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80)
r 180 – 치하 – 2
ㅡ우리 사이니까 그냥 편하게 쓸게. 잘 지내고 있지?
편지는 첫 문장부터 리제답다면 리제답게 시작하고 있었다. 편안함과 적당함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듯한 문체였다.
그리고 나도 이런 쪽이 더 좋았다. 격식을 차리는 온갖 미사여구로 시작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편지에 써진 그대로, 리제와 나 사이니까 말이다.
ㅡ편지로 마음 전하는 건 조금 오글거린다고 느껴져서 쓸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꼭 전해야 하는 일이 생겼지 뭐야.
‘꼭 전해야 하는 일?’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건가. 리제가 저런 표현을 쓸 정도라면 분명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뜻인데.
ㅡ나, 임신했어.
“쿨럭, 쿨럭! 케흑!”
“히익! 괘, 괜찮으세요?!”
나는 바로 밑에 적힌 짤막한 문장을 보자마자 사레가 들려서 격렬한 기침을 토해냈다.
마치 내장을 토해내는 것 같이 거칠기 짝이 없는 콜록콜록 소리에, 도리어 옆에 있던 닉스가 화들짝 놀라선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고사리같은 손이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ㅡ농담이야. 혹시 델타 네가 심각해질까봐 농담 좀 해봤는데, 어때?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거 참 더럽게 고맙네.”
방금 전의 격렬한 기침 탓에 찢어질 것 같은 폐를 부여잡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는 닉스의 손길과 함께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치졸한 장난을 걸어올 줄이야.
농담 두 번 했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ㅡ우린 멀쩡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도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돼. 여기 황궁인 거 알잖아. 사건 터질 일이 뭐가 있겠어? 애초에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그래서인데.
‘……하긴.’
설정상으로든 인게임상으로든, 제국 전체에서 가장 삼엄한 방비를 자랑하는 장소가 황궁이다.
게임 기준으로 곳곳에 함정을 겸하는 보호 마법진이 깔려 있는 걸로도 모자라, 보스급 기사 5명과 중간 보스급 기사 10명, 정예급 기사 수십 명에 일반 기사까지 백 단위로 깔린 곳이니까.
심지어는 황제 본인부터가 인간 사이에서 교황들과 미네르바랑 같이 한 손에 꼽힐 무력의 소유자이니, 그런 곳에서 사건이 터지기도 쉽지 않았다.
‘그 어려운 걸 해내는 놈이 둘이나 있긴 한데.’
하나는 인간 적대 루트나 생명 절멸 루트의 주인공이고, 다른 하나는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다.
그나마 후자는 플레이어의 행적에 따라서 빠르게 진압되기라도 하지, 전자는 사실상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ㅡ아,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좀 그렇긴 해. 너한테 기사단 절반 뜯긴 걔 있잖아. 걔 상태가 갈수록 안좋아지고 있거든. 요새는 우리 보고 아는 척도 안 하더라.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중인가보네.’
게임이랑 똑같이 흘러가고 있는지라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NPC는 게임에서도 열등감 덩어리인 성격이고.
처음 만났을 때는 제법 호탕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건 주인공한테 원래 성격을 드러낼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일 뿐이었다.
은빛 여명 기사단은 갈가리 찢겨서 자기 휘하에 흡수됐고 기사단장들은 제국 변방의 한직으로 내쫓겼는데, 고작 하급 기사에 불과한 주인공한테 옹졸하게 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ㅡ우리 애들이 그러는데, 금빛 황혼 기사단 분위기도 갈수록 최악이래. 하긴, 단장이 성질을 부려대는데 밑에 애들이 뭘 하겠어?
물론 호탕하게 굴어주는 건 많아봐야 세 번째 만남까지 한정이다.
플레이어가 착실히 은빛 여명 기사단 루트를 진행해서 슬슬 황제의 눈에 띄기 시작한다면, 그놈도 슬슬 본래 성격을 드러내면서 대놓고 플레이어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스토리 진행 조금 더 하고, 이벤트 트리거를 작동시키는 순간 열등감을 못 이겨서는 사고 하나를 거하게 쳐주면서 보스몹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ㅡ걔 하는 꼴 보면 조만간 칠흑 성야 기사단 규모가 두 배로 뛸지도 모르겠던데, 미리 증축이라도 해 두는 게 어때? 아, 그때 되면 델타 너도 황궁에서 근무하려나?
“…….”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ㅡ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게 델타 너한테 편지를 쓰게 된 진짜 이유야.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꼭 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꼭 전해야 하는 일, 이라는 단어를 보고 자세를 살짝 고쳐 앉았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는 의미다.
ㅡ아이리스는 또 어떻게 꼬신거야?
이건 또 뭔 소리지.
‘아이리스를 꼬셔? 내가?’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꾹꾹 눌러 쓴 티가 확연히 나는, 동글동글한 글씨체.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 적은 것이 분명하니 잘못 적은 것도 아니었다.
혹시 이것도 농담인가 싶어 다음 문장을 확인했다.
ㅡ내 남자지만 참 재주도 좋아. 응? 어떻게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 목석같은 애가 나한테 델타 널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고백을 지르도록 만들었을까?
불행하게도, 농담이라고 정정해주는 문장은 없었다. 편지를 읽어나가는 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ㅡ덕분에 우리도 난리야. 아이리스는 나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클라우디아는 이러다 네가 나까지 꼬시는 거 아니냐면서 웃어대고, 에리카는 네가 유혹해도 절대로 안 넘어갈테니 안심하라고 하던데.
‘왜 내가 꼬시는 게 전제인 거지?’
사고방식이 좀 이상하지 않나.
ㅡ그런데, 내가 보기엔 저런 말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그렇게 되더라고. 델타 너만 원한다면 에리카까지 꼬셔서 셋이서 해도 돼. 자매랑 동시에 하는 게 남자의 로망 아니야?
여기까지 읽은 나는 잠시 편지에서 눈을 뗐다.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전 문장이랑 온도 차이가 너무 컸다.
내가 이런 반응이자, 닉스는 또다시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해대며 내 눈치를 살펴댔다.
옆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라도 심신을 안정시켜야 할 듯 싶었다. 닉스는 방금 전까지 눈치를 살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헤헤 웃으면서 고롱거렸다.
‘……리제답다면 리제답다고 해야 하나.’
여전히 저런 쪽으로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성격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한테 자기 동생까지 꼬셔서 같이 3P 한 번 해보자고 권유하는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에리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문득 자매덮밥은 이미 성국에서 실컷 해봤다고 말하면 리제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해졌으나, 그냥 궁금증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었다.
ㅡ할 말은 많은데, 역시 편지로 쓰려니까 불편해서 안 되겠네.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알았지?
마무리는 의외로 정상적인 문장이다. 그 전까지가 전혀 정상적이지 않아서 문제였을 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반으로 두 번 접어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리스가 혼자서 지레 짐작하고 도망쳐버렸을 때 스텔라한테 부탁해서 잡아왔을 것이다. 설명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설마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겠냐 싶어서 내버려뒀건만, 설마가 또 사람을 잡아버렸다.
‘상황 참 이상하게 돌아가네.’
정작 당사자인 리제는 큰 타격이 없어 보이는데 어째 아이리스 혼자서만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미 한바탕 한 뒤라던가.
“저, 저기…… 괜찮으세요? 헤헤.”
손에 얼굴을 부벼대며 연신 고롱거리던 닉스가 나를 흘끗거렸다.
“글쎄, 뭐라고 딱 잘라 말해주기가 애매하네. 기사단 내부 일이라서 말이야, 미안.”
“헤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알겠어요.”
닉스는 다시 내게 달라붙어 음침하게 웃었다.
‘나중에 리제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아이리스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이미 한바탕 한 뒤라서 감정이 풀렸거나.
아마도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당장 자기가 여자 여럿 들이는 건 신경 안 쓴다고 말했을 뿐더러, 대놓고 자기 동생을 유혹하라는 말까지 편지에 적어놓았으니까.
‘제일 먼저 오해부터 풀어야 하려나.’
성에 편지지가 남아있던가를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단장님! 단장님!”
밖에서 누군가 문을 쿵쿵 두드려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티가 팍팍 났다. 라크시아의 목소릴였다..
“라크시아? 무슨 일 있어?”
“빨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는데?”
“황궁에서 치하의 의미라며 단장님께 뭘 잔뜩 보내왔는데ㅡ”
‘아.’
그제서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카이킬리아의 칙서가 떠올랐다. 악마를 처치했으니 그 공을 치하하겠다던 내용의 칙서 말이다.
‘……그게 지금 도착했다고?’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이제 성에 더 보관할 공간도 없을 텐데,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며 라크시아의 뒤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안녕! 델타!”
“……리제?”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서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리제를 발견했다.
갑옷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은빛 여명 기사단의 정복 차림이었다. 얇디 얇은 흰 민소매 너머로 손을 흔드는 움직임에 맞춰 가슴도 연신 움직여댔다.
리제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흉부가 격렬하게 흔들렸다가 곧 원래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돌핀팬츠 밑에 감춰진, 터질 듯한 엉덩이와 허벅지도 여전했다.
“편지는 잘 받았어?”
“받긴 했는데…… 어떻게 벌써 온 거야? 받은 지 10분도 안된 것 같은데.”
“응? 그거야 일부러 내가 그렇게 도착하도록 보냈으니까.”
“일부러 그랬다고?”
내가 되묻자, 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가는 시간 감안해서, 나 도착하기 20분쯤 전에 도착하도록 해놨지. 너 놀래주려고 그런 건데, 어때? 감동받았어?”
“……감동은 모르겠고, 놀라기는 했다.”
“그러면 목적은 달성한 거네!”
리제가 뛰어내린 마차 뒤로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쌍두 마차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숫자를 세어보았다. 리제가 타고 있던 걸 포함해서 정확히 10대였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같을 수 있지.
우리는 단체로 멍한 얼굴을 했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또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라크시아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선물을 받은 쪽이 이런 반응이니, 리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 창고로 데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기라도 할 듯이 넘쳐흐르는 보물들을 본 리제가 나랑 똑같은 얼굴을 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뭔가 점점 더 많아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어…… 이게 다 뭐야?”
“성국에서 받았던 것들. 그것도 리제 네가 도착하기 6시간쯤 전에.”
“성국에서 받았다고? 왜?”
“……그럴 사정이 있었어.”
“흐으으음…….”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던 리제가, 알았다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ㅡ찰칵.
창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