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06)
r 206 – 악을 인도하는 루시퍼 – 1
“아무것도 없네요.”
“실로 그러하다.”
성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라면 왕을 지키기 위해 평소보다 한층 더 흉폭하게 덤벼드는 악마들을 힘겹게 처치하면서 나아가야 했을 텐데 말이다.
주변이 텅 비어있는지라 날개 잃은 악몽을 손에 쥐기만 한 채로 걷는 중인 나와는 달리, 카이킬리아는 복도 양 옆에 장식된 악마 조각상을 눈에 띄는 족족 박살내면서 걷고 있었다.
정체 모를 물질로 정교하게 조각된 악마상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한때 조각상이었던 파편과 먼지 무더기들이 우리가 지나온 길 뒤로 수북하게 쌓였다.
‘……그놈 조각상은 없네.’
혹시나 싶어 카이킬리아가 부수기 전에 한 발 먼저 조각상을 살펴봤는데, 검투사 악마의 성 내부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세계를 먹는 자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만약 그놈의 조각상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면 악마들이 루시퍼 대신 그놈을 숭배하게 됐구나 생각하기라도 할텐데, 여태껏 발견한 것이라곤 성 지하에 있던 1개뿐이었으니까.
“참으로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장소구나.”
철벅, 카이킬리아의 가죽 부츠가 검붉은색의 피로 이루어진 길을 밟았다. 성문 바로 앞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길이었다.
피로 이루어진 길은 마치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복도 저편으로 쭉 뻗어 있었다. 대체 얼마나 길게 이어졌는지 여태껏 제법 걸어들어왔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내 기억 속의 최종 보스로 가는 루트 그대로였으니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렇지.
“델타. 너의 지식 속에는 이러한 것이 있었느냐?”
“……아닙니다, 폐하.”
“그러리라 예상하였다. 만약 이것이 너의 지식 속에 존재하던 모습이라면 그토록 심란한 표정을 하였을 리 없지 않느냐. 네가 여에게 대답해야 할 내용은 하나뿐이노라. 이것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예. 이것을 따라가면 그놈의 거처가 나온다는 사실만은 틀림 없습니다.”
“되었다. 이것이 맞는 길이라면 그걸로 족하노라. 그것에게 질문할 것이 있다 하지 않았더냐. 더 이른 시간에 만난다면 더 일찍 죽일 수 있으니 좋은 일에 불과하다.”
피로 이루어진 길은 한참을 더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고, 모퉁이를 몇 번씩이나 돈 이후에야 성 내부로 이어지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핏자국 역시 정확히 성 내부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끝나 있었다. 핏자국을 남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도는 명백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남았다 하였느냐.”
“이제 외성을 벗어났으니까요. 악마들의 왕이 거주하는 내성은 따로 있습니다.”
“꼴에 왕을 참칭한답시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건물을 지어놓았구나. 역겹기 짝이 없다.”
“내성은 여기만큼 크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문 너머에 있는 정원 비스무리한 공간을 지난 다음에 조금만 걸어들어가도 바로 DLC 최종 보스가 자리잡은 내성에 진입할 수 있다.
일단 확답을 받은 카이킬리아에게 망설임이란 없었다. 환한 빛을 내뿜는 검이 문을 반토박내버렸다.
부서진 문 사이로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이 풍겨져왔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확 찌푸려질만큼 지독한 피냄새였다. 성검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것은…….”
카이킬리아의 의문 섞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중간 보스전을 치르기 위해 뻥 뚫린 공터였어야 할 장소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걸을만한 길만을 남긴 채 온 사방이 죽어 나자빠진 악마들의 시체로 메워져 있었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악마들의 시체가 성벽만큼 높게 쌓여있을 지경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들의 왕을 지켜야 할 악마는 죽어 있고, 그 시체는 중간 보스전을 치러야 할 공터에 산처럼 쌓여 있고, 그 피는 우리 둘을 인도하는 길이 되어 흘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시체의 산 중 하나에 다가간 카이킬리아가 성검으로 그걸 쿡 찔렀다.
성검 근처의 악마 시체가 신성한 빛으로 정화되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체산은 잠시 휘청였다가 그 압도적인 질량 탓에 어렵지 않게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놈들의 시체가 확실하다. 헛것이나 환상은 아닌 듯하구나.”
“그건 알겠습니다만,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성의 악마들을 죄다 끌어모아도 최종 보스 1명보다 약할만큼 힘의 차이가 확고하다 해도, 차라리 고기방패로라도 쓰는 쪽이 이런 무의미한 학살보다는 훨씬 이득일 것이다.
우리 쪽의 체력을 소모시킬 수 있을 테고, 잘만 하면 피해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의 생각을 추측해 무엇하겠느냐. 신경 끄거라.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되느니라.”
카이킬리아가 흙 위로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한 사람분의 무게가 실린 가죽 부츠는 마치 진흙이라도 밟은 것처럼 땅 아래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피 때문에 모래가 진흙처럼 변해버린 탓이었다.
부츠 아랫 부분의 절반 가량이 잠긴 사실을 확인한 카이킬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뺐다. 성검의 효과인지 가죽 부츠는 여전히 티끌 하나 묻지 않고 멀쩡했다.
“허나, 이대로는 움직임에 지장이 있을 터.”
말을 마친 카이킬리아의 오른손이 머리 위로 들어올려졌다. 그 칼 끝에 태양빛이 모여들었다. 제 주인이 팔을 아래로 휘두름과 동시에 성검에 모였던 태양빛이 정원을 갈랐다.
빛이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장막이 치솟아올랐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커튼이 내려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황금색 빛의 장막은 그대로 잠시 멈춰 있다가, 천천히 좌우로 넓어졌다. 장막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피와 살점이 정화되어 불타 사라졌다.
가죽 부츠가 한순간에 바싹 말라버린 흙먼지 위로 내딛어졌다. 이번에는 땅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카이킬리아는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했다.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우리가 이 장소에 발을 들인 그 순간에도 빛의 장막은 끊임없이 놈들의 시체를 정화하며 가장자리를 향해 넓어지고 있었다.
이내 시체의 산은 한 줌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코를 찌르던 피비린내도 마찬가지였다.
시체들이 사라지자, 피와 살점으로 감춰져 있던 내성의 입구가 드러났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드디어 그 같잖은 면상을 보겠구나. 참으로 잘되었다.”
안쪽은 제법 깨끗했다. 바깥은 피투성이에 시체투성이였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원래 존재했어야 했던 것조차도.
내 기억 속의 루시퍼 보스룸 입구는 온갖 악마들의 조각상이 양 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 몇 개. 그것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ㅡ끼기기긱!
우리가 안으로 몇 발자국 더 들어오자마자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카이킬리아는 그 사실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눈은 이미 악마왕에게 고정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손에 들린 성검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ㅡ환영하겠다. 인간.
내성 전체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악을 인도하는 루시퍼’라는 별명치곤 제법 아담해서 내 키와 비슷할 성 싶은 악마가, 계단 위의 옥좌에 거만한 자세로 걸터앉아서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 전체를 이상한 붉은색의 나무 뿌리가 뒤덮었고, 그 탓에 오른쪽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눈 이외의 모든 신체 부위는 전부 다 붉은색 나무 뿌리로 뒤덮인 상태였다.
“감히 황제 앞에서 그리도 거만한 모습을 하고 있더냐.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지 모르겠으나, 그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카이킬리아가 성검을 겨누었다. 악마라는 종족에게 극독이나 다름없는 성검이 겨누어졌음에도, 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ㅡ거짓된 신의 비호를 받는 자여.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성검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카이킬리아를 깔끔하게 무시해버린 루시퍼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앞에서 악마에게 무시당한 카이킬리아가 눈이 뒤집히다시피 해서는 성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내가 손으로 제지하자 우뚝 동작을 멈췄다.
서로의 직위를 생각하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음에도, 카이킬리아는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칼 끝을 내렸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분노로 가득 들어찬 채였다.
“……거짓된 신의 비호를 받아? 그게 대체 무슨 의민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또 뭐고?”
지금 당장 나한테 덤빌 기색은 없어보였으니, 일단 최대한 대화라도 시도해 볼 예정이었다. 저건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ㅡ말 그대로의 의미다.
놈은 할 말을 끝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만으로도 근처의 공간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컷신에서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대화가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자기 할 말만 하고 끝인가. 시간이 없었다. 나는 카이킬리아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폐하, 제가 말했던 그 상황입니다.”
“알고 있노라. 저것이 여를 데려간다면 같이 싸우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 혹은 여, 둘 중 하나만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지 않았더냐.”
“예. 저 모습으로 보아…… 끌려가는 것은 아마 제가 될 듯합니다.”
공간의 일그러짐이 점차 커져갔다. 이제는 우리 둘을, 정확히는 나만을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카이킬리아의 주변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 저것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거늘.”
카이킬리아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성검 뽑았을 때 공격하도록 내버려 둘걸 그랬나 싶었지만, 그때는 나도 저놈이 이렇게 자기 할 말만 끝내고 덤벼들 줄은 전혀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폐하의 몫까지 제가 갚아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저놈이 죽을 때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도 모두 알려드리도록 하죠.”
그 속뜻을 알아챈 카이킬리아가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이긴 후의 일을 생각하느냐. 참으로 시건방진 신하가 아닐 수 없다. 다녀오거라.”
그 말이 아슬아슬하게 끝마쳐진 그 즉시, 붉은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어느새 지옥이라는 장소가 정확히 어울리는, 바깥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생겨먹은 장소로 이동해 있었다.
근처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의 강이 흐르고, 하늘에는 피처럼 붉고 둥그런 물체가 두 개나 떠 있는 그런 공간. 어째 공기부터 후덥지근한 기분이었다.
역시 카이킬리아는 없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ㅡ나는 너에게 성의를 보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개 잃은 악몽을 겨누었다. 금색과 은색이 반씩 섞인 칼날에서 신성한 빛이 흘러나왔다.
루시퍼는 하나밖에 드러나지 않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성의?”
ㅡ내게 오는 길을 청소해 두었다.
“……그게 진짜로 그쪽 작품이었다고?”
ㅡ그것이 내 성의다.
말이 안 통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에선 이 공간으로 플레이어가 전이되는 즉시 덤벼들지만, 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팔을 양 옆으로 활짝 펼치고선 무슨 설교를 하듯이 떠벌려대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자기 할 말만 일방적으로 떠드는 거였다. 답이 없는 녀석이었다.
ㅡ내가 성의를 보였으니, 네가 믿음을 보일 차례다.
놈의 눈이 부릅떠졌다.
ㅡ거짓된 역사. 거짓된 믿음. 거짓된 신. 어느 하나 진실인 것이 없지. 나는 눈을 떴다. 너도 이제 진실된 신을 섬겨라.
“…….”
플로레타는 태양의 대성당 안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귀빈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그리고 신께서 귀빈을 지키지 못한 플로레타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잠 한번 들지 않았다. 이단심판관에게는 태양의 대성당에 당분간 접근하지 말라고도 말해두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슬픔을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기에.
“태양의 교황 성하. 잠시 괜찮으실까요?”
플로레타의 귀에 이단심판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제가 당분간 태양의 대성당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명하지 않았는지요, 이단심판관?”
“알아요. 하지만, 이건 교황 성하께서 꼭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무엇이십니까.”
푸르른 녹안이 살짝 떠졌다. 그 이단심판관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무척이나 중요한 사항일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400년 전에 성기사였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났는데, 그 여자가 귀빈님께 가는 방법을 알고 있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