는 동안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갈 건데?”
“예?”
“그래서, 또 떠나겠다고?”
“…….”
책상에 턱을 괴고, 굉장히 불만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뾰루퉁하게 뺨을 부풀린 아우로라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너 혼자서 그렇게 가버리면, 약속한 다음 외출은?”
“갔다 와서 하면ㅡ”
내가 말을 미처 끝마치기도 전에,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황금빛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얌전히 하려던 말을 멈췄다.
칠흑 성야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헬가를 비롯한 나머지 단원들의 시선도 뒤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아우로라와는 달리 흥미진진한 기색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아우로라의 옆에서 아랫배에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로 서 있는 라나 역시,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우리 둘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게 눈빛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라크시아가 혼자서 가는 건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반대하길래, 부기사단장 1명으로 타협 봤다. 그 타협 본 1명이 헬가였고.
알아차린 지 얼마 안 된 사실이지만, 칠흑 성야 기사단은 아우로라와 나 사이의 관계를 아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열심히 변명하긴 했는데,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로라와 내 대화를 저리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저 애들 입장에서는 이게 사랑 싸움으로 보일테니까.
‘진짜 신기한 세계란 말이지.’
그 와중에 내가 리제와 몸까지 섞었다는 걸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나 정도면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여자가 남자 여럿을 두는 건 역겨워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자가 여자 어렷을 두는 건 본인의 능력을 증명한 것이니 칭송받아야 마땅한 업적이라나.
물론 남자가 그에 걸맞은 업적을 이루지 않으면 손가락질 받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하는데, 이미 그 전 단계에서부터 생각이 글러먹었다.
“갑자기 왜? 명령이나 협박이 아니라 부탁이니까 그냥 거절해버려도 되잖아. 급한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닌데?”
“근처에 던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룬 던전인 것 같다더군요.”
“룬 던전이면 자기 혼자서 꿀꺽하면 되지, 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하는건데? 언제부터 마음씨가 그렇게 고왔다고?”
“이미 그러려고 기사를 들여보냈다가 벌써 열 명도 넘게 실종됐으니, 더 이상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진 거겠죠.”
괜히 그 안에 있는 보상과 토벌 전리품을 싹 넘기는 걸로도 모자라, 원한다면 추가로 보상까지 할 테니 제발 그걸 없애만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다 저런 속사정이 있었다.
혼자서 먹고 입 씻으려 했다가 역으로 입이 찢어졌거든.
게다가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지만, 룬 던전을 발견하면 우선적으로 황궁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안 그러고 혼자서 먹으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뒷감당은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러니 저런 막대한 보상으로 도움 요청 겸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다. 룬이 아무리 귀중하다고 해봐야 자기 목숨이랑 가문만 하겠는가.
게임에서처럼 막 이름값이 높아지는 중인 신입 기사한테라면 몰라도, 황제에게 직접 기사단을 하사받은 나한테 뭘 믿고 황제 몰래 룬을 먹자고 요청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그대로 황제 찾아가서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보상은 뭐래?”
“룬을 포함해 던전에서 나오는 것들은 다 가져도 되고, 원한다면 추가로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우로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룬을 가지라는 말까지 나왔다면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였다. 아우로라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
아우로라는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러다가, 결심을 내린 듯 턱을 괸 손을 풀었다.
“나도 갈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도 간다고. 왜, 안 돼?”
왠지 내가 혼자서 떠난다고 했을 때 라크시아의 심정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영주님. 저희가 가는 건 괜찮지만, 영주님까지 가는 건 이상한 의도로 비칠 수ㅡ”
“그건 내가 알아서 할거야. 그리고, 이번이 ‘외출’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아우로라는 막무가내였다. 피는 못 속인다는 건지, 자기 고모인 카이킬리아처럼 고집불통인 면이 있었다.
저 고집을 꺾으려면 명확한 근거가 있는 설득이 필요한데,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럴만한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전투 지역에는 오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지. 나도 내 주제는 잘 알아. 손님으로 대접 받으면서 그쪽 저택에 콕 틀어박혀 있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우리 대화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내 눈앞에는 바니걸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역바니 하나도.
“…….”
머리 위에 쫑긋 솟은, 각자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색깔의 토끼귀. 몸을 바짝 조여들어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정말 가릴 곳만 간신히 가린 의복.
스타킹을 걸치지 않아 허벅지와 종아리를 보란 듯이 드러낸 맨다리. 토끼귀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색깔의 굽 높은 하이힐.
마지막으로, 부기사단장의 유두와 음부에 붙여진 두꺼운 알파벳 X 모양의 스티커.
샘플과 도안을 봤을 때부터 어질어질했는데, 정복이랍시고 단체로 바니걸을 입고 있는 걸 직접 보니까 두 배로 어질어질했다.
나는 애써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헬가.”
“네. 말씀하셔도 돼요.”
귀찮은 듯 귀찮지 않게, 빠릿빠릿한 라크시아보다는 반쯤 늘어진 목소리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 혼자 움직이려면 열성적인 성격보다는 이렇게 딱 자기 할 일만 끝내고 다른 쪽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인 편이 더 좋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영주님 모셔야 하는데, 인원이 얼마나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음…… 글쎄요. 아마 저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확실해?”
“아니에요. 하나 더 데리고 올게요.”
그랬다간 자기한테 부담이 죄다 쏠릴 거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헬가는 냉큼 말을 바꿨다.
헬가의 모습이 엉덩이 위에 앙증맞게 달린 토끼 꼬리를 흔들며 떠나가고, 나머지 단원들도 토끼귀와 가슴을 출렁이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그 뒤를 따라 빠져나갔다.
무슨 카지노에서 딜러라도 하러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ㅡ그러니까, 마차 안에서…….
ㅡ마차 안은…… 들킬 위험이…….
ㅡ흔들리지만 않으면…….
ㅡ소리도…….
그리고, 등 뒤에서는 아우로라와 라나가 무언가를 열심히 속삭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