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84)
r 184 – 페치 – 2
“아,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요!”
우리는 마차를 탄 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페치가 말한 유적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잔뜩 신나보이는 모습의 페치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내가 비척비척 그 뒤를 따랐다.
‘……말 진짜 더럽게 많네.’
내 기운을 빼려고 일부러 그랬던 건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런 건지. 페치는 여기로 오는 내내 조금도 쉬지 않고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왜 그렇게 말이 많냐고 물어보니 하도 혼자서 돌아다니다 보니까 어떻게든 안 심심하려고 생긴 직업병 같은 거라던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말 지긋지긋할 만큼 말이 많았다.
마차가 떠나간 뒤,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자 페치가 이쪽이라는 손짓을 하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리제는 잘 따라오고 있으려나.’
쉬지도 못하고 꼬박 하루 동안 따라오게 만들어서 미안하긴 했지만, 본인이 그 정도는 애들 장난 수준이라고 말했으니 아마 괜찮을 것이다.
닉스야 한참 뒤에 순간이동으로 따라붙을 테고.
“이곳이에요!”
페치는 산 속을 거의 2시간이나 걸어간 다음에야 발을 멈췄다.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안그래도 나무가 빽빽이 우거졌는데, 주위는 또 바위더미와 잡초들이 절묘하게 가려서 이 너머가 유적 입구라는 사실을 알고 봐도 눈치채기 힘들었다.
특히 나는 게임에서 지겹도록 들렀던 장소였는데도 더 그랬다. 보물이 가득할지도 모를 장소라고 정말 엄청나게 공들여서 숨겨놨구나 싶었다.
“아! 잠시만요! 함정부터 해제하구요!”
바위를 모두 치우자, 얇은 팔이 나를 막아서더니 먼저 유적 입구로 향했다. 허리를 숙이려던 페치는 뒤를 돌아보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없을 때 다른 누군가가 먼저 털어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예요.”
유적 입구에 설치된 것은 페치가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으려고 설치해 둔 함정이었다.
게임에서는 저렇게 솔선수범을 해줄 리 없으니 플레이어가 직접 함정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유적 들어가려다가 함정에 걸려서 입구컷 당하고 씩씩대며 돌아와 페치를 죽여버린 사람도 제법 있었다.
한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수 만든 함정을 해체하던 페치는, 작업이 다 끝났는지 화사한 웃음과 함께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됐어요! 들어가죠!”
걸음을 옮기다가, 페치가 등을 돌린 틈을 타서 작은 스크롤 하나를 떨어뜨렸다. 내 몸에서 일정 시간 이상 떨어져 있으면 닉스에게 현재 좌표를 전송하도록 마법진이 짜여진 스크롤이었다.
이제 닉스도 여기로 찾아올 수 있을 거다. 리제는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중일 테고.
유적 내부로 들어갔다. 게임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넓은 공간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던전이 아니라 유적이라고 불리는 장소답게, 인공적으로 건설됐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페치를 슬쩍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백만 골드 짜리 유적이라기엔 너무 텅 비어있지 않나?”
“에이, 여기는 제가 진작 다 털어먹었죠! 발견자가 저인데 그대로 내버려두면 쓰나요? 어차피 여기는 극히 일부고, 안쪽으로 공간은 한참 더 있거든요!”
거짓말이다. 플레이어가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 여긴 처음부터 이런 휑한 모습이었다고 자기 입으로 술술 털어놓는다.
뭐, 정말로 보물이 있었다면 저 말마따나 진작 다 털어먹었겠지만.
안쪽으로 더 내려갔다. 날 등쳐먹을 생각에 흥을 주체할 수가 없는지, 페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호구 하나 거하게 낚았다고 생각하는 중일 테니 당연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페치가 안쪽 방의 입구를 가리켰다.
“다 왔어요! 저 문 보이시죠? 저거에요!”
내 키와 비슷한 높이에 사람 두 명쯤은 같이 설 수 있을법한 폭을 지닌 입구 너머로, 안쪽에 줄줄이 늘어선 보물 상자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금박이 씌워져 있는 데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상자들이었다.
“저기부터 제가 탐사 못 한 곳이에요! 저 상자들 보이시죠? 딱 봐도 화려한 게 뭐가 잔뜩 들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분명 네가 안 건드리고 놔둔 이유가 있겠지?”
“있긴 한데, 음…… 말로 설명하긴 애매하니까,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가서 확인하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회피하면서 은근슬쩍 방으로 끌어들인다 이건가.
페치는 앞장서서 입구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에 버티고 선 페치가 조금 떨어진 자리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지금부터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좀 더 가까이 와서 보세요.”
자신은 입구 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나를 안쪽으로 유도하는 페치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 굉장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장단을 맞춰줬다. 상자 바로 옆으로 다가가자, 페치가 입을 열어 뭔가 쓸데없는 정보를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정보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페치의 모습을 확인했다.
입으로는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면서 발을 문 쪽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정말 집중해서 확인하지 않는다면 움직인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말 조금이었다.
내가 상자에 집중하는 틈을 노려서 자기 혼자 재빨리 빠져나간 다음, 입구를 닫아버릴 생각이겠지. 나는 페치가 본색을 드러내길 조용히 기다렸다.
“……그래서, 이게 함정이라는 거예요. 여기, 이 표시 보이시죠? 저 옆의 상자랑 비교해봐요.”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나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페치의 말에, 슬슬 각을 보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점점 멀어지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방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분홍색 트윈테일이 바깥으로 사라진 직후에,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내려와 문을 막아버렸다.
“하하하핫!”
페치는 그 쇠창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같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쇠창살로 걸어갔다.
“갑자기 뭐야?”
“뭐긴! 나한테 속은 거지! 넌 이제 끝이야!”
본색을 드러낸 페치는 존댓말조차 쓰지 않았다. 방금 낚아올린 먹잇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 같은 병신 머저리들을 위한 함정인데, 마음에 들어해주려나 모르겠네. 돈에 미쳐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병신 머저리. 딱 너잖아? 안 그래? 뭐, 무욕한 나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게임이랑 똑같이 말하네.’
무욕이라는 단어를 듣고 웃음을 참지 못한 내가 실소를 흘렸다. 그걸 본 페치의 안색이 한층 더 야비해졌다.
“하, 웃어?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도 몰라?”
“내 처지? 뭐 어때서?”
자신에게 속아서 함정에 빠졌음에도 태연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페치는 잠시 눈가를 씰룩이더니 코웃음을 쳤다.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본데, 한번 해보든가. 여태까지 그 방에서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거든? 너도 마찬가지다 이 말씀이야!”
“그 말 들으니까 걱정이 더 안 되는데.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은 지금부터 생길거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잖아. 소설도 안 보고 사나 봐?”
그리고 여기서는 내가 그 선례를 만들 예정이지.
이런 내 말이 허세라고 생각한 듯, 페치는 배까지 부여잡으며 깔깔 웃어댔다. 한참을 웃은 페치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너같은 말을 했던 놈이 없었는 줄 알아? 그런데 있지. 그 말 했던 놈, 여기서 굶어죽었다? 나중에는 나한테 제발 꺼내달라고 애원하던데, 절대로 안 꺼내줬거든? 너도 똑같이 될 거야.”
“글쎄. 아마 아닐걸.”
“멋대로 생각해.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인데 생각 정도는 자유롭게 해야지. 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중에 다시 찾아왔을 때 죽어있으면 걸치고 있는 건 다 벗겨서 팔아줄게!”
페치가 손까지 흔들어주면서 떠나가자, 나는 화려한 보물 상자들과 함께 방 안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곳에 놓인 상자의 숫자는 정확히 13개였다. 입구를 기준으로 좌우 벽을 따라서 6개씩, 그리고 입구와는 정반대편의 벽에 제일 크고 제일 화려한 상자가 하나.
보물 상자들은 전부 다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척 보기에도 안에 보물이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댔고, 분명 그랬을 것이다.
미믹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반응이 뭐 그따구야?’
페치는 유적을 빠져나가며 안에 갇힌 남자를 속으로 마구 욕하고 있었다. 울고불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이쪽을 비웃을 게 대체 뭐람?
덕분에 보는 맛도 없어서 원래 준비해뒀던 대사도 제대로 못 치고 나와버렸다. 괜히 또 열이 뻗치게 만드는 요소였다. 보물 상자들 중에 미믹이 있으니 한번 잘 골라보라고 하려 했었건만.
바로 전 순서에 갇혔던 여자는 자기가 속았다는 걸 알자마자 울고불고 애원하면서 제발 꺼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키는 맛이 있었다.
뭐, 결국에는 미믹한테 먹혀서 죽어버렸지만.
‘이제 몇 명이나 더 들여보내야 하려나?’
페치 자신조차 그 유적을 모두 탐사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진실이었다.
방에 놓인 상자들 가운데 미믹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진짜 보물이 든 상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괜히 잘못된 걸 열었다가 미믹한테 먹히기는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여기로 끌고 와 가둬놓고, 진짜 상자를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갇힌 놈이 성공한다면 굶어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물이랑 가진 물건을 꺼내가고, 실패하면 지금껏 했던 것처럼 새로 데려오면 된다.
저 남자는 여섯 번째였다.
보통은 말로 낚아서 데려오는데, 설마 저렇게 지도를 대뜸 사버리는 인간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뭐가 있을지도 모를 종이 쪼가리 한 장에 백만 골드를 쓰다니,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래도 앞뒤 구분 정도는 하겠지? 설마 그 정도 지능도 없으려고.’
사람들이 먹혀 죽은 상자 앞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는데, 핏자국을 일부러 살짝 덜 지워놓았다. 혹시라도 같은 상자를 여는 불상사가 없도록 말이다.
‘뭐,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실수하더라도 한 번은 봐줄까.’
페치는 가방 안에 들어찬 백만 골드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백만 골드라면 몇 달은 펑펑 놀고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사치를 좀 부려도 될 듯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적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분명 들어갈 땐 2명이었는데, 왜 나올 때는 1명뿐이야? 그것 참 이상하네.”
멈칫, 유적 입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누군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에, 들어본 적 있는 여자의 목소리.
“당신은…….”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았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라는 단정한 정복 차림. 가릴 곳은 전부 가린 정복으로도 전혀 숨겨지지 않는 크기의 거유와 모난 곳 하나 없는 몸매.
저 안에 가둔, 흑발 남자의 옆에 붙어있던 여자다.
페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키가 더 작은 쪽은 보이지 않았다. 놓고 왔든, 아니면 숨어 있든. 둘 중 하나이리라.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일단 존댓말로 먼저 상황 파악을 시도했다. 저 여자가 어디까지 눈치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순히 남자를 찾아 따라온거라면 말로 잘 꼬드겨서 돌려보내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죽여야겠지.
“어떻게 오긴, 너 잡으러 왔지.”
“……네?”
푸른 머리의 여자가 씨익 웃었다.
“다 알고 왔다는 뜻이야, 이 사기꾼아. 너 지금, 내 남자한테 사기 쳐서 저 안에 가둬놨잖아.”
“…….”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내숭을 떨 필요는 없다. 페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아마 여기로 오기 전에 뭔가 당부를 해뒀든가 그랬을 것이다. 함정에 빠졌는데도 의기양양했던 이유가 그래서였나. 저 여자가 구하러 올 걸 알아서?
‘아, 그러면 되겠네.’
페치는 히죽 웃었다.
저 여자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죽이고 목을 잘라서 던져주면 된다. 그러면 그 놈도 자기가 믿던 구석이 박살났다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처럼 절망 가득한 얼굴을 할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여길 빠져나가려면 저 여자를 처리해야 했으니 일석이조였다.
가방을 땅에 내려놓은 페치가 코트까지 벗어 곱게 개어놓았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평소에 무기를 쓸 일이 있으면 애용하던 검이었다.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 전에 죽여서.
“뭐야, 나랑 싸우려고? 귀찮게 굴지 말고 그냥 항복하지?”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상대방이 무기를 꺼내든 모습을 보고도 저런다면 둘 중 하나였다. 자기 실력도 제대로 모르는 햇병아리. 혹은 닳고 닳아서 규격 외인 강자.
하지만, 저 끝장나는 몸매로 미루어보아 규격 외의 강자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저 터무니없는 크기의 가슴을 달고 어떻게 제대로 움직이겠는가. 자고로 날렵하게 움직이려면 몸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는 법이다.
“목격자는 죽여야지. 어차피 이대로 곱게 보내주지도 않을 테고.”
“뭐야, 잘 아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어.”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먼저 들어오라는 뜻이다. 보아하니, 페치가 상인이라고 깔보는 모양이었다. 무기조차 빼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딱 좋네.’
페치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죽는지 정도는 지겹도록 해봐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여자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반응조차 못 했는지, 여자는 페치가 칼을 찌르려는 그 순간까지도 무기에 손조차 얹지 않은 상태였다.
‘잘 가, 멍청아!’
그 목젖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었다.
칼 끝이 여자의 목젖을 정확히 꿰뚫었다.
“……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
여자가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채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페치가 제자리에 우뚝 굳었다. 여자가 혀를 쯧쯧 찼다.
“겨우 이런 실력으로 날 죽인다느니 어쩌니 한 거였어? 한심하네.”
페치는 칼을 뽑으려 했다. 칼날을 맨손으로 잡고 있으니, 검을 뽑는다면 상처 입는 것은 오히려 저 여자 쪽이다.
“이익…… 익……!”
하지만, 칼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고, 돌려도 보고, 옆으로 움직여도 봤지만, 여자의 손에 붙잡힌 칼은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다.
그 말인 즉, 페치와 저 여자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힘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칼을 뽑기는커녕 움직이게 하는 일조차 불가능할 만큼.
‘젠장!’
다른 귀족 도련님들처럼 얼굴 반반한 년으로다가 경호원 겸 좆집으로 쓰는 줄 알았더니, 실력까지 빵빵한 여자로 구한 거였나?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필사적으로 칼을 뽑아내려 바둥거리는 페치의 모습을 보고, 여자가 한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충고 하나만 해줄게.”
“그런 거 필요 없ㅡ”
“날 찌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하나 뿐이야.”
여자가 팔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페치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 페치는 땅에 닿기 전에 재빨리 위아래를 뒤집고, 다리를 굽히며 안착했다.
곧장 머리를 들었다. 설마 바로 공격해오나?
“……!”
아니었다. 여자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페치가 쓰던 칼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칼 끝을, 오른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붙잡은 여자가, 그대로 힘을 주었다.
ㅡ끼기기긱!
‘저 미친 여자가……!’
페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칼이 무슨 엿가락처럼 휘기 시작하더니, 손잡이 끝과 칼 끝이 맞닿은 것이다. 가운데가 반으로 접힌 칼은 정확히 1/2 길이로 줄어들어 있었다.
‘강철 검을…… 힘으로 접었다고?’
여자는 1/2 길이로 줄어든 검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졌다. 쨍강, 하고. 애처로운 쇳소리가 유적에 울려퍼졌다. 페치가 주춤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강철로 이루어진 장검을 무슨 케이크 먹듯이 손쉽게 접어버린 푸른 머리의 여자가, 여전히 무기를 들지 않은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 죽인다며. 안 덤비고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