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28)
r 228 – 선언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분명 카이킬리아의 침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를 제국에 남겨두니 성국으로 데려가니 하면서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미네르바랑 있던 사이에 대체 어떤 말이 오갔길래 내가 이걸 선택하는 처지가 됐지.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네 오른팔에 붙은 여자가 그리 청하였느니라. 황제와 교황이 서로 실랑이를 하여 봤자, 결국은 너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노라고. 우리 멋대로 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
꾸우욱, 오른팔을 붙잡는 힘이 강해졌다. 고개를 돌렸다. 플로레타가 “나 잘했죠?”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시선이 콕콕 찔러왔다.
“그리하여 네게 손잡이를 쥐어준 것이다. 선택하여라, 델타. 어디에 몸담겠느냐? 너의 그 충정을 누구에게 바치겠느냐?”
카이킬리아가 내 옷깃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양 팔은 플로레타와 루나에게 붙잡힌 채, 카이킬리아의 가슴골에 머리를 처박기 직전인 자세가 되었다.
양 옆의 교황들이 워낙 말도 안 되는 복장이라서 그렇지, 카이킬리아의 제복도 객관적인 노출 자체는 상당했다. 쇄골부터 가슴 중앙까지가 그대로 파여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파묻히기 직전까지 다가온 가슴골이나 창백한 피부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양쪽 팔이 단단히 붙잡힌 감각과, 바로 앞에서 차갑게 빛나는 황금빛 동공만이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려나.’
어느 한 쪽만 고른다는 선택지는 한참 전부터 논외였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지옥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 교황들이 알현실 앞에서 시위를 개시한 직후부터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여자를 마구잡이로 늘릴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일단 관계를 맺은 여자들을 버리거나 포기할 생각 역시 없었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모두 챙기려 노력했으면 노력했지.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후에야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대답을 고민해야 하는가. 거짓말을 할 것도 아니니, 그냥 내 생각을 고스란히 들려주면 될 일인데.
ㅡ지금부터 교미 하는 거야?
ㅡ여기서는 아니란다, 파르나리.
ㅡ교미, 아냐……?
ㅡ……왜 실망한 기색이니?
왠지 저만치에서 이상한 대화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가 들었다면 교황들이나 카이킬리아가 못 들었을 리 없을 텐데, 저 3명도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까.
시선을 받은 카이킬리아는 내가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했는지 잡고 있던 옷깃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눈동자가 내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내가 카이킬리아를 부르는 호칭에, 그 창백했던 얼굴에 살짝 부드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여를 황제라고 불러주는 것이냐. 그것은ㅡ”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
부드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어올랐던 미소가 사라지고, 황금빛 눈동자에 살기가 차올랐다.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렇느냐.”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남극 한가운데 가져다놓더라도 밀리지 않을 한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너의 의중은 잘 알았노라. 여가 아니라 성국을 선택ㅡ”
“그것 역시 아닙니다, 폐하.”
다음에 나온 말 역시 부정당하자, 금안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내게 용언을 가르치던 파르나리처럼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방금의 단 두 문장만으로 내 말 속에 담긴 진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제국을 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국을 택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2개 중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둘 모두를 고르지 않거나.
혹은.
“저는 제국에 몸담지도, 성국에 몸담지도 않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들을 모두 받아들일테니까요.”
둘 모두를 고르거나.
“네놈…….”
카이킬리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을 마지막으로, 공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내 정면에 있던 카이킬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고, 양 옆에서 내 팔을 가슴 사이에 끼우고 꾹꾹 밀어붙이던 플로레타와 루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에 가해지는 압력이 살짝 느슨해졌다.
저 뒤에서 듣고 있던 미네르바도 그랬다. 놀라움 반, 흥미 반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꼬리가 서서히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오직 황제와 교황이라는 직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파르나리만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칠흑 성야 기사단장.”
그렇게 한참을 굳어 있던 카이킬리아가, 기나긴 침묵을 깨부수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지껄인 말 속에 담긴 무게를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덤덤히 답했다. 말한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데 들은 자기들이 훨씬 더 당황하는 기색이자, 카이킬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는 지금 제국과 성국을 모두 끌어안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정녕 그 말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더냐.”
“그럴 자신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요.”
태연하게 되받았다. 어차피 한번 시작한 이상 물러설 길은 없었다.
“제가 해온 모든 일을 떠올리십시오, 폐하. ”
일그러진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저 이전에 태양과 달의 은총을 같이 받았던 이가 있습니까? 저 이전에 악마들의 왕을 죽인 자가 있습니까? 고대의 스크롤을 찾아 영원의 마법사에게 전해준 존재가 있습니까?”
“…….”
“그 모든 업적이 저라는 인간 하나에 모여 있는데, 황제와 교황을 동시에 취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나를 오만하다거나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플로레타와 루나는 태양과 달이라는 단어를 듣고선 몸을 파르르 떨었고, 미네르바는 고대의 스크롤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킬리아 역시 그걸 부정하는 기색은 절대로 아니었다. 저 성격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여겼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어뜯었을테니까.
“폐하께서는 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실로 그렇노라.”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제 폐하든 교황 성하든. 어느 한쪽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건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도, 근거 없는 과장도, 무턱대고 부풀어오른 허세도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선택을, 또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선언한 것 뿐이었다.
3명 모두가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나 역시 지금껏 안았던 여자들을 버릴 생각이 없으니,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모두 끌어안아야지.
“델타.”
충격이 컸는지 멍해진 카이킬리아를 대신해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내 팔을 잡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느덧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기까지 한 플로레타가, 나를 무척이나 수줍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신께서 하신 그 말, 제가 생각하는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겠는지요?”
“맞아. 플로레타.”
나 역시 호칭을 바꾸었다. 이미 관계가 다 들통났다 하기도 했고, 교황들이 먼저 이제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한 이상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황들도 내가 이러는 쪽을 더 선호할테고.
“……델타.”
반대편에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레타처럼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기 시작한 루나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물론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이 걱정되어…….”
말꼬리가 살며시 흐려졌다.
“다른 여자라면 몇십을 들이든, 몇백을 들이든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와 라파엘라 성국의 교황을 같이 품으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있어.”
나는 칼같이 답을 내놓았다. 이런 상황에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야지, 괜히 애매모호하게 대답하거나 자신 없다는 투로 대답하면 모양만 잔뜩 빠지고 아무것도 못 얻는다.
게다가 무턱대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단 내가 성국의 신들 중 하나와 직접 소통한데다 그 힘을 제공받기까지 했으니, 성국 측에서는 당연히 허락할 거다. 성국에서는 교황의 말이 곧 법인데 그 교황들이 저런 모습이니까.
그러면 남는 것은 카이킬리아를 설득하는 일 뿐인데, 카이킬리아는 침대에서 정신을 반쯤 놓았을 때 보여줬던 행동이 있는데다 미네르바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진짜 최후의 수단이긴 하지만 강제로 침대에 눕혀버리는 방법을 사용해도 되고.
“……후훗.”
내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은 플로레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저토록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는 것이 가능했던가 싶을 정도로 밝고 눈부신 미소였다.
“그러셔야지요.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자고로 저희 자매를 같이 취하시겠다 선언하신 남성이시라면 그러한 포부는 마땅히 지니고 계셔야지요.”
대놓고 일부다처를 권장했던 게 빈말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지금의 이 상황이 굉장히 즐겁다는 기색이었다.
“아아, 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란 말입니까. 역시 태양께서는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달께서는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를 잊지 않으시어, 이토록 섬김받으실 가치가 있는 분을 내려주셨습니다.”
태양의 교황이라는 호칭 그대로 마치 태양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플로레타와는 달리, 카이킬리아는 놀라움이 좀 가셨는지 평소의 고압적이고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있겠느냐, 델타.”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 말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질문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무언의 수락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카이킬리아는 굉장히 복잡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가, 내 양 옆에 매달린 플로레타와 루나를 쳐다보았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힘주어 꼬옥 껴안았다.
설마 카이킬리아가 이런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지라 표정이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가슴팍에 막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결심이 그러하다면, 어디 알아서 하여 보거라. 허나, 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여라.”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말 뿐인 허세가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저런 자존심은 언젠가 자기 입으로 부정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끌어안았던 팔을 푼 카이킬리아가 몸을 돌렸다. 극도로 짧은 제복 치마와 가터벨트에 감싸인 엉덩이가 야하게 움직였다. 그 뒷모습이 점차 멀어져갔다.
미네르바를 지나치기 직전에 짧은 대화가 오고갔다.
ㅡ널 감당할 수 있는 사내가 있다면 응당 그 밑으로 들어갈 것이라 하지 않았니? 약속을 지킬 순간이 온 것 같구나, 아이야.
ㅡ시끄럽다, 미네르바. 입 다물어라.
카이킬리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미네르바가 쿡쿡 웃으며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도, 교황들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잘 보았단다, 아이야. 아주 멋진 포부로구나.”
“……감사합니다, 미네르바님.”
“나도 아이에게 하나 질문할 것이 있는데 괜찮겠니?”
“네?”
“제국과 성국을 모두 택하겠다 하였으니, 그 안에 몇 사람쯤은 더 들어가더라도 유효한 것이겠지?”
“……네?”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찌르르 흘렀다.
일단 카이킬리아와 플로레타, 루나를 제외하고도 최소 3명이 더해지는 것은 확정이다. 리제와 아우로라, 그리고 다른 세계에 있다가 날 위해서 여기로 넘어왔다는 닉스까지 이렇게 3명.
그런데 어째, 미네르바의 말은 그 셋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 거죠, 미네르바님?”
“후훗. 글쎄. 왜일까?”
미네르바는 그 말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파르나리가 그 뒤를 따랐다.
“델타.”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겨지자, 루나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맨날 귀빈이라고만 불리다가 이름으로 불리니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당신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