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59)
r 159 – 생각지도 못한 정체 – 4
룬 비석 앞에 서서 표면에 손을 올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은은한 초록색 빛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내 몸 이곳저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번 겪어본 감각이었지만 별로 적응은 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왼손 손등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몸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던 힘이 점차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왼손 손등이 연신 움찔거렸다.
몸이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눈을 떴다.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새겨졌던 활력 강화 룬 옆으로, 문신의 획이 몇개 더 추가되어 있었다.
‘됐다.’
룬을 얻었으니 여기서 할 일도 끝났다. 나는 비석의 표면에서 손을 뗐다.
방금 습득한 룬의 이름은 ‘마나 증진’. 그 이름답게 마나의 최대치를 증가시키는 간단한 효과였다.
증가치가 썩 대단한 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룬은 아니지만, 있어서 나쁠 것도 없는 룬이었다. 당장 날개 잃은 악몽의 특수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마나가 소모되니까.
제 할 일을 마친 룬 비석이 빛을 잃고 평범한 돌쪼가리로 변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저번과는 달리 룬 비석이 무너졌다고 해서 새로운 길이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는 지상으로 곧장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나야 하지만, 이렇게 길이가 짧은 던전은 그냥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만 해도 금방이라서였다.
그대로 보스룸을 나가려던 나는 반쯤 부서진 지네, 아니, 지네 모양 기차의 시체를 보고 잠시 멈칫거렸다.
‘……토벌 증거로 챙겨가야 하는 건가?’
암석 지네를 상대했을 때는 처음부터 룬을 습득하러 갔던 것이었기에 시체를 안 챙겨도 됐지만, 지금은 의뢰를 받고 온 것이니 혹시나 증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내 손등에 있는 룬을 보여주기만 해도 증거로는 충분할 테고, 뭣하면 룬 파동을 조사해봐도 되지만, 시각적인 증거로는 저 마물의 머리만한 게 없으니까 말이다.
‘헬가한테 물어봐야겠다.’
다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걸어갔다. 그래. 괜히 나 혼자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건 나보다 헬가 쪽이 더 잘 알거다.
“오.”
헬가의 입에서 짤막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상체가 1/3 가까이 증발해버린 바위 지네를 보고 처음으로 내뱉은 감상이었다. 나머지 바니걸들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닉스는 바위 지네의 시체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으로 내 옆을 배회하면서 음침하고 이상한 웃음을 흘려대는 중이었다.
자꾸 내 손을 쳐대보길래 왼손을 슬쩍 내밀어주니, 그걸 냅다 낚아채선 자기 머리 위에 얹고 머리를 흔들어댔다. 꼭 고양이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증거로 챙겨갈까?”
내 질문에, 헬가는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음…… 너무 커서 안 되겠습니다. 머리만 잘라간다 치더라도 서넛은 달라붙어야겠는데요. 그리고, 단장님이 룬을 습득하셨다면 그게 제일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할 거고요.”
“역시 그렇지?”
“네. 다른 전리품이나 부산물이 없는 건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헬가의 눈이 슬쩍 주위를 훑었다. 카산드라가 이 던전에서 나오는 건 모두 가지라고 했으니, 따로 챙길 게 없다는 점이 아쉬운거겠지.
나야 이 던전 내부에 다른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데다 처음부터 룬이 목적이었기에 따로 챙기는 게 없어도 상관없지만, 얘네들은 아닐 테니까.
“카산드라한테 한 번 말해볼게. 여기서 건진 거라곤 룬밖에 없는데 따로 보상을 해주겠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단장님.”
헬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으로 걸어왔다가, 고롱고롱 소리를 내기라도 할 것처럼 내 왼손에 뺨을 부벼대는 닉스를 발견하더니 차게 식은 눈을 했다.
시선은 곧장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닉스의 이런 행동을 용인한다기보단, 그냥 신경을 꺼버린 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전부 돌아갈 준비 해. 이만하면 충분히 쉬었잖아.”
바위 지네를 보며 자기네끼리 쑥덕이던 바니걸들이 네~ 하고 말꼬리를 살짝 늘이며 대답했다. 글로 쓴다면 아마 단어 뒤에 물결표가 붙어있지 않을까 싶은 대답이었다.
헬가의 부하라서 그런 건지, 어째 쟤들도 갈수록 헬가를 닮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흐느적거리고, 쉬는 거 안 가리고.
들어올 때와 똑같은 대형으로 왔던 통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동공이 나타났다. 내가 닉스와 헬가, 일반 단원들을 대기시켜두었던 장소였다.
게임에서처럼 제법 많은 수의 지네가 나타났던 듯, 바위로 이루어진 지네의 시체들이 온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네의 시체는 수십 마리나 되는 것에 비해 우리 쪽 기사들은 얼굴에 긁힌 자국 하나 없었으니, 기사들이 일방적으로 탈탈 털어먹었다는 의미였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보스들한테야 근본적인 스펙 차이 탓에 상대가 안 되겠지만, 뒤집어 말해 스펙 차이가 별로 나지 않거나 오히려 기사 쪽이 앞서는 적이라면 최후반부에 등장하는 필드몹 특성상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바닐라에서도 평타 한 방에 플레이어 체력을 절반 가까이 날려버리던 게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이다. 하물며 닼라 모드가 적용된 상태라면 어떻겠는가.
이런 금빛 황혼 기사단보다 훨씬 더 정예몹 취급을 받았던 은빛 여명 기사단의 기사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데, 단장님.”
최후방에 위치해 있어야 할 헬가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헬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흉부에 달린 거대한 지방 덩어리를 출렁여대며 걷고 있는 닉스를 슬쩍 쳐다보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마녀한테는 시체를 잘게 부수는 행위가 특별한 주술적 의미라도 있는 거예요?”
“주술적 의미? 그게 뭔 소리야?”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흑마법 쓰는 적들이 시체를 찢으면서 의미를 찾는단 내용이 담긴 문서는 한 번도 못 봤다. 그런 대화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니, 저 마녀가 그랬었거든요. 지금 오른편에 자갈 무더기 보이시죠? 저거 원래 지네였습니다. 저 마녀가 저래놓은 거예요.”
헬가의 손가락이 내 오른편에 흩어진 자갈 무더기를 가리켰다. 원본이 지네였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길 가는 돌무더기나 마찬가지였다.
“……저게 원래 마물이었다고?”
“네. 전투 끝나고 자기 혼자서 부숴대던데요?”
“흐음…….”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흑마법사들 중에 몇몇이 생체 실험을 즐겨 한다는 문서를 본 적이 있긴 했는데, 걔들도 어디까지나 실험이 목적이었지 무의미하게 시체를 부숴댔던 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제가 이유를 물으니 이상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대답이라니, 뭐라고 했길래?”
“그런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고 물어봤더니,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냥 별 의미 없이 있어보이려고 내뱉은 말일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는 발언이다. 굳이 ‘여기서는’이란 단어를 강조한 걸 보면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선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건데.
닉스의 성격은 나로서도 종잡기가 힘들었기에, 저 말의 진의는 오리무중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나가서 한 번 물어보긴 할게. 혹시 내가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도 있으니까.”
“아, 하긴. 단장님이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도 있겠네요. ”
닉스가 수상할 정도로 나를 잘 따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헬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물러났다.
저건 솔직히 나도 조금 궁금했다.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냥 있어보이려고 둘러댄 말일 수도 있겠지만, 질문을 해볼 가치는 충분해보였다.
닉스는 헬가와 나 사이의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음침한 미소를 띄운 채로 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 반대급부로 주변 기사들과의 거리는 들어올 때보다 조금 넓었다. 아무래도 시체를 헤집어놓은 행동이 조금 크게 작용한 듯했다.
“아……! 드디어 나오셨군요!”
한 곳에 쌓아두었던 갑주를 챙기고 던전을 나가자마자 바로 옆에 기사를 대동하고 서 있는 카산드라의 모습이 보였다.
카산드라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다가 내 모습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펴졌다. 그 뒤에 서 있는 여기사 역시 우리들을 확인하자마자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안도감으로 가득 들어찬 눈이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영주가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내 뒤의 기사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미 게임에서 지겹도록 겪어본 일이었기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이것저것 좀 많이 다르긴 한데.’
게임에서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은 영주 본인과 영주가 제일 신뢰하는 직속 기사, 그리고 플레이어 이렇게 셋뿐이라서 정말 은밀한 비밀을 지킨다는 느낌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헬가는 물론이고 그 휘하의 일반 단원들까지 던전에 같이 들어갔다 나온지라 주위가 아주 바글바글했다.
심지어는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닉스까지 같이 있었으니,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뭐, 얘들이 어디 가서 먼저 털어놓을 성격은 아니지만.’
카이킬리아가 직접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이라도 해오지 않는 이상은, 우리 쪽에서 먼저 룬 던전을 갔었다며 떠들어대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입이 그 정도로 가벼웠으면 애초에 황궁에서 근무 못 한다. 카이킬리아에게 책잡히지 않기만을 빌 수밖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처리는 끝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긴장이 풀린 듯, 카산드라의 몸이 휘청였다. 뒤에 서 있던 여기사가 잽싸게 어깨를 받쳐주었다. 카산드라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마음 고생이 그렇게 심하셨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만.”
카산드라가 살짝 도리질을 쳤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유 모를 공포감이 덮쳐온 탓에 전신이 벌벌 떨리면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기사님이 나오시는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제 안색이 좋지 않은 것도 아마 그 영향일 것입니다.”
‘어? 그러고보니…….’
닉스가 근처에 있으니 저 뒤의 여기사는 몰라도 카산드라는 확실히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라색과 초록색이 반씩 섞인 머리카락을 지닌, 짜리몽땅한 마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뒤에 있던 기사가 검지 손가락을 X자로 겹쳐 보였다. 그 뜻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납득했다.
자기가 남아있다면 대화가 제대로 안 될 테니 카산드라를 보자마자 어디론가로 순간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의외로 배려심이 깊은 성격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타이밍이 미묘하게 어긋난 탓에 카산드라는 날 보니 마음이 진정됐다며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긴 하지만.
‘자, 이제 어떻게 되려나.’
나는 차분히 카산드라가 이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카산드라가 여기서 내뱉는 말에 따라서 중반 이후의 메인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결정된다.
정확히는 초반부터 지금까지 플레이어가 걸어온 행적에 따라서 결정되는거고 카산드라는 그걸 단순히 알려줄 뿐인 역할이지만, 지금은 중간을 죄다 건너뛰어버렸으니까.
이후의 스토리는 전적으로 카산드라에게 달려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스토리를 찾으려는 것도 웃긴 행동이긴 하다만,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저…….”
카산드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