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78)
r 178 – 태양과 달 – 7
두 쌍의 녹안과 두 쌍의 자안이 내 손에 들린 지팡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 저…… 귀빈, 이시여……?”
플로레타는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대며 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혀가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했다.
“귀빈이시여, 그것은……?”
삐걱거리기만 하는 플로레타를 대신해 루나가 나섰다. 다만 루나의 상태 역시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입을 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내가 말했던 거. 그러니까…… 일단은 성유물이겠네.”
성능으로만 따지자면 망가진 직검보다도 훨씬 더 쓰레기인, 외형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무기를 성유물이라고 불러주자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신앙 99에 신성력 99를 찍고 풀버프 상태로 악마에게 최상위계 신성 주문을 꽂아도 세 자릿수 대미지를 못 뽑는 이딴 물건이 왜 성유물이란 말인가. 그냥 간지나는 손전등이지.
대미지만 놓고 보면 계수 보정치가 아니라 역보정치가 있는게 아닌가 싶은 물건이었다. 처음 써봤을 때 대미지 자릿수를 잘못 본 줄 알고 진짜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성국 입장에서 보자면 성유물이 맞으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불러줘야지.
“성유물…….”
고개를 푹 숙인 루나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끝으로 갈수록 말을 하는 건지 웅얼거리는 건지조차 구분이 안 갈 만큼 볼륨이 낮아졌다.
나는 4방향에서 콕콕 꽂혀대는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플로레타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걸 본 플로레타의 눈이 한껏 커졌다.
“받아, 플로레타. 네 거야.”
“……저, 말입니까?”
“그러면 여기 플로레타가 너 말고 또 있어?”
빨리 받으라는 뜻으로 지팡이를 든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플로레타가 양 손을 하나로 모아 조심스레 내밀었다. 손이 심각하리만치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저래서야 이걸 제대로 쥘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손바닥 위에 지팡이를 얹어주고, 손가락 마디를 꾹꾹 눌러 주먹을 쥐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안 해줬다간 내가 손을 떼는 순간 놓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자신의 손 안에 놓인, 빛을 내뿜는 작은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플로레타는 지팡이를 왼손에 옮겨잡았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이 작은 태양으로 뻗어졌다.
태양 바로 앞까지 다가간 오른손은, 그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며 망설이더니 결정을 내린 듯 노을빛으로 달아오른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루나와 스텔라, 셀레네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뜨겁, 지…… 않습니다…….”
태양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플로레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리 봐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랑 똑 닮아있는데 전혀 뜨겁지 않다는 점이 신기한 듯, 플로레타는 촉촉한 눈동자로 그걸 쓰다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귀빈이시여. 이것을…… 이 성유물을,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글쎄. 신이 알려줬나?”
나는 살짝 웃으며 농담조로 답했다.
여기 있는 넷이라면 방금의 내 말은 상황을 어물쩡 넘기려고 내뱉은 말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거다. 내가 대답을 피한 것이라는 사실도 눈치챌 수 있을거고.
“……그렇습니까.”
저런 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태양께서…….”
내 농담조에 가까웠던 목소리와 장난스러운 표정, 그리고 신이 알려줬나? 라며 끝이 살짝 올라간 채로 끝난 문장을 확인하지 못한 듯, 플로레타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물론 달의 교황과 이단심판관, 이단심문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넷 모두, 내가 한 말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시다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같은 상황에 플로레타나 루나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겼더라면 그 편이 훨씬 더 놀라웠을 거다.
어차피 저렇게 생각해봤자 딱히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교황들과 내 관계를 생각해보면, 성유물 하나가 더해져봤자 바다에 소금 한 컵 뿌리는 정도밖에는 안 된다.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인다 해도 관계가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단 의미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 교황들은 맨날 하는 일이다. 교황들 이외의 사람이 최초로 들었다고?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잡은 것부터 내가 최초였는데 뭘 새삼스럽게.
‘내가 이런 짓 벌였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돌이켜보면 놀랄 짓을 참 많이도 했다.
신이 내린 계시를 해석하지를 않나, 심연 던전을 혼자서 토벌하고 돌아왔지를 않나,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을 잡아줬지를 않나, 신의 축복을 받았지를 않나, 신의 목소리를 들었지를 않나.
여태껏 이래저래 저질러놓은 일이 제법 됐다. 성유물을 찾았다는 것 역시 단독으로 놓고 보면 엄청난 업적일지 몰라도, 저것들 뒤에 나열해놓으면 그냥 평균치 수준이었다.
게다가, 우리 관계를 공표하는 건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박아놨는데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니다.
“루나.”
“…….”
“루나?”
“……예, 귀빈이시여?”
플로레타의 손 안에서 빛나고 있는, 천사의 날개로 감싸인 작은 태양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쳐다보고 있던 루나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반쯤 멍했다.
“혹시 만월이 언제쯤 뜨는지 알려줄 수 있어?”
“오늘입니다.”
내 질문을 들은 루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역시 달의 교황이라서 그런건가 싶었다.
“……오.”
이건 나도 예상 못했다. 설마 보름달이 뜨는 날도 오늘이었을 줄이야.
태양 만세 이스터에그를 활성화시키는 조건으로 ‘정오’가 요구되듯이, 달 쪽의 이스터에그를 활성화시키는 조건으로는 ‘만월’이 필요했다. 툭 까놓고 표현해서, 보름달 말이다.
게임에서는 둘 다 특정한 트리거를 만족시키면 나타나는 일회성 이벤트였기에 활성화 난이도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아무때나 잡고 낮 12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정오에 비해 만월은 보름달이 뜨는 주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못 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위로해주려 했었는데.
하지만 오늘이 만월이라면 굳이 루나를 위로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얻어서 주면 되니까. 보름달이 뜨는 주기에 맞춰서 다시 교황들을 찾아오지 않아도 될 테고.
참고로 ‘달을 찬양하라’는 ‘태양을 찬미하라’와 딱히 차이가 없었다. 기껏해야 손등이 밖을 향하냐 안을 향하냐로 구분될 뿐.
‘밤 12시까지 기다렸다가 루나한테 지팡이 주고 바로 돌아가면 되겠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루나는 자신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두 쌍의 천사 날개가 달리고, 그 위에 두둥실 떠오른 만월이 은은한 달빛을 비추고 있는 성유물을.
목이 꽉 막혀버리기라도 한 듯,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말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튀어나와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플로레타 역시 비슷했다. 플로레타도 손에 성유물을 쥔 채, 천사의 날개 사이로 떠오른 작은 태양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나의 가녀린 손가락이 성유물 끄트머리에 떠 있는 보름달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차갑지 않았다.
태양이 뜨겁지 않았듯이.
“……세라피카 언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향한 곳엔 그녀의 동생이 서 있었다.
“우리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합당한 의문이었다.
교황들은 아직 스스로의 목숨값조차 전부 다 갚지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작별 연회를 베풀어주면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조한 것이 전부인데, 그 최대한의 편의조차 빛을 머금은 성수를 구할 때를 제외하고는 몇 번 쓰이지도 않았다.
목숨을 빚졌던 일마저 제대로 다 변제하지 못했는데, 성국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던 성유물까지 덜컥 받아버렸다. 이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성국이 무엇을 해주었다고, 플로레타와 루나가 무엇을 해주었다고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가? 귀빈께 라파엘라 성국이 대체 무엇이길래?
심지어는 무언가를 바라고 이 성유물을 건네준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냅다 밖으로 나가시더니, 몇 분만에 문을 열고 돌아오셔서는 찾을 게 있으니 같이 나가자고 말씀하셨으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루나 역시 제대로 대답하기란 불가능했다. 귀빈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서로를 잠시 마주보던 교황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신성력을 발휘했다. 소름이 끼칠만큼 맑고 투명한 신성력이 지팡이로 흘러들어가자, 태양빛과 달빛이 더 강해졌다.
백색광과 은색광이 어둠을 밀어내며 빛을 밝혔다.
“이걸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셨지.”
귀빈께서는 셀레네의 도움을 받아 제국으로 돌아가면서, 이건 다른 곳에 쓰지 말고 그냥 들고만 있으라 하셨다. 이걸로 이단을 잡는다거나 악마를 처치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플로레타와 루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의 속뜻은 그저 자신이 준 선물을 아껴달라는 의미임을. 직접 말하기는 부끄러우셨는지, 슬쩍 돌려서 말하신 것임을.
교황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당연히 그럴 텐데.”
둘은 각자의 빛을 내뿜는 성유물을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굳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더라도 소중히 간직하려 했다. 어느정도냐면, 자신의 목숨과 성유물 중에서 하나만을 골라야 할 때 망설임 없이 성유물을 고르리라 다짐했을 만큼.
플로레타와 루나가 손에 쥐자마자 교황들을 제 주인으로 인정한, 신께서 친히 그 사용법까지 알려주신 지팡이를 악마와 이단의 토벌에 사용하지 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은, 심지어 태양과 달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시는 귀빈조차도 이 지팡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실 것이다.
당연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태양께서 태양의 교황을 위해, 달께서 달의 교황을 위해 만든 성유물이니까.
교황들을 제외하고는 그 힘의 1%조차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다. 성유물로부터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지식으로 인해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귀빈이시라면 당연히 알고 계셨겠지, 에반젤리나?”
“반드시 그러셨을 거야, 언니. 응. 분명 그러셨을 거야.”
전지전능하신 귀빈이라면 분명 이 사실도 알고 계실 텐데, 자신의 선물을 아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걸 들고만 있으라고 말하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동안 태양빛과 달빛을 몽롱하게 쳐다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에반젤리나.”
“세라피카 언니.”
그리고, 상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눈치챘다는 듯 방긋 웃었다.
이렇게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은혜는 반드시, 평생을 바쳐서라도 갚아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여인이라면 이미 바쳤다. 성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여인들의 육신을 그분께 가져다드렸다.
어디 바쳤다 뿐이던가. 오히려 플로레타와 루나가 역으로 그 쾌락에 흠뻑 빠져서는 오랜만에 성국으로 찾아온 귀빈을 시도때도 없이 유혹하기까지 했다.
이래서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즐길 뿐인 꼴이다.
그렇다고 권력과 지위를 드리자니 귀빈께서는 그걸 원하시는 것도 아니어보였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 이단심판관과 이단심문관을 손에 넣고 성국 전체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평신도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또 몰라, 교황이 아님에도 태양과 달의 목소리를 들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앞다투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려 들 것이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는 건, 곧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매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언니, 나랑 생각 똑같지?”
“그럴거야.”
자매는 여전히 마음이 통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