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72)
r 172 – 태양과 달 – 1
“오랜만이네, 헬가. 나흘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쭈뼛거리며 다가온 헬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단원들이 장난기 넘치는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헬가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흐리멍텅하게 서 있던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네, 잘 지냈어요. 멋대로 그런 행동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래서 일부러 너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줬잖아?”
일반 단원들이 히죽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대부분은 그때 했던 것처럼 대담하게 다가서라는 내용이었다.
헬가는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괜히 말해줬나?’
보고 있자니 살짝 안쓰러워졌다. 서로서로 저렇게 놀려먹을 만큼 친하다는 의미겠지만, 헬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새빨개서 더 안쓰러워 보이는 점도 있었다.
게다가, 그 행동들이 전부 다 나를 향한 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도 하고 말이다.
‘설마 그게 여기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는데.’
악마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증폭시킨다.
내가 책을 이용해 아우로라의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그 놈이 책을 보자마자 달려든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쳐서 욕망을 불러일으킨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눈이 돌아갔듯이 말이다.
스텔라의 설명에 의하면, 베히모스의 능력인 매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혹에 걸린 헬가가 나한테 그렇게 달라붙었던 건 나를 그만큼 평소에 좋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고, 좋은 상사라는 의미에서.
그냥 긍정적인 부류의 감정이라면 싸그리 다 성적인 욕망으로 변질된다고 보는 것이 편했다. 악마라는 놈들은 그런 존재였다.
물론 호감이 아예 없어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헬가의 경우처럼 보자마자 달려드는 일은 악마가 그 쪽으로 작정하지 않는 이상에야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졌었다.
특히 베히모스처럼 불완전하게 부활한 상태였다면 더더욱 그렇고.
내가 지나가더라도 빤히 쳐다보기만 했던 이 도시의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봤을 뿐,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는 않았으니까.
‘게임에서 겪었던 매혹이랑은 이름만 같다고 봐야겠어.’
스텔라의 설명을 듣고 내린 결론이었다. 게임에서 보던 상태 이상과는 성질 자체가 달랐다.
게임의 베히모스는 인간이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어 힘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매혹을 사용했고, 그래서 매혹에 걸렸던 거의 모든 사람이 이단 판정을 받았다.
원인과 과정이 어떻게 됐든, 결과적으로는 악마를 숭배해버린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아무리 발빠르게 움직이더라도 희생자가 어마어마하게 나왔었다.
하지만 이곳의 베히모스가 사용한 매혹은, 솔직히 매혹이라기 보단 발정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대체 또 어떤 모드가 작용했는지는 불명이었다.
‘아마 아이리스도…….’
아이리스의 경우도 비슷했다. 스텔라의 설명을 듣고 나니, 왜 아이리스의 증상이 헬가보다 훨씬 더 심각했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헬가가 내게 품은 호감보다 아이리스가 내게 품은 호감이 훨씬 더 컸던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사실상 내가 은빛 여명 기사단을 살려준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전 영주놈을 죽여서 숨통이 트이게 해줬고, 종래에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 원래 직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내게 좋은 감정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그 좋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성적 욕망으로 변질되었으니, 헬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달라붙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다시 볼 때는 어색하게 안 굴었으면 좋겠는데. 자기 없는 동안 둘이서 물고 빨았냐면서 리제한테 추궁당할라.’
몸이 회복된 아이리스는, 나를 향한 호감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는 부분까지 설명을 듣자마자 명령을 완수했으니 돌아가겠다며 새빨개진 얼굴로 달려나갔다.
덕분에 그 호감이라는 게 꼭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모든 긍정적인 감정을 포함한다는 설명을 못 들었다.
‘뭐, 어련히 잘 이해했겠지.’
아이리스가 어린애도 아니고, 호감을 무조건 사랑으로만 생각할 리 있겠는가.
“귀빈님, 채비는 다 차리셨나요?”
스텔라가 생글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헬가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어때? 헬가?”
“완벽합니다.”
간신히 놀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헬가가 냉큼 대답했다. 단원들도 웃음기를 지우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네. 저희도 끝났습니다.”
생글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스텔라의 뒤로, 철퇴와 방패를 든 전투 수녀들이 마치 한 몸처럼 대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방패가 태양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셀레네의 자리는 스텔라의 바로 옆이었고, 그 뒤로는 한 손에 레이피어를 들고 반투명한 타이즈와 언더붑 가죽 재킷을 입은 전투 수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자기 상관의 성격과 외모를 따라가는 건지, 서로가 정확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이단심판관님은 어떠십니까?”
스텔라는 싱긋 웃으며 오른손에 들린 베히모스의 머리를 흔들어보였다. 이번은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라서, 기록 보관소에 기록한 이후에 정화할 예정이라던가.
놈의 머리는 흰 베일로 눈 근처를 꽁꽁 싸맨 상태였다. 아이리스가 매혹에 걸렸던 게 베히모스와 눈을 마주쳐서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면 문제는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다.
그리고 이것 역시 기록 보관소에 기록될 예정이었다. 신성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죽은 악마와 눈을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테니까.
악마를 토벌하고도 시체를 남겨둔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좋아. 다들 준비해. 너희 먼저 성으로 돌아갈 거야.”
“단장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난 성국에 잠시 갈 일이 있거든. 영주님한테 올릴 보고서는 닉스가 들고 있을 테니 받아가고, 헬가 넌 영주님 저택으로 가서 그것만 전해주면 돼.”
“알겠습니다.”
우리들은 고작 나흘만에 이 도시를 떠날 준비를 했다. 게임에서는 이단심판관이 제법 오래 머물렀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였다.
베히모스가 완전히 부활해서 도시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던 게임의 스토리와는 달리, 지금은 불완전하게 부활한데다 깨어나자마자 곧장 토벌당하기까지 했으니 피해가 제법 경미했다.
사건의 실체를 숨기고 단순한 악마 숭배자들의 부활 소동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을만큼.
참고로 남자들은 전부 건물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여자들이 남자를 지하실에 가두고 뭘 했을지 상상하기란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들이 단체로 그런 짓을 벌인 이유는 악마 숭배자들의 사특한 힘 때문이라는 말로 덮었다.
아주 편리한 만능의 주문이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단심판관님.”
“그럼요. 얼마든지 기다려드릴게요. 다녀오세요.”
나는 스텔라와 셀레네를 뒤로 하고, 닉스가 거주하는 오두막 아닌 오두막으로 향했다.
침대에서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던 닉스는, 침대 근처로 다가가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상체를 일으켰다. 반동을 받은 가슴이 와이셔츠 밖으로 삐져나올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닉스가 눈을 몇 번 부비고 나를 올려다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헤, 헤헤…… 안녕하세요?”
“존댓말 쪽이구나?”
“네, 헤헤. 어제 나왔었으니까요.”
잠에서 깬 닉스는 헤실거리며 내게 달라붙었다. 나는 닉스를 몸에 대롱대롱 매단 채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이 모습을 본 단원 몇 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성으로 돌아갈 건데, 준비 끝냈어?”
“아, 그런가요? 헤헤. 알았어요.”
자그마한 손가락이 튕겨지자, 흑염이 쏟아져 내려와 오두막을 불태워버렸다. 저 안에서 챙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나름 이것저것 꽤 많아 보였는데.
신기한 것은 흑염이 오로지 오두막만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나무는 불이 잘 붙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주변에 쌓인 낙엽 더미조차 멀쩡했다.
“헤헤, 이따 봐요.”
오두막을 깔끔하게 불태워버린 닉스가 순간이동을 준비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곧이어 마법진이 검은색 빛을 발했고, 헬가와 일반 단원들의 모습까지 통째로 사라졌다.
마법진의 흔적까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스텔라와 셀레네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혼자서 돌아오자 전투 수녀들의 눈빛이 아주 부담스러운 쪽으로 바뀌었다.
“다시 한 번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귀빈님.”
스텔라가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 옆에서는 셀레네가 손에 은은한 만월이 깃든 신성 촉매를 든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교황 성하들께서 좋아하시겠네요.”
“……리제, 잠시 괜찮겠나?”
황궁으로 돌아온 아이리스는 카이킬리아에게 보고를 올린 뒤, 제일 먼저 리제를 찾았다. 일을 모두 끝내고 방에서 쉬고 있던 리제는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으르렁댔다.
“나 없는 동안 내 애인이랑 데이트는 즐거우셨어? 아주 꿀이 뚝뚝 떨어졌겠지? 응?”
클라우디아는 에리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그걸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저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저건 그저 가벼운 투정일 뿐이었다.
갑옷을 닦고 있는 에리카도 자기 어깨를 꾹꾹 눌러대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지, 리제를 말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델타와 관련된 일이다, 리제. 들어줬으면 좋겠군.”
멈칫, 그 말에 리제의 표정이 바뀌었다. 클라우디아와 에리카도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바꿨다.
딱딱히 굳은 얼굴의 아이리스, 델타와 관련된 일. 그러기 싫어도 불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리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왜? 델타한테 무슨 일 생겼어?”
“그것이…….”
아이리스가 우물쭈물하자, 참다 못한 리제가 성큼성큼 아이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콱 붙잡아 끌어당겼다.
“델타한테 뭔일 생겼냐니까? 왜 대답을 못 해?”
여기서, 델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간과한 사실이 두 가지가 있었다.
“내가…….”
첫 번째는, 시체가 매혹을 걸 수 있었던 이유와 매혹의 효과가 사람마다 달랐던 이유를 생각하느라 아이리스에게 매혹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델타를…….”
두 번째는, 아이리스가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과 스텔라의 설명 중에서 호감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제멋대로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같다.”
ㅡ와장창!
막 광내기를 끝마쳤던 투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갑옷의 다른 부위들 위로 굴러떨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