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49)
r 249 – 과거의 편린 – 4
데구르르, 안쪽이 텅 빈 투구가 내 발밑까지 굴러왔다. 그걸 발로 짓밟아 멈추며 원래 있었어야 할 자리를 쳐다보았다.
전신에 갑옷의 건틀릿과 다리 부분 파츠가 덕지덕지 달라붙어선, 마치 수십 개의 팔다리를 가진 것처럼 바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선 채로 굳어 있었다.
그 외형처럼, ‘갑주 먹는 기사’라는 이름을 가진 보스였다.
나는 3분도 안 돼서 모가지가 따여버린 갑주 먹는 기사의 시체를 툭 밀었다. 무게중심 탓에 가뜩이나 위태위태하던 갑옷 덩어리가 뒤로 넘어가며 와장창 소리를 냈다.
몸에서 떨어져나온 수십 개의 갑옷이 바닥을 굴렀다. 나는 아직도 흑염이 꺼지지 않고 있는 날개 잃은 악몽을 땅에 수직으로 박아넣었다.
보스전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하고 들어온 버프였건만, 아직도 안 꺼졌다. 마력 스탯이 확 올라간지라 버프의 지속시간도 덩달아서 엄청나게 길어진 덕분이었다.
‘스탯 올라간 체감이 엄청나긴 하네.’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날개 잃은 악몽이 있고 타오르는 흑염을 사용한 채 덤볐다고 해도 족히 10분은 치고받아야 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은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나버렸다.
갑옷 입은 보스라서 참격형 공격에 일정량의 내성까지 있다는 걸 감안할 때, 약점 속성을 공략했더라면 3분은커녕 1분도 안 돼서 잡을 수도 있었을 듯했다.
‘기억을 못 찾은 건 좀 아쉽지만.’
일부러 브닼 1과 2 시절의 느낌을 내는 보스만 골라서 때려잡고 있는데도 뭔가 파파박 하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특정한 기억만 더 빨리 되찾는다거나 하는 방법은 없어?”
놈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건틀릿을 주워 짝짝 박수를 쳐대던 닉스한테 질문했다. 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정한 기억이라면 어떤 거?”
“옛날에 사용하던 마법에 대한 기억이라든가. 아니면 옛날에 내가 사용하던 기술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닉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도리질을 했다.
“몰라. 네 기억을 봉인한 건 내가 맞지만, 푸는 건 어떻게 못 해. 여신님은 네가 힘을 되찾으면 기억도 같이 돌아올거라고 말씀하셨었거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지금처럼 생각나는 대로 다 족치고 다니는 수밖에.”
만약 특정 기억부터 먼저 떠올리는 게 가능했더라면 무조건 브닼 1 시절의 마법부터 찾기 시작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브닼 1은 마법의 효율이 유별나게 좋았다는 게 유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니까 말이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조차 ‘이게 맞나?’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브닼 4는 전체적으로 역할군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편이지만, 브닼 1은 개사기 몇몇 빌드가 전부 다 해먹는 판이라고 했던가.
‘아마 미네르바도 엄청 좋아하겠지.’
사실, 좋아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눈이 뒤집혀 달려든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지금 세계에서 엄청나게 옛날 시절의 마법인 고대의 스크롤조차 그걸 보자마자 정신을 놓아버린 마당에, 아예 다른 세계의 마법을 보여준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생각해보니까 좀 많이 무서운데?’
성국에서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한번 겪고 난 뒤인지라, 애걸복걸하며 달라붙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냥 여신님한테 물어봤으면 안 됐어? 예전 기억을 더 빨리 찾는 방법은 없냐고 물어봤어도 되잖아.”
“내 과거 이야기 듣고 충격 받느라 까먹었어. 그리고 지금은 말 걸어봤는데 대답이 없으시더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어쩌면 세계를 먹는 자가 잠시 도망간 틈을 타서 힘을 회복하는 중일 수도 있고.
“이해해. 네 과거가 충격적이긴 헸지.”
반말 쪽 닉스에게서는 이제 예전의 그 음침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 공유를 끊은 상태에서라면 아예 영혼 수호녀처럼 행동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정작 외모가 저런 탓에 영혼 수호녀의 느낌은 거의 안 났지만. 브닼 3의 주인공과 맞먹을 정도로 컸던 장신 슬렌더 체형에서 완전히 정반대의 체형으로 역변해버렸으니 말이다.
“델타.”
머릿속으로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던 와중에, 무척 진지한 표정을 지은 닉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덩달아 살짝 긴장하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나는 조금 있으면 다시 닉스한테 주도권을 넘겨줄 거야.”
“벌써? 아직 3일 안 됐는데?”
“3일을 다 채울 생각은 없어. 중간에 네 기억이 갑자기 돌아오거나 할 수도 있잖아. 그럴 때 닉스가 옆에 있는 것보다는 내가 있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확실히 닉스 본인의 정체와 내 정체는 다른 쪽 인격에겐 비밀이긴 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줘.”
“어떤 부탁이길래 그렇게 진지한 표정이야?”
“나중에 기억을 되찾으면 내 본체를 안아줄 수 있을까?”
“……뭐?”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날 안아달라고. 물론 성적인 의미로.”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강조 안 해도 돼.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쪽이야.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니지. 여신님 빼면 내가 너랑 제일 먼저 알고 지낸 사이니까. 내가 예전에 누구였고, 너랑 무슨 관계였는지는 너도 알잖아?”
“그렇긴 한데…….”
영혼 수호녀는 브닼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완전 우호적 NPC들 중 하나였기에, 브닼 3의 주인공과 영혼 수호녀의 관계라면 제법 유명했었다.
아무리 죽여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데다, 몇 번을 죽인다 해도 절대로 화내거나 배신하지 않는지라 온갖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야. 말했잖아. 기억을 되찾으면, 이라고. 옛날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너한테 마법 걸어서 기억 봉인한 관계밖에 더 돼?”
닉스는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뜬금없는 부탁처럼 들리기도 하겠지. 그래도 네가 여신님한테 자초지종을 들었다는 걸 알아서 이러는 거야. 슬슬 말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했거든.”
“…….”
“부정적인 감정을 내가 가져갔다는 건, 반대로 말해 긍정적인 감정은 모두 본체에 남았다는 의미야. 그 긍정적인 감정에 뭐가 포함될지는 뻔하지 않아?”
“그래. 뻔하긴 하네.”
“영향만 받는 정도인 나조차도 이러는데, 감정을 직접 느끼는 본체는 어떻겠어? 지금까지는 네가 자기 정체를 몰랐으니 꾹 참고 넘겼지만, 이젠 그렇게 못 해. 아니, 안 해.”
저 말이 정론이긴 했다.
예전의 닉스야 내가 과거의 기억이 없으니 나를 이상할 정도로 따르는 마녀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닉스는 나를 찾으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기까지 한 영혼 수호녀다.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본체가 너한테 안기면 마음도 훨씬 더 안정될 거야. 그러면 인격이 다시 하나로 합쳐질 때의 부작용도 극적으로 적어진다 이 말이지.”
닉스가 엣헴, 하는 표정으로 가슴을 쭉 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흘끗 숙여 앞으로 한껏 튀어나온 자기 가슴을 바라보고선 그걸 손으로 움켜쥐었다.
앙증맞은 손가락은 제 유두 근처를 간신히 감쌀 뿐이었다.
“그리고, 나 정도면 여기 기준으로도 꽤나 훌륭한 몸 아니야? 내 취항대로 다듬느라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손가락이 제 가슴을 꾸욱 눌렀다. 압도적인 중량의 살덩이가 손가락을 푹 파묻어버렸다.
객관적인 크기 자체야 교황 자매나 리제와 비슷하겠지만, 닉스의 키가 그 둘보다 훨씬 작기에 비율상으로는 닉스 쪽이 압도적으로 커 보인다.
거기다 옷차림마저 그 둘에 꿀리지 않을만큼 무지막지했으니, 꽤나 따위의 수식어가 붙을만한 몸은 절대로 아니었다.
“……잠깐만. 누구 취향?”
내가 잘못 들었나.
“내 취향. 너 말고 나. 여기로 넘어올 때 영혼만 옮겨져야 해서 몸을 아예 새로 만들었거든. 체형이랑 외형이랑 의복은 다 내 작품이야. 물론 만들어준 건 여신님이지만.”
새삼 닉스의 몸을 다시 확인했다.
상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한 사이즈의 가슴, 근육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말랑말랑한 전신, 내 가슴에 간신히 걸칠 정도로 짜리몽땅한 키.
저게 죄다 영혼 수호녀의 취향이라고?
“예전 몸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이라곤 뭐 있지도 않았잖아? 가슴도 빈약하고, 일자 몸매에 키만 멀대같이 컸으니까. 나 이래보여도 그거 제법 콤플렉스였다? 그리고 이 편이 취향 만족시키기도 쉬우니까.”
“아직도 취향 고백할 게 남았어?”
“어라? 내가 말 안 해줬던가? 나 좀 많이 피학적인 걸 좋아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마조ㅡ”
“거기까지. 알아들었으니까 그쯤 해둬.”
나는 한 번 고삐가 풀리자 브레이크를 아예 박살내버리다시피 하는 닉스의 언행에, 왠지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브닼 3 인게임에서 영혼 수호녀는 무척 차분한 성격이었는데. 인격이 부정적인 쪽과 긍정적인 쪽으로 나뉘면서 생긴 부작용인가.
‘혹시 흉부에 달린 게 가슴이 아니라 성욕 주머니였나?’
리제도 그렇고, 교황 자매도 그렇고, 이제는 닉스까지. 흉부에 커다란 걸 2개씩 달고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저러니 말이다.
“알아들었다니 기대하고 있을게. 기억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해?”
닉스가 살짝 미소지은 다음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얼굴에 방금 전처럼 의미심장한 미소가 아니라 순박하고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닉스가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헤헤.”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기억 되찾고 싶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적당히 둘러넘겼다. 분위기가 리제처럼 바뀐 상태로 해서 그렇지, 그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닉스를 위해서라도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긴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브닼 4에서 제일 악랄한 장소를 하나 꼽아보라면, 1위는 사람에 따라 갈리겠지만 누구한테 물어보든 최소 3위 안에는 확정적으로 드는 곳이 하나 있었다.
대륙 남부의 독늪 지형이었다.
어려워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토리상으로 독늪은 중반부 지역에 불과하기에 적들 스펙이 별로 높지도 않고, 바닐라 기준으로는 패턴이 그리 악랄하지도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늪의 랭킹이 그토록 높은 이유는, 바로 거기서 등장하는 적들 때문이었다.
ㅡ키이이이이이익!
“히이이이이이익!”
이를테면, 저기서 닉스와 합을 맞춰 곤충 특유의 찢어지는 소리를 내고 있는 초거대 귀뚜라미 무리라든가.
닉스는 풀쩍풀쩍 뛰어 달려드는 귀뚜라미들을 향해 흑염을 쏟아부었다. 검은 불꽃은 귀뚜라미 수십 마리를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아직 모자랐는지 혀를 계속해서 날름거렸다.
애꿎은 나무 수십 그루가 같이 휘말렸다. 흑염은 곤충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불태워 없앴다. 빽빽하던 숲의 일부가 순식간에 벌판으로 바뀌었다.
“흐으으어어어어…… 여, 여기 이상해요…….”
울상이 된 닉스가 나한테 달라붙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 머리가 마구 헝클어질 때까지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그래서 말했잖아. 나 혼자 갔다올 테니 너는 고지대에 있으라고. 저것들은 거기까진 안 가거든.”
플레이어 캐릭터의 이동을 제한하는 독늪 지대, 그리고 독늪 지대에 널리고 널린 혐오스러운 거대 곤충들.
모두 브닼 1 시절부터 브닼 4까지 이어져 온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 말인즉, 브닼 1부터 3까지의 기억을 제일 잘 떠올릴 수 있을법한 장소라는 의미도 된다. 시리즈가 이어지는 내내, 전체적인 구성이 자가복제라고 봐도 좋을만큼 닮은 지역이니까.
이클립스가 자기 세계에 이딴 걸 만들었을 리 없으니 아마 세계를 먹는 자로 인해 균열이 생겨난 여파일 것이다.
원래는 여기에 있는 던전만 살짝 들리거나 아예 거를 예정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하, 하지만…….”
닉스가 도리질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철벅철벅하며 독늪을 밟고 다가오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렸다. 수십 개의 소리가 계속해서 겹치는 걸 보아하니 정체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온다. 내가 말했던 그 놈이야.”
“…….”
우뚝, 도리질이 멎었다. 닉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독늪의 구조를 간단히 설명해줬을 때도 닉스가 울상을 짓도록 만든 놈이었으니 당연했다.
“저, 저어어…….”
“괜찮아. 무서우면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잡을게.”
“죄송, 죄송해요…….”
“괜찮아. 저런 게 혐오스러운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나처럼 안 무서워하는 게 비정상이라니까?”
나는 벌벌 떨면서도 연신 사과하는 닉스를 달래주고, 바싹 불타버린 나무 구멍에 숨겼다. 닉스는 그 안에 쪼그려 앉아선 벌벌 떨어댔다.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에서 철벅거리는 소리의 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닼 1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혐오스러워진 외형.
일단 저놈이랑 싸우다가 잡기 공격에 당하는 순간, 캐릭터가 아니라 화면 밖의 플레이어한테까지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얼굴.
마지막으로 빌어먹도록 많은 다리까지.
수많은 유저들에게 잡기 공격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준 놈이건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이대로 보고 있기 지랄맞으니 빨리 잡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떠오를 뿐.
“보고 있기 더러우니까, 빨리 끝내줄게.”
왼손에 흑염을 일으켰다. 어차피 두 번까지는 무조건 사용 가능하니, 최대한 크고 최대한 센 걸로. 저놈의 모습이 머리카락 한 톨 남지 않도록.
놈이 다리를 활짝 펼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