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6)
그 날 저녁, 나와 아이리스는 영주를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원래는 내일 아침에 갈 생각이었는데, 그놈이 지금 오라고 하인을 시켜서 전달했었다나.
아이리스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를 입었고, 나는 적당히 천으로 된 평범한 옷을 걸쳐 입었다. 남자 옷은 안 바뀌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알겠나? 절대 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그 놈이 무언가 질문을 한다면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내가 알아서 대답해줄테니.”
“알았어.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야?”
“이렇게 반복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으니까 이러는거다. 명심해라, 그 놈이 너한테 어떤 식으로 대할지 모르고, 무슨 트집을 잡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말을 타고 영주의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아이리스는 본인 나름의 조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닥 의미는 없는 조언이었다.
그놈이 정말 작정하고 트집을 잡으려 든다면 저런 조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무엇보다 내가 영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점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었다.
아이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기사단장들은 단순히 패악질에 시달리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그놈을 온갖 방법으로 죽여본 경험자였다.
첫 만남부터 대뜸 모가지를 따버린다면야 뒷일이 몹시 고달파지니 여기서까지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준비 과정까지 포함해 넉넉잡아 2주일이면 아무 뒤탈 없이 그놈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여기다.”
말을 타고 도시 중심부로 나아간 지 얼마나 됐을까, 아이리스가 어느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서 말을 멈췄다.
보는 내가 황당하기 짝이 없을 크기의 저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임 속의 저택보다 훨씬 더 커다란 규모에 잠시 말문이 막혀 멍하니 그걸 쳐다보았다.
꼴에 황가의 핏줄이라고 허영심을 아직도 못 버렸다는 설정이었던가. 차라리 황제가 거주하는 저택이라고 해도 믿을 듯 했다.
‘그러고보니, 황제도 여자겠지?’
NPC 외형 리터칭 모드에서는 황제도 여자였었는데.
아니지, 외형 변경 모드에서는 그냥 어지간한 인간형 보스가 전부 다 여자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오히려 성별이 남자인 채 그대로 남아있는 보스가 더 희귀할 정도였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 아마 여자였을거다. 제발 성격까지 달라진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정지, 정지!”
저택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우리를 확인하고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도시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이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대하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자세는 삐딱했고, 얼굴에는 귀찮음이 팍팍 묻어났고, 말투도 퉁명스러웠다.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아이리스에겐 한주먹거리도 안 될 놈이 영주를 믿고 저러는 모양이었다.
“왜 왔어?”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옆에서 보는 내가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는데, 아이리스는 그런 대접이 익숙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감옥 파견 건의 보고를 하러 왔다.”
“아, 그래? 그럼 알아서 들어가. 말은 적당히 놔두고.”
이제는 손짓도 아니고 턱짓으로 들어가라며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나더러 참으라는 눈짓을 하고선 말에서 내렸다. 나도 똑같이 말에서 내리고, 기사를 지나쳐 걸어들어갔다.
“잠깐, 옆은 누군데?”
그냥 지나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질문했다.
“신입이다.”
“신입? 푸핫, 또 하루만에 내쫓기려고? 학습 능력이 없는거냐?”
기사는 깔깔 웃어댔고, 아이리스는 묵묵히 말고삐를 나무에 묶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그 기사놈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지자 내가 귀에 대고 슬쩍 속삭였다.
“저게 보통이야?”
게임에서도 스토리가 얼마 진행 안 된 상황에서 저택의 기사들에게 말을 걸면 대체적으로 뺀질거리고 무례한 대답이 돌아오긴 했다. 그런데 저 정도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너도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 기사단에서 내쫓기지 않고 오래 있을수록, 저런 언행을 더 많이 듣게 될테니.”
아이리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짜증이나 분노가 치밀어오르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 뒤로 영주의 저택 안에 들어가 응접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을때까지, 나는 그동안 은빛 여명 기사단이 어떤 푸대접을 받아왔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게임에서보다 심했다.
게임에서는 하인들이 플레이어를 깔보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역할은 다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우리를 깔보느라 최소한의 자기 역할조차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응접실에 거의 내팽개쳐지다시피 한 채로 기다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와선 텅 비어있던 테이블에 온갖 다과를 깔았다.
“영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당연히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들어올 그 영주라는 작자를 위한 다과들이었다. 저녁 먹는답시고 우리를 방치해놓고선 또 뭘 주워먹는건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야 간신히 얼굴을 보겠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와, 시발 세상에.’
그리고,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극악한 비주얼에 경악했다.
전신에 살이 뒤룩뒤룩 찐 걸로도 모자랐는지 지방이 얼굴에까지 묻어나와 이목구비가 살에 푹 파묻혀 있는 것은 물론, 저 몸뚱아리로 대체 어떻게 걸어다니나 싶을 정도로 몸 전체가 비대했다.
몸의 세로 길이와 가로 길이가 거의 비슷해보이는 인간은 난생 처음 봤다.
바닥을 굴러서 들어온 게 아니라 자기 두 발로 일어서서 걸어들어왔다는 사실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걸어다니는데도 무릎 관절이 멀쩡하다고?
‘게임에서도 뚱뚱하긴 했지만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영주는 뒤뚱뒤뚱 걸어들어오더니, 숨을 길게 내쉬며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앉은 자리가 아래로 푹 꺼져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다는 게 테이블의 과자를 먹는 일이었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리고 나서야, 끄으으윽 하고 길게 트림을 한 영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 돌아왔느냐, 아이리스.”
“……네, 말씀하신대로, 감옥을 조사했습니다.”
저래보여도 황가의 핏줄이라 이건지, 아이리스는 영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작 존댓말을 사용하는 본인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확 일그러져 있었지만.
“보고하도록.”
“죄수와 간수를 포함해, 감옥 안의 인간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마물에게 당했습니다. 제가 갔을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라 손 쓸 틈도 없었습니다.”
“쯧, 그러게 내가 대비를 단단히 하라 일렀거늘.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나 모르겠군.”
글쎄다. 그 마물, 니가 유인한거잖아?
사태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사람 시켜서 감옥으로 인간 도살자를 유인해놓고선 선견지명이 있는 척 하다니,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그 놈이 감옥의 유일한 생존자인가?”
그래도 황궁에서 정치질을 하던 짬밥이 제법 되는 모양인지, 나를 흘긋 곁눈질하더니 단번에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영주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한움큼 집어 우걱우걱 씹어먹고선 아이리스를 쳐다보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리스는 크게 당황했다.
“너는 나가 있어라, 아이리스.”
“예? 하지만ㅡ”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내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
아이리스가 나를 불안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입술을 한번 짓씹고는, 머리를 대충 숙이고선 문이 떨어져라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첫 만남부터 이런 상황에 처하는 건 예상 외였는데.
뭐, 내 입장에선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영주를 뒤탈 없이 제거하려면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세 번째 만남부터 영주와 독대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첫 만남부터 이렇게 진도를 빼준다면 저걸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픈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둘만 남게되자, 영주는 소파 등받이에 거만하게 팔을 걸치더니 식탁에까지 발을 올렸다. 나를 아주 개무시하는 태도였다.
뭐, 영주 입장에서야 나는 감옥에 있던 죄수였으니 저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사단장마저 깔보는 놈이 한낱 죄수 따위를 신경쓸까.
사실 저택에 있는 인간들의 성격이 전체적으로 게임에서보다 훨씬 더 개차반으로 변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작 선을 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놈이긴 했다.
“이봐, 너.”
“네, 영주님.”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아이리스를 만나서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것도 그렇습니다.”
“중간에 저 기사단과 트러블이 있었다거나, 기사단장들 중 하나와 싸웠던 적은?”
“없습니다.”
게임에서 나타나던 선택지를 생각하며, 영주가 내게 제안을 건넬만한 대답만을 골라 말했다. 영주는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를 한참동안이나 생각했다.
“감옥에는 왜 갇혀 있었고?”
그렇지.
내가 예상하던 그대로의 질문을 던지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래도 일이 제법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런곳에 왜 갇혀있었겠습니까? 영주님이 생각하시는 죄목이랑 별로 다르지 않을겁니다.”
“흐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일부러 최대한 비열해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온다면 무덤을 파는 일은 거의 다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안에 넣을 부장품을 준비해서, 이놈이 그걸 보고 제발로 무덤에 걸어들어가도록 하면 끝이다.
다시 한참을 고민에 잠겨 있던 영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자에 관심 좀 있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