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56)
r 156 – 생각지도 못한 정체 – 1
“크, 크흠. 정말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칠흑 성야 기사단의 기사단장님.”
스스로를 ‘카산드라’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이곳의 영주는, 방금 전에 벌어졌던 일이 못내 부끄러운 듯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카산드라를 쳐다보는 헬가의 눈빛은 한심함 그 자체였다. 아마 나 역시 비슷한 표정일 것이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말을 애매하게 한 것은 내 잘못이 맞지만, 자기 몸을 원하는 거냐며 성대하게 자폭한 건 저쪽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편지에 내건 조건은ㅡ”
움찔, 내가 편지라는 단어를 언급하자마자 카산드라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황당함이 담기는 걸 보고, 제 발 저린 게 부끄러웠는지 다시 헛기침을 해댔다.
“……모두 사실이십니까?”
“크흠, 큼, 큼. 네, 그렇습니다. 룬 던전에서 나온 전리품과 부산물들의 소유권을 모두 이전하겠으며, 룬 역시 그 전리품과 부산물의 목록에 포함됩니다. 또한 원하신다면 추가적인 사례도 해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룬 던전에 대해서는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러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카산드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해, 해주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쉽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게 황제 폐하를 속이는 행동이란 건 아시고 계시지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내놓은 결론입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룬은 성능이 제법 뛰어난 축에 속했다. 게임 끝까지 쓸 수 있지는 않겠지만, 룬 가진 게 거의 없는 지금 상황이라면 쓰다 갈아끼울 용도로는 차고 넘쳤다.
룬 좀 얻었다고 카이킬리아가 나를 죽이지도 않을 테니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확실하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추가적인 사례나 보상이 필요하십니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
요구 사항을 떠올리느라 내 눈이 살짝 가늘어지자, 카산드라가 다급히 덧붙였다.
“제, 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보상이 필요하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요구할 게 있을지를 생각중이었으니까요.”
내 대답을 들은 카산드라가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길래 저런 생각만 떠올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자기 몸을 노릴 거라고 반쯤 확신하는 분위기에, 저러는 걸 보면 진짜로 몸을 달라고 해도 받아들일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장님.”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부끄러워 하는 카산드라를 내버려두고, 헬가의 손이 내 귀를 끌어당겼다. 귓가에서 조곤조곤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왜?”
“정말로 황제 폐하께 이번 사건에 대해서 보고드리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들켜도 설마 죽기밖에 더 하겠어?”
“…….”
무책임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헬가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졌다.
나로서는 카이킬리아가 우리를 죽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기에 이러는거지만, 헬가는 그런 속사정을 모르니까.
기껏해야 금빛 황혼 기사단을 뚝 잘라서 선사해 줄 정도로 총애를 받는구나 할 뿐이다. 무책임한 대답이라고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 해서 카이킬리아가 내게 왜 그런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지를 설명해줄 수도 없었다. 그걸 설명하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내가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털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난 이미 똑같은 짓 해봤었거든. 한 번 해본 녀석이 두 번을 못하겠어?”
나는 왼손 손등에 새겨진 룬 문신을 보여주었다. 룬 문신을 본 헬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변방으로 쫓겨나고도 몇 년씩이나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던 은빛 여명 기사단조차 내게 룬을 넘겨줄 정도라면, 그 규칙은 유명무실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룬은 국가의 재산이니 발견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으면 뭐 하는가, 충성심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은빛 여명 기사단마저도 공공연히 어길 정도인데.
성국이라면 몰라도 제국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봐야 했다. 게임에서도 플레이어가 룬을 멋대로 빼돌린 사실이 들켰다 해서 처벌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카산드라처럼 벌벌 떨며 걱정하는 모습이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조금 의외네요.”
“뭐라고 생각했길래?”
“황제 폐하께서 저희를 단장님께 하사하시면서 룬도 같이 하사하셨던 줄 알았습니다.”
룬을 준다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가 시키는 서브 퀘스트들을 끝까지 완수하면 충성의 증거랍시고 룬을 하나 선물해준다. 실전성이 0이나 다름없는 룬인지라 업적작 이외엔 쓸모가 조금도 없어서 그렇지.
“그, 그러시다면…….”
카산드라의 말이 들려오자 헬가의 입술이 멀어졌다 부끄러움이 조금 가신 듯, 카산드라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뺨은 여전히 빨갰다.
“저택에서 여독이라도 풀고 출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토벌하신 이후에 쉬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숲에 애들을 두고 왔는데, 우리 둘이서만 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키히힛, 왔어?”
숲으로 들어오자, 반말을 하는 쪽의 닉스가 괴상한 웃음을 토해내며 우릴 반겼다. 그새 인격이 교체된 모양이었다.
하긴, 평소에는 어느정도 비율을 유지하는지 모르겠지만 도시에서 존댓말 쪽의 닉스로 교체된 이후에는 무조건 존댓말 쪽이 나와 있긴 했다. 슬슬 교체될 때 아닌가 싶은 시점이었다.
“싸운 흔적도 없어보이고…… 좋아. 잘했어.”
나는 존댓말 닉스에게 해줬던 것처럼 무심결에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손을 멈췄다. 그러자, 역으로 닉스 쪽에서 왜 멈추냐는 듯 내 손목을 잡고 자기 머리에 마구 비벼댔다.
머리를 넘어 아예 자신의 얼굴 전체에 내 손을 부벼대다시피 하는 닉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헬가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리제 기사단장님이랑 영주님으로는 부족하세요?”
“헬가 너 은근 말 안 아낀다?”
흐물흐물하고 게을러터진 행동이나 외모랑은 다르게,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는 성격과는 거리가 먼 듯 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말에 필터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적당히 쓰다듬다가 손을 뗐고, 닉스는 음침하게 웃으며 내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룬 던전의 입구 앞에 서서 날개 잃은 악몽을 뽑아들었다. 뒤따라서 무기를 뽑는 쇳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말했던 거 기억하지?”
“예. 룬을 지키는 놈은 단장님이 잡으실 테니, 저희들은 밖에서 다른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하셨죠.”
손에 은색빛이 감도는 롱소드를 든 헬가가 설렁설렁 말했다. 대충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핵심은 정확히 꿰차고 있었다.
“좋아. 진입한다.”
룬 던전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닉스가 두 번째로 들어서고, 일반 단원들이 중간, 헬가가 맨 마지막이었다. 던전의 내부는 전체적으로 암반을 대충 깎아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고, 기사들은 내가 주변을 경계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 의아해 하면서도 허둥지둥 나를 따라 걸었다. 어차피 여기서는 적이 안 나와서 그렇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길이 확 넓어지며 커다란 동공이 나타났다. 곳곳에 뚫린 원형의 구멍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종유석. 좁은 길 너머에 존재하는 탁 트인 동공.
이미 경험했던 적이 있는 장소였다.
브닼 4는 맵만 컸지 선형적 진행이 주류였던 1편부터 3편까지와는 달리 오픈월드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충분한 게임이었고, 그러니 자연스레 보스의 종류도 같이 늘어났다.
지역마다 보스를 배치해야 하는 것은 물론, 메인 스토리에도 보스를 등장시켜야 했고, 각종 던전에도 보스를 넣어두어야 했으며, 중간 보스의 숫자까지 대폭 늘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던전의 구조를 재탕하거나 보스의 외형을 팔레트 스왑으로 내놓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던전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던전의 구조와 보스 외형을 재탕한 곳이었다.
정말 지랄맞게도 악명 높은 보스인, 암석 지네를 말이다.
‘원판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곳의 보스는 그놈만큼 지랄맞은 기믹을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던전과 외형을 거의 고스란히 재탕했음에도 욕을 덜 먹었다.
기믹으로 잡는 게 아니라 정석적으로 전투를 벌여서 잡는 보스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믹까지 고스란히 베껴왔으면 단순히 욕 먹는 걸론 안 끝났다.
“이것들은…….”
누군가 중얼거렸다. 잔뜩 우그러지고 긁힌 데다가, 피로 얼룩진 갑옷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본 듯 했다.
저 갑옷의 주인이 맞이했을 운명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갑옷이라도 회수하시겠습니까?”
헬가의 질문에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게임에서는 그냥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갑옷이고 그걸 주울 수도 없었지만, 여기서는 갑옷을 주워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말고, 나가는 길에 회수하자. 일단 한 곳에 모아놔.”
“예.”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갑옷들을 한쪽 구석에 쌓아두었다. 열 명 이상이 희생당했다는 것 치고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사실 저 정도라도 남은 게 기적이었다.
여기 있는 지네들에게 갑옷 째로 씹어먹혔을 텐데 어떻게 흔적이 남겠는가. 브닼 4에서 질리도록 봤던 데스신이었기에 아주 잘 알았다.
“전원, 전투 준비.”
나는 동공 중간 지점에 들어서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무기를 쥐었다. 나는 그 상태로 조금 더 나아갔고, 곧장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했던 거 기억하지? 나는 먼저 내려간다. 너희는 이놈들 처리하고 여기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나는 닉스와 헬가, 일반 단원들을 내버려두고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갔다. 저 뒤에서 지네들이 암반을 뚫고 솟아나오는 콰쾅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중반 구역이라 잡몹을 잡아도 경험치가 그럭저럭 들어올테지만, 어그로 범위를 조절해가며 1대1 전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다대일 전투를 해야 해서 걸렀다.
브닼 4의 전투 시스템상, 강력한 보스 1명과의 싸움보다 어중간한 잡몹 수십 마리와의 동시 전투가 훨씬 더 어려우니까 말이다.
사실 닉스는 데려가고 싶었는데, 닉스가 사용하는 광역기에 나까지 휘말릴 위험이 있어서 포기했다. 자기는 미네르바만큼 정밀하게 마법을 조준하진 못한다던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암석 지네 던전의 재탕이어서 그런건지 오리지널 던전보단 길이가 월등히 짧았다. 보스룸에 도착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암석 지네의 열화판이자 팔레트 스왑 보스인 바위 지네가 대기하고 있ㅡ
“뭐야, 씨발?”
나는 안쪽에 있는 보스를 보자마자 육성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정말 어지간하면 이러진 않는데, 눈앞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와버렸다. 설마 여기서 저딴 게 나올 줄은 진짜로 상상조차 못했다.
제일 먼저 각진 파란색의 몸체가 눈에 들어왔다. 몸통은 전체적으로 길쭉했고, 위쪽은 살짝 휘어진 곡선의 덮개로 덮였다. 아래쪽에는 수많은 바퀴가 달려 있었다.
각진 몸통과 이어진 부분에는 굴뚝이 솟았고, 내부 구조를 받치는 판은 빨간색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얼굴. 그건 기괴함 그 자체였다. 얼굴의 1/4를 차지하는 동그랗고 거대한 눈과, 세모난 눈썹, 동그란 매부리코와 팔자주름에 이상하게 웃고 있는 입.
분명 바위 지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파란색 증기 기관차가 있었다.
그 빌어먹을 꼬마 기관차가 말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