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58)
r 158 – 생각지도 못한 정체 – 3
“이만하면 할만큼 했겠지. 피곤하니까 쉬어야겠다.”
지네 다섯 마리를 29조각으로 토막낸 헬가가 흐느적거리며 근처 벽에 몸을 기댔다.
피곤하다는 말이랑은 별개로 표정은 평소의 모습에서 변한 것이 없었다. 정말로 피곤해서 그런건지, 단순히 부하들에게 쉴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인지는 불명이었다.
“너네는 안 쉬고 뭐해?”
자기 부하들에게도 앉기를 종용하는 걸 보면 아마 후자에 가까울 듯 했지만.
나머지 기사들 역시 하나둘씩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니걸 복장의 가슴께를 팔락거려 열기를 내보내고, 토끼귀와 토끼 꼬리를 연신 가다듬었다.
헬가의 의도를 눈치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그녀들의 기사단장이 여기서 나오는 적을 전멸시키면 더 이상 증원은 없으니 쉬고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들을 때는 반신반의하긴 했는데, 여기까지 일이 진행된 이후에 돌이켜보니 상황이 무서우리만치 딱딱 맞아떨어졌다.
어느 적당한 동굴 앞에 데려다놓은 줄 알았더니 그게 사실 룬 던전 앞이었고,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던전의 내부 구조를 훤히 꿰고 있질 않나, 어느 장소에서 어떤 적이 나올지를 모두 예고해주기까지 했다.
영주랑 짜고 쳤나? 라는 말도 안되는 망상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쳐지나갈만큼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경외심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감정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원래라면 아무리 헬가라도 던전 한복판에서 주저앉는 짓 따윈 절대로 하지 않았을거고, 휘하 기사들 역시 명령이 없더라도 알아서 순번을 정해가며 경계를 서고 있었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상황이 정확히 그녀들의 기사단장이 말해준대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이번 정복도 제법 괜찮은 것 같지?”
“제법이 아니라 많이 괜찮은데? 단장님이 디자인은 우리한테 정하라고 하셨잖아. 우리가 직접 고른건데 제법으로 끝나면 안 되지.”
“아, 맞아. 보통은 단장님이 임의로 정해주시니까. 금빛 황혼 기사단에 있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 우리가 정해야 된댔을때 진짜 놀랐는데.”
대화를 나누는 기사들의 머리 위에서 분홍색 토끼 귀가 연신 쫑긋거렸다. 분명 머리띠임에도 불구하고 왜 진짜 귀처럼 쫑긋거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토끼귀 머리띠를 쓴다면 당연히 그걸 쫑긋거릴 수 있어야 하니까. 상식이었다.
부하들이 떠드는 동안 정복의 가슴 부분을 더 꼼꼼이 점검한 헬가는, 유두가 쓸리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올뻔 했던 야릇한 신음을 살짝 누르며 닉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키히힛…… 히히힛…….”
닉스는 연신 저 괴상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흘려대며 지네의 시체 하나를 잘게 다져 부수고 있었다.
지네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기에 몸이 잘게 찢어진다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말해, 저 여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시체를 훼손하는 중이란 뜻이기도 했다.
다 같이 쉬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만 저런 기이한 행동을 벌여대니, 시선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닉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에도 아랑곳 않고 시체를 잡아뜯었다.
기사 몇몇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이동으로 여기 몇 시간만에 도착하도록 해준 건도 있고, 성에 있을 때도 사고 한번 안 일으켰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건만, 저러는 걸 보면 확실히 마녀는 마녀였다.
그나마 직접적인 제지 없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선에서 끝낸 것도 평소의 이미지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닉스는 기어코 지네 한 마리를 자갈 덩어리로 분해시켜버린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근처 벽으로 걸어가 등을 붙이고 기대어 앉았다.
헬가는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도 모두 닉스가 옆에 있는 다른 지네의 시체를 잡아 뜯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 외였다.
무릎을 세운 닉스가 팔을 바동거렸다. 무릎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터무니 없이 커다란 가슴과 그에 반비례하는 짤막한 체형 탓에 그럴 수가 없는 듯 했다.
한참을 바동거리던 닉스는 결국 포기했는지 벽에 기대는 게 아니라 옆으로 어정쩡하게 누워버렸다. 오른쪽 가슴이 왼쪽 가슴에 짓눌리며 그 무게로 인해 살짝 납작해졌다.
“거기, 마녀.”
“……응?”
헬가가 닉스를 불렀다. 냅다 누워버린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던 닉스가 눈을 떴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 행동에 의미가 있는거야?”
헬가의 칼 끝이 얼마 전까지 지네 마물이었던 자갈 덩어리를 가리켰다. 원본은 형체조차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 주술적인 의미라든가, 아니면 마법 재료를 구할 목적이라든가. 그런 거.”
“…….”
그 질문을 듣고 헬가를 빤히 바라보던 닉스는, 뜬금없이 키히힛 거리며 웃었다.
“키히힛. 아무 의미 없는데?”
“……응?”
“아, 정확히 말해서,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닉스는 헬가의 질문에도 아랑곳 않은 채 벽 쪽으로 돌아누워버렸다. 더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그 뒷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던 헬가는, 이내 관심을 끄고 무릎에 턱을 굈다.
보나마나 별 이유없이 심심풀이로 그런건데, 심심풀이로 그랬다고 하면 뭔가 없어보이니까 적당히 그럴싸해보이는 대답을 내놓은거겠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단장님은 왜 저런 여자를…….’
그런 의구심이 잠시 들었으나, 헬가는 곧 작게 하품을 하며 의구심을 지워버렸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다.
단장님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저 밑에서 룬 던전을 지키는 마물과 혼자 싸워대고 있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다.
그 말을 했을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니었다.
‘잘 하고 계시겠지, 뭐.’
딱히 걱정은 안 됐다.
ㅡ터엉!
쇠가 쇠를 튕겨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로 한참을 밀려났다. 칼 끝을 땅에 박아넣었다. 콰드드득, 칼날이 지반을 가르며 밀려나는 속도를 늦췄다.
날개 잃은 악몽을 다시 뽑았다.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칼을 뽑아들자마자 지네 모양의 기차가 굴뚝으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아니면 기차 모양의 지네거나.
사실 둘 중 어느쪽이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저놈의 외형이 사람의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들 정도로 불쾌하다는 것 하나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바퀴에서 솟아나온 지네 다리가 근처의 땅을 사정없이 내리찍으며 이쪽으로 달려왔고, 몸통은 옆으로 물결치듯 출렁였다.
내게 똑바로 고정된 시선은 여전히 기괴했다. 눈썹은 화나 있었는데, 눈동자는 동그란 모양 그대로고. 입꼬리는 수평으로 쭉 뻗었다. 신체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웠다.
입 밑으로는 헤드라이트가 마치 아래턱처럼 딱딱거리고 있었다. 나는 날개 잃은 악몽을 다시 치켜들었다. 돌진 패턴은 맞지만, 이번은 피하는 게 아니라 튕겨내야 한다.
놈의 헤드라이트가 중간에서 교차하는 순간 팔을 휘둘렀다. 가운데로 모아지기 직전이었던 헤드라이트가 쨍!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놈의 돌진 궤적이 옆으로 비틀렸다. 날 향해 다가오던 머리가 바로 앞에서 홱 꺾였다. 마치 선로 변환기가 올려진 철도 위의 기차처럼, 놈의 몸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지네처럼 생겨먹은 다리에다 날개 잃은 악몽을 휘둘렀다.
‘끔찍하네.’
분명 암석 지네 보스전에서 지겹도록 본 모습일텐데, 이유는 몰라도 지금이 훨씬 더 징그러웠다. 이걸 보고있자니 피부에 무언가가 꾸물꾸물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애써 그런 기분을 떨쳐내며 검을 휘둘렀다. 네 대를 때렸을 때 쯤, 파란색 기관차 지네가 사사사삭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어 저만치로 빠져나갔다.
자세를 잡고 전투 피로를 줄였다. 놈의 머리가 다시 날 향했다. 뒤꽁무니쪽의 몇 마디가 허공으로 치켜올려졌다. 놈의 제일 뒤에 매달린 다리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놈은 마치 전갈처럼 자기 뒤꽁무니를 들어올리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걸 굴러서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저게 지네가 맞아?’
게임에서야 패턴 만들어야 되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었는데, 실제로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무슨 놈의 지네가 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기 머리쪽 마디를 치켜올려서 적을 내려다보질 않나, 심지어는 전갈처럼 자기 뒤꽁무니를 수직으로 세워 휘두른단 말인가.
머리가 혼란스럽든 말든 몸은 반응을 했다. 게임에서 하던대로 두 번을 구르자, 내 몸은 어느덧 놈의 머리 바로 정면에 도착해 있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다가 놈의 눈동자가 또다시 내게 정확히 고정되는 모습을 보고 잠시 주춤거렸다. 몇 번이나 봐온 얼굴임에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마음을 갈무리하고 날개 잃은 악몽으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푸른색 칼 끝이 놈의 아래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ㅡ퍼엉!
그 순간, 평소보다 훨씬 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때린 아래턱 부분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더니, 뾰족하게 솟아올랐던 뒤꽁무니가 아래로 축 가라앉으며 몸이 늘어졌다.
어떻게 되먹은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이른바 그로기라고 불리는 상태였다. 몇몇 보스에게 존재하는 ‘취약 부위’에 꾸준히 대미지를 입히면 볼 수 있었다.
인간형 보스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괴물형 보스에게만 존재하는 약점이었다. 괴물형 보스는 사실상 패링이 불가능하니 이런 식으로 비슷한 대처법을 설정해 둔 것이다.
물론 패링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패링은 대미지가 상대의 최대 체력에 비례하고 저항력으로 감소되지도 않지만, 그로기 상태 후 공격은 대미지가 시전자의 공격력에 비례하고 저항력으로 감소되니까.
하지만 통상적인 평타보다야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나는 날개 잃은 악몽을 회색빛깔 머리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힘차게 찔러넣었다.
ㅡ치이이이이이익!
내가 검을 찔러넣자마자 놈의 머리에 달린 굴뚝에서 시커먼 증기가 뿜어져나왔다.
날개 잃은 악몽을 크로스가드 바로 윗부분까지 멀어넣고, 어깨로 힘껏 밀었다. 둘 사이의 체격 차이가 무색하게도 놈이 벌러덩 옆으로 넘어갔다.
수십 쌍의 다리가 허공을 파닥거렸다. 검을 빼고, 거리를 벌렸다.
한동안 다리를 버둥거리던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시커먼 증기를 다시 한 번 내뿜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ㅡ콰드득!
머리가 180도 뒤집혔다.
눈이 있던 자리에 입이, 입이 있던 자리에 눈이 위치했다. 떼구르르, 눈동자의 검은자위가 같이 회전하더니 다시 내 쪽을 향했다.
화물칸의 석탄들이 우르르 떨어져내렸다. 동시에 검은자위의 범위가 서서히 늘어났다. 그 반대급부로 흰자위가 점차 줄어들었다.
마침내, 날 쳐다보는 눈동자에서 흰자위가 완전히 사라졌다. 쭈뼛 소름이 끼쳤다가, 갑자기 왜 저런 몰골이 됐는지 알아차리고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체력이 5% 이하로 남은 게 분명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대기까지 하는 걸 보니 틀림없었다.
원판에서도 체력이 5%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머리 부분의 갑피가 반쯤 박살나면서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지고 모든 대미지를 증폭해서 받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거의 다 잡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라는 의미다.
날개 잃은 악몽을 단단히 붙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마력 속성을 띠는 날개 잃은 악몽의 특수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검신의 푸른색이 한층 더 강해졌다. 내가 이러는 동안에도 반쯤 부서진 파란색 증기 기관차는 얼굴을 위아래로 뒤집은 채, 눈동자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빛이 깜빡거리는 헤드라이트가 눈썹 바로 앞에서 딱딱 맞부딪혔다.
마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모으고, 손잡이에서 왼손을 떼며 오른손을 어깨 높이까지 쳐들었다.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짙은 푸른색의 빛을 발했다.
저벅,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날개 잃은 악몽의 검신을 지팡이 삼아, 푸른색 회오리가 내쏘아졌다.
일직선으로 곧게 날아간 푸른색의 회오리가 나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파란색 기차의 머리에 적중했다.
ㅡ콰지지지직!
그리고, 적중한 자리부터 통째로 갈아버렸다.
푸른색 회오리는 머리의 1/3 가량을 날려버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몸의 절반 가까이를 파고들어가, 첫 번째 화물칸이 자리잡은 마디까지 박살내고 나서야 허공으로 흩어졌다.
놈은 다리를 잠시 파르르 떨다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의 절반 가량을 날려먹었으니 더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흰자위를 가득 메웠던 눈동자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반쯤 남은 입꼬리가 다시 눈 쪽으로 솟아오르며 웃는 얼굴을 그렸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뒤집혀 있었기에,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파란색 증기 기관차는, 굴뚝에서 마지막으로 희뿌연 연기를 한 번 내뿜고선 완전히 작동을 멈췄다.
빌어먹을 꼬마 기관차, 아니, 바위 지네 보스전 종료였다. 놈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제발 저런 모드는 이놈이 마지막이기를 빌며, 은은한 초록색 빛을 내뿜고 있는 룬 비석으로 다가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