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5)
기사단장들은 그 할 일이라는 게 뭐냐면서 나를 추궁했지만, 하하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무언의 의사표시였다.
사실, 말을 해주려면 할 수도 있었다.
조금 많이 갑작스럽고 전혀 못 믿을 말이긴 해도, 자기들을 이런 위치까지 끌어내리고 지금까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던 놈을 아무 뒤탈 없이 죽일 수 있다는데 누가 반대할까.
그 원리원칙 철저한 아이리스도 소극적으로나마 찬성할거다.
하지만 내가 굳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을 숨긴 이유는, 혹시라도 영주가 성 내부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비록 플레이어가 직접 사용할 수는 없다지만, 게임에서는 어느 특정 지역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도청할 수 있는 마법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걸 사용하는 NPC가 아르카나 마탑주였고.
인간 적대 루트를 탈 경우에 보스로 상대하게 되는 아르카나 마탑주가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지랄맞게 빡세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마탑이나 대서고 필드 전체에 깔린 감시와 도청 마법을 사용해 플레이어를 감시하면서 자기는 보스룸에 틀어박혀 마법을 뻥뻥 쏴대거든.
즉, 마탑과 대서고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스룸에 도착해 아르카나 마탑주를 때려잡는 그 순간까지 필드 전체가 보스전이라고 봐도 무방한 구조인 것이다.
‘이 성에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는 마법을 건 것도 분명 그 NPC일텐데, 그러면서 영주의 요청으로 겸사겸사 감지마법을 설치해놓지 않았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애초에 이 부분은 성에 걸린 마법부터가 게임과 달랐기에 내가 딱 잘라 확신하기 힘들었다.
게임에서야 당연히 감시 마법을 설치해놓지는 않았었다만, 거기서는 영주와 기사단장들이 전부 다 남자였고 지금은 한쪽이 여자인데다 다른 한쪽은 그 여자들을 성노예로 삼고싶어하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 미친 변태새끼라면 도청 정도는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주를 같이 욕하는 건 기사단장들에게 혹시 모를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영주를 처리하겠다는 말만큼은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들키면 농담이라는 말로도 수습 못 한다.
“뭐야, 넌 또 여기 왜 왔어?”
“영주님께 마물 토벌을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능력 확인 구슬을 사용해 스탯을 신성력에 몰빵하고, 아이리스에게 부탁 하나를 한 뒤 저택으로 향했다. 정문의 기사는 여전히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앞으로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저러는 꼴이 제법 볼만 했다.
내가 말대가리를 든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서 영주를 찾자, 하인들이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내게도 다 들리게 궁시렁대고선 말대가리를 들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떠나가면서 마치 들으라는 듯이 나를 욕해대는 건 덤이었다.
이번에도 메이드 한 명이 나를 텅 빈 응접실로 안내했고, 나는 그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제안을 할 때는 조금 정중해졌나 싶더니, 자기가 우위에 있다 싶으니까 바로 이 꼴이다.
“왔나.”
“예, 영주님.”
영주는 이번에도 시간이 한참 지나, 응접실의 테이블에 다과가 잔뜩 깔리고 나서야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걸어들어왔다. 볼 때마다 신기한 체형이었다.
“토벌 증거로 들고온 것은 봤다. 클라우디아 그 년이 실패했다고 보고한 마물을 혼자 잡았다고.”
“별 거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 쿠흐흐.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사람 보는 눈?’
그 말을 듣고 순간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정말로 사람 보는 눈이 있었으면 바로 앞에 앉아있는 인간이 자길 처리하려 든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렸어야 하지 않을까.
“사담은 이쯤 하고, 나는 왜 불렀지? 겨우 그깟 걸 보고하려고 나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한 건 아닐텐데. 지금쯤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영주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일단 할 일은 해야했기에,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영주와 눈을 마주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무조건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약속하지. 말해보게.”
“진지하게 맹세해주셔야 합니다. 이번 일은 무조건 비밀로 해주시겠다고요.”
내가 굉장히 완고하게 버티는 것을 보고, 영주도 뭔가 보통 일은 아닐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입에서 알았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허리춤에 매어둔 주머니에서 악마가 깃든 책을 꺼내들었다. 영주는 그걸 보자마자 거의 눈알이 튀어나오다시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눈동자에 탐욕이 조금씩 차올랐다.
“그것은…….”
“영주님이라면 이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척 보기에도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지는 책. 영주는 그걸 멍하니 쳐다보더니 급히 창문으로 다가가선 손수 팔을 걷어붙이며 커튼을 치고 다시 돌아왔다.
“지금 당장 말해라. 그걸 어디서 구했지?”
“그 마물을 죽이니 나타나더군요. 아마 악마와 연관되어 있던 놈인 듯 합니다.”
“악마…….”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 대화의 핵심은 무슨 수를 써서든 영주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거였다.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어떤 말도 안되는 선택지를 고르든, 결과적으로 영주가 이 책을 가져가도록 만들면 클리어였다.
상식적으로, 악마와 연관된 거래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슨 말이 오갔었는지를 남한테 털어놓겠는가. 그게 들키면 자기 권력이 얼마나 되든, 연줄이 얼마나 되든 죽은 목숨인데.
“그리고, 표지의 문양을 알아보시겠습니까?”
“흐음, 아니. 전혀 모르겠다.”
내가 표지에 우둘투둘하게 솟은 글자들을 가리키자,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도 모르는 문자들이었지만 지금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할 시간이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지식을 조금 엿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감히 짐작컨대, 이건 아마 색욕의 악마와 연관이 있는 것인 듯 합니다.”
“색욕의 악마라니, 그게 무엇이지?”
“남자에게는 무한한 정력을 약속하고, 여자는 끝이 없는 성욕과 함께 남자의 옷깃만 스쳐도 절정시키는 몸으로 만들어준다는 악마입니다.”
물론 이것도 전부 다 거짓말이다. 브닼 4에는 그런 야설이나 야겜에 나올법한 악마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여기 악마는 그냥 전부 다 살육에 미친 괴물들이라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하는게 아니라 남자를 죽이고 여자도 죽인다.
하지만 영주는 이런 속사정을 몰랐기에, 그 눈에서 서서히 차오르던 욕망이 확 당겨지는게 훤히 보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남은 과정은 이 책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호오…….”
영주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물들었다. 흐흐흐, 하는 웃음을 지으며 책에 손을 뻗길래, 나는 팔을 뒤로 슬쩍 물렸다. 영주의 손길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안 되죠, 영주님. 알만하신 분이 왜 이러십니까?”
내가 능글맞게 웃었다. 영주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이 거래에서는 내가 우위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엇을 원하지?”
“글쎄요. 제가 뭘 원하는지는 영주님께서 더 잘 아실텐데요.”
저놈 목숨 말고는 따로 원하는 건 없었지만, 원래 이런 거래에서는 상대 쪽에서 조건을 제시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얼굴에 계속 능글맞은 웃음을 띄웠고, 영주는 이마에 주름을 깊게 패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끙끙 앓으며 고민하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정중한 말투였다.
“대충 뭘 원하는지 알겠네. 자네가 마음대로 부수고 망가뜨릴 수 있는 여자 한 명을 건네주지. 그 여자라면 분명 자네의 성벽도 만족시킬 수 있을거야.”
‘……미친놈인가?’
내가 언제 그랬는데.
진지하게 머리를 한 대 후려갈겨버릴까 하는 욕망을 애써 눌러 참으면서 표정 관리를 했다. 사실 여기서 머리를 후려갈겨도 저놈은 책을 절대 포기 안 하겠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죠. 누구입니까?”
“내 딸.”
순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책을 떨어뜨릴 뻔 했다. 간신히 손가락에 힘을 줘서 그런 대참사는 막았지만, 방금의 행동이 저놈의 눈에 안 띌 리가 없었다.
영주가 히죽 웃었다.
“제법 놀란 모양이로군.”
“당연히 놀라겠죠. 영주님의 딸이라니요? 저 같은 놈에게 건네줘도 괜찮은겁니까?”
“당연히 괜찮고 말고. 어차피 자식은 또 낳으면 되는데다, 별로 아끼던 아이도 아니었네. 그리고, 후계자 자리는 당연히 아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나? 내 딸은 자네에게 줄테니 성노예로 쓰든 창녀로 굴려서 돈을 벌든 자네 알아서 취급하게나. 나는 적당한 년으로 하나 골라잡아서 또 낳으면 되니까.”
영주는 그러면서 혼자 껄껄거렸다. 볼살과 뱃살이 동시에 출렁거렸다.
확실히 내가 잘못짚었다. 미친놈인가? 가 아니라, 미친놈이었다. 막나가는 정도가 게임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래서, 거래를 받아들일건가?”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영주님의 딸이니, 미모는 보장되어 있겠죠?”
“음? 크하하하핫! 그렇지, 내 그걸 말해주는걸 깜빡했군! 외모는 내가 보증하지! 당연히 예쁘다네! 성인이 되기 전에 내가 한 번 건드려볼까 생각했을만큼!”
‘…….’
쓰읍.
그냥 여자를 받는 입장이면 당연히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사항이라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툭 던져봤을 뿐인데, 설마 저런 대답이 돌아올줄은 몰랐다.
어느 카드에 미친 세계선의 말마따나, 밑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체감됐다. 사람 인성이 저렇게까지 개판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따님을 여기로 불러주십시오. 그런데, 따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실겁니까?”
“내가 내 자식을 다루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당연히 아비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따라야지!”
거래가 성립됐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쁜 듯 영주는 입을 활짝 벌리고 웃어댔다.
‘어우, 저 미친놈.’
내 기분이야 어쨌든, 이걸로 거래는 성립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책을 볼 수 없도록 주머니에 넣었고, 영주는 메이드에게 자기 딸을 불러오라는 명을 내렸다.
얼마 안 있어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어느 소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생머리에, 드레스를 입고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소녀였다.
여기까지 전력으로 달려온건지 숨을 고르기 위해 헉헉거리다가, 급히 아랫배 앞에 두 손을 모으고선 우리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자기 아버지를 본다기 보다는 높으신 누군가를 보는듯한 태도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인사해라, 아우로라. 이 남자가 너를 데려가기로 했다.”
“예?”
아우로라라 불린 소녀의 황금빛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아마 본인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일 것이다. 솔직히, 나도 영주가 저렇게 노빠꾸로 박아버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일이 잘 풀린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아우로라를 성노예로 쓸 수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고, 이유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영주를 죽인 후에 혼란 없이 빠르게 뒷수습을 하려면 저 영주의 딸을 텅 비어버린 가주 자리에 앉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스토리가 별 탈 없이 진행된다.
내가 아까 전에 자기 딸을 주겠다는 제안을 듣고 그 정도로 놀란 이유가, 영주의 딸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쉽게 해결돼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아, 아버지. 그게 무슨…….”
“토 달지 말아라.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아우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영주는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못박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슬픔과 절망이 한가득 차올랐다.
“자, 그렇다면…….”
영주가 웃으면서 손을 뻗었고, 나는 책을 주머니째로 건네주었다. 영주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한 번 하더니 주머니를 아주 소중히 품에 안고 응접실을 나갔다.
‘으, 시발.’
나는 소파에 손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이제 응접실에는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와, 절망에 빠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아우로라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해도 별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길래, 그냥 제일 무난하게 “저기…….” 라는 호칭으로 대화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급작스럽게 결정된 사항이라 당신을 모실 그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채로 이곳에 온 점, 죄송합니다.”
‘응?’
아우로라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이자, 나는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입을 열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우로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 몸을 맛보시겠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나 지금 이 상태로는 제가 당신을 올바르게 모시지 못할 것 같으니, 그 전에 따로 몸치장을 해야 할 듯 합니다.”
“아니, 잠시만ㅡ”
“저택 별관의 제일 꼭대기층에서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가 잠시 기다려보라며 멈춰세우기도 전에, 아우로라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뒤돌아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혼자 남겨진 나는 방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설마 저대로 도망쳐버리는 건 아니겠지?’
오해야 풀면 되는데, 그러기 전이 걱정이었다. 저렇게 시간을 벌고선 자기 인생을 비관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혹은 냅다 도망쳐버리기라도 한다면 내가 심히 곤란해진다.
‘제발 그러지만 말아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