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22)
r 222 – 인간 비늘룡
설산 분화구 밑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 ‘인간 비늘룡’이 사람의 혈압을 올리도록 만드는 요소를 꼽아보라면 단연 첫 손가락으로 상태 이상 ‘빙결’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설산 DLC의 최종 보스인 데다 눈처럼 흰 비늘을 가진 드래곤답게, 모든 공격이 빙결 게이지를 채웠으니까.
브레스는 맞으면 상태 이상이 확정적으로 걸린다고 봐도 좋은데다, 심지어는 누가 봐도 물리 공격인 내려찍기나 꼬리 휘두르기마저 빙결 게이지를 쌓는다.
그것까지는 어차피 스치기만 해도 죽는 닼라 모드 특성상 안 맞으면 된다 치고 넘어가더라도, 제일 큰 문제는 바닥에 빙결 장판을 깔아버리는 패턴이었다.
툭하면 브레스를 내뿜어 바닥에 30초간 지속되는 빙결 지대를 형성하는데, 그 위에 있으면 빙결 게이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올라가는 것은 물론 독늪처럼 걷기와 구르기가 제한된다.
즉, 인간 비늘룡을 상대할 때는 거의 항상 빙결의 디버프인 ‘이동 속도 감소, 스태미너 자연 회복량 감소, 전투 피로 자연 회복량 감소, 구르기와 회피 속도 감소’를 달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바닐라에서 그 정도인데, 장판 공격의 지속 시간이 늘어나고 선후딜이 모두 줄어드는 닼라 모드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적을 강화시키는 버프라면 몰라, 아군을 약화시키는 버프인지라 당하는 입장에서 기분이 매우 더러운 건 덤이었고 말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ㅡ쿠오오오오오오오!!!!!!
인간 비늘룡이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설산이 떠나가라 내지른 포효 소리에, 놈의 비늘에 달려 있던 시체들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흩어졌다.
미네르바는 포효를 듣고도 태연하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얼음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염 지대가 분화구 전체를 뒤덮으며 온 사방에 깔렸던 눈과 얼음을 물로 바꾸었다.
ㅡ쿠아아악!!!!!!
놈이 다시 한번 포효를 지르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숨결이 미네르바를 향해 뻗어나갔다. 근처의 모든 것이 얼어붙으며 이상한 일렁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지팡이를 까딱이자, 분화구 바닥을 뒤덮었던 불꽃이 마치 보호막처럼 솟아올라 미네르바를 감쌌다.
브레스는 화염을 뚫지 못했다.
‘저게 되네.’
제국의 황제, 그리고 성국의 교황들과 함께 인간 사이에서 최강자 라인으로 꼽히는 영원의 마법사다웠다.
드래곤 역시 걸어다니는 자연재해나 다를 바 없다고 묘사되는데, 그런 존재를 정면에서 압도하고 있다니 말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듯했다.
브레스가 사그라들었다. 화염이 꺼지자 그 안에서 멀쩡한 모습의 미네르바가 나타났다. 지팡이가 다시 흔들렸다.
허공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떠오르고, 화염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튀어나와 인간 비늘룡의 몸 곳곳을 휘감았다. 휘감긴 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슬의 온도 자체도 보통이 아닌 듯, 화염 근처의 시체는 얼음이 녹는 것도 아니고 아예 불타 없어져버리고 있었다.
“자, 얌전히 있으렴.”
미네르바가 손가락을 튕겼다. 화염 사슬이 한층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선 휘감긴 자리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놈을 단단히 옭죄었다.
인간 비늘룡은 열심히 울부짖으며 사슬을 끊으려 발버둥쳤지만, 드래곤이 아니라 돼지라고 불러도 믿을 수준의 몸뚱아리로는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온 미네르바가 싱긋 웃어보였다.
“이것이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려 했던 마법이란다. 마침 잘 되었구나. 실전 테스트를 겸해서 아이에게 보여주면 될 터이니.”
미네르바가 손가락을 튕겼다. 드래곤의 가슴 부근에서 공간이 한 점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놈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임을 알아차렸는지 발버둥을 멈췄다. 그리고는 분화구 위로 펼쳐진 하늘을 쳐다보며 기나긴 포효를 내질렀다.
동시에, 비늘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인간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몸통이 점차 홀쭉해져갔다.
‘2페이즈?’
2페이즈에 진입했다는 의미였다.
1페이즈는 마치 돼지같은 몰골이지만, 2페이즈부터는 본격적으로 드래곤의 형상을 갖추며 날아다니는 패턴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이내 놈의 몸이 완벽한 드래곤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시체가 모두 떨어져나가자 눈처럼 흰 순백색 비늘이 나타났다. 떨어진 시체들이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방금 전보다는 낫구나.”
그런데 미네르바에겐 별 의미가 없는 듯했다. 놈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에도, 몸을 칭칭 묶어두고 있는 화염 사슬은 도통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사슬이 멀쩡하자, 인간 비늘룡은 하늘로 날아올라 시도해보려는 건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화염으로 휘감긴 날개가 양 옆으로 펼쳐지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놈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ㅡ철푸덕!
정확히는, 날아오르려 했다.
화염 사슬은 드래곤이 온 힘을 다해 비상하는 힘마저 거뜬히 버텨냈고, 놈은 사슬이 끊어지지 않자 얼마 뜨지도 못하고 철푸덕! 하는 소리까지 내며 꼴사납게 추락했다.
분화구 전체가 흔들리며 눈 덮인 바닥에 균열이 생겨났다. 드래곤은 머리부터 땅에 처박힌 충격이 컸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음…… 아직 완전하진 않구나. 개량이 필요하겠는걸. 막상 실전에서는 발동 속도가 너무 느려.”
그리고, 드래곤을 저런 꼴로 만들어버린 당사자는 발동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아주 태연하게 고칠 점을 끄적이는 중이었다.
“그래도 발동 속도만 고치면 쓸만하게 되겠구나. 오랜만에 조금 바빠지겠는걸. 아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잘 지켜보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결실이란다.”
뭔가 미묘하게 어울리는 듯하면서 안 어울리는 표현과 함께, 드래곤의 중심에 생겨났던 소용돌이 구체가 자신의 근처를 모조리 갈아버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소용돌이 내부로 빨려들어가는 것까지 게임이랑 똑같았다. 미네르바에게 스크롤을 가져다주면 추가되는 패턴 중 하나인 즉사기였다.
ㅡ쿠오오오오오오오!!!!!!
마지막으로 크게 울부짖은 인간 비늘룡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놈의 가슴 근처로 서서히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조금씩 몸을 들썩이기만 할 뿐, 움직일 기색은 전혀 없었다.
브닼 4의 DLC 보스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것치고는, 보는 내가 다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최후였다.
“아이야!”
고대의 스크롤로 연구해 낸 마법이 성공적이었단 사실에 잔뜩 흥분했는지, 체통이건 뭐건 모조리 내팽개친 미네르바가 방방 뛰며 달려왔다.
목욕 가운 한 장으로 감싸인 가슴이 어마어마하게 출렁여댔다. 허벅지 사이가 벌어져 그 안의 속옷이 드러나기 직전이었다.
“어땠니? 어땠니? 응? 응?”
미네르바는 자기 옷차림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100점 시험지를 엄마한테 자랑하러 온 어린아이처럼 은백색 동공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손을 붙잡았다.
“어…… 엄청 대단하네요?”
“그렇지? 아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커흡.”
무척이나 형식적인 칭찬이었건만, 칭찬을 해줬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지 미네르바는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얼굴이 가슴골 사이에 푹 파묻혔다. 가슴 특유의 온기와 달콤한 우유 냄새가 비강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약간이지만 상큼한 레몬 냄새도 같이.
그렇게 자기 가슴 사이에 내 머리를 끼우고 한참을 방방 뛰며 좋아하던 미네르바는, 그 상태로 족히 10분이 지나고서야 팔을 풀었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이와 나, 이렇게 둘이서 함께 만든 결실이잖니. 좋아하는 게 당연하단다.”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건가?’
내가 떨떠름하게 있으려니, 미네르바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이 다음에 할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일단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긴 했지만…… 정말 괜찮겠니?”
“제가 말한 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요.”
“예전에도 그랬듯이…… 알았단다. 아이가 드래곤의 영혼을 흡수하는 동안 옆을 지키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네.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미네르바를 뒤로 하고, 날개 잃은 악몽을 빼들어 놈에게로 다가갔다. 인간 비늘룡은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서는 가쁜 숨만을 몰아쉬고 있었다.
세로로 쫙 찢어진 동공이 나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운명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반항할 힘조차 없는 건지. 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가슴 절반이 갈려나갔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긴 하지.’
날개 잃은 악몽을 놈의 머리에 푹 찔러넣었다. 시야가 암전됐다. 몸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정신만 어디론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머리를 채웠다.
내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온 사방이 암흑 투성이인 어느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설정상 죽은 드래곤의 사념이 머무는 장소였다.
여기서 드래곤의 사념, 혹은 영혼을 흡수하고 그 지식을 받아들여야 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용언을 사용하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 세계를 먹는 자와 제대로 보스전을 치르려면 용언의 사용이 필수적이었으니 더더욱.
‘여기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솔직히 나로서도 충격이 제법 컸다. 게임에선 그냥 더럽게 센 용 정도에 불과했었는데, 성국의 신이랑 한 판 붙어서 압도적으로 찍어눌렀다니.
등 뒤에서 파동이 느껴졌다. 아마 잔류 사념일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내 예상대로, 놈의 비늘과 똑같은 색깔의 구체가 보였다.
“……어?”
그런데, 내 기억과는 조금 많이 달랐다.
분명 비늘처럼 새하얀 색이었어야 할 영혼이, 마치 오염되기라도 한 듯 검은색과 붉은색의 온갖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뭔…….”
내가 어리둥절해 하기도 잠시,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더니 게임에서 사념을 흡수했을 때처럼 정신이 밖으로 빨려나갔다.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인간 비늘룡의 머리에 칼을 찔러넣었던 모습 그대로 돌아온 뒤였다. 어리둥절한 눈초리로 칼을 뽑았다. 미네르바가 나를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벌써 돌아온 거니, 아이야?”
“……얼마나 지났죠?”
“몇 초도 되지 않았단다.”
사실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낮과 밤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진짜 중요한 건 다른 쪽이었다.
“왜 그러니, 아이야? 표정이 좋지 않구나.”
미네르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잖니. 말하지 못할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하나보다는 둘이 더 낫다는 걸 명심하렴.”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단은 저 혼자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서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할 수 없구나. 대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주겠니?”
“알겠습니다. 지금은 이 드래곤 시체를 어떻게 처리ㅡ”
그리고, 내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나한테서 충격파 비스무리한 힘이 터져나왔다.
드래곤의 시체는 그걸 정통으로 맞고선 사지가 분해되어 붕 떠올랐다가 분화구 벽에 처박히며 사방으로 핏물을 흩뿌렸다.
“……어라?”
어안이 벙벙해진 미네르바와 내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금 이거, 설마 용언인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