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6)
나는 물어물어 저택 별관의 맨 꼭대기 층을 찾아갔다.
영주가 응접실에서 굉장히 즐거운 표정으로 나가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하인과 메이드들은 처음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날 무시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말투 하나하나가 정중하고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과를 가져다 테이블 위에 차려주기까지 했다.
‘하긴, 저런 놈 밑에서 일하려면 눈치가 빨라야지. 그렇지 못한 것들은 다 죽었을테니까.’
이 도시의 영주는 브닼 4에서도 몇 안되는 태생부터 악한 NPC였다.
내가 그놈을 온갖 거짓말로 꾀어내고 마지막에는 악마랑 계약했다는 누명을 씌워 죽여버리기까지 할 예정이었지만 죄책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그 새끼도 날 뒤통수치거든.
지금은 악마가 깃들어 있는 책을 얻어서 목표가 바뀌었으니 원래 계획을 보류한거고,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영주의 말을 착실히 이행해 은빛 여명 기사단을 팔아넘기는 순간 플레이어를 배신한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플레이어를 도시 밖으로 내쫓아버리는데다, 은빛 여명 기사단과 짜고 황제의 친족을 살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덮어씌우기까지 한다.
그렇게 되면 해당 회차의 결말이 오직 배드 엔딩으로 고정되는 것은 덤이었다.
유저들이 해피 엔딩으로 분류해놓은 이벤트 분기가 싸그리 막히는데다, 노말 엔딩으로 분류해놓은 이벤트 분기도 제일 암울한 두 개만을 간신히 고를 수 있다.
나머지는 전부 배드 엔딩 직행이고.
그와 더불어 인간 측의 서브퀘스트마저 모조리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게임을 정상적으로 즐기려면 빠르게 배드엔딩을 보고 다음 회차로 넘어가든지 아니면 그냥 게임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저 놈은 그냥 일찍 죽여버리는게 더 도움이 되는 NPC라 이거지.’
진짜다.
저 놈을 죽이면 아우로라가 뒤를 이어 가주와 영주의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데, 일찍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놓는다면 꽤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죽했으면 브닼 4가 10주년 기념으로 온갖 통계를 공개했을 때 2위를 압도적인 격차로 찍어눌러버리고 당당히 ‘플레이어에게 제일 많이 살해당한 NPC’ 항목의 1위 자리에 올라있었을까.
‘것보다, 아우로라는 왜 이리 안 와? 설마 진짜로 도망친 건 아니겠지?’
테이블 위의 다과가 동이 나고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가 뉘엿뉘엿 사라질 무렵이 되자 슬슬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만약 아우로라가 정말로 도망치거나 자살했다면, 영주를 죽여도 그 뒷감당을 하기가 무지막지하게 힘들어진다. 재수가 더 지지리도 없다면 은빛 여명 기사단이 공중분해 될거다.
심지어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더 불안했다. 내가 게임의 지식으로 대비할 수 없다는 의미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생각을 돌리려 해봐도 소용 없었다.
ㅡ똑똑.
더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내가 밖으로 나가 아우로라를 찾아보려는 찰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정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아우로라의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도망친 건 아니었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침 문고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대로 돌려 문을 열어주었다. 밖에는 목소리가 들렸던대로 아우로라가 서 있었다.
‘뭐야, 시발.’
그리고 나는 몸에 걸친 옷을 보고 경악했다. 아우로라가 입은 것은 천의 면적이 어마어마하게 작은 무언가였다.
가슴 끝의 핑크빛 첨단을 간신히 가리고, 비부를 간신히 가리는 디자인. 몸을 가린 곳보다 드러낸 곳이 압도적으로 많은 크기의 천 면적. 몸을 최소한으로만 두르고 있는 끈.
이른바 마이크로 비키니라고 불리는 계열의 옷이었다.
몸을 가리는 천을 전부 다 합쳐도 내 손가락 하나조차 덮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저걸 입고 자기 방에서 내 방까지 걸어왔다 이 말인가.
‘시발, 뭐지? 이것도 모드의 영향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아우로라는 몸을 흠칫 떨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오히려 볼 테면 더 봐달라는 듯 팔을 뒤로 돌리고 가슴을 슬쩍 내밀었다.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일단 몸에 딱 달라붙는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를 입고도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기사단장들과는 달리, 아우로라는 확실히 자신이 부끄러운 옷을 입었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다.
저 마이크로 비키니 자체는 모드의 영향일지 몰라도, 상식까지 개변당하지는 않은 듯 했다.
원본은 아마 적당히 노출도 있는 네글리제쯤 되겠지. 저런 황당한 면적의 마이크로 비키니가 아니라.
달칵, 내가 문을 닫자 아우로라가 문 닫히는 소리에 흠칫 떨면서도 쪼르르 달려와 문고리를 걸어잠갔다. 그러고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치고 곳곳에 놓인 촛불에 불을 붙였다.
원래부터 그렇고 그런 용도로 쓰일 방이었는지, 촛불이 켜지자 굉장히 음란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펼쳐졌다.
방 안을 그렇고 그런 분위기로 만든 아우로라가 그대로 내 손을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몸을 흠칫흠칫 떨면서 뒤로 약간 물러났다. 내 눈에 자기 몸 전체가 담길 거리였다.
“미, 미천한 저를…… 이, 이렇게, 거두, 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굴을 터질 듯이 새빨갛게 붉힌 채로,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제 몸은 이제, 다, 당신의 것이니…… 부, 부디, 원하는대로 마음껏 사용해주세요…….”
아우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선, 두 손을 머리 앞에 모으고 상체를 한껏 숙였다. 이른바 도게자라고 불리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양 옆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흑발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외형 변경 모드 탓에 어디에 내놔도 절대로 꿇리지 않을 외모인데, 하는 행동은 음탕함 그 자체여서 잠시 넋을 놓아버렸다. 끓어오르는 음심을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여기서 성욕을 드러내면 끝장이었다.
“아우로라님.”
“네, 네! ……으응?”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아우로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가, 내가 자신에게 존칭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우로라님을 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
그 얼굴에 한층 더 깊은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혹시, 가주 자리에 관심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네 말을 요약하면.”
후우, 아우로라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바치겠다고 도게자를 하며 부끄러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날카롭고 딱딱한 표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왼손에 파이프 담배를 쥐고, 의자 팔걸이에 오른팔꿈치를 괴고,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여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친 채 다리를 꼰 모습이 무척이나 요염했다.
그래봤자 옷차림은 마이크로 비키니였지만.
“너는 저 돼지새끼를 죽이고 나를 가주 자리에 올리고 싶다, 이 말이지? 겸사겸사 이 도시의 영주 자리도 내가 차지하게 만들고.”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죽일건데? 저 새끼가 몸에 살은 존나게 쪘어도 대가리는 남들 이상이야. 괜히 황제가 반란 위험 없앤다며 자기 친척들 모가지를 따던 와중에도 혼자 살아남은 게 아니라고.”
“있으니까 여기 온 게 아니겠습니까.”
“하, 자신감 넘치네?”
아우로라는 피식 웃고선 불 꺼진 담뱃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끝에서 옅은 연기 한 줄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나만 묻자. 너 말이야, 지금의 날 보고도 왜 무덤덤한거야? 놀라지도 않고, 어색해하지도 않고. 마치 당연히 이랬어야 했다는 표정인데.”
아우로라가 궁금하다는 듯 그렇게 물어왔다. 하긴, 방금 전과 비교하면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성격이 바뀌었는데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궁금해 할 만 했다.
‘그야 지금의 모습이 내가 원래 알던 성격이니까.’
영주의 딸은 가주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게 많고, 그럴 능력까지 충분히 갖춘 NPC였다.
만약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둔 플레이어가 사전에 영주 척살 계획을 알려서 그에 대비할 여유를 준다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가주직을 승계하고 도시의 혼란을 수습해버린다.
미리 알려주지 않더라도 자기 혼자서 머리를 싸매가며 뒷감당을 모두 해내고. 대신 그 이후에는 플레이어와 조금 삐걱이는 관계가 되겠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런 당당한 모습의 아우로라가 훨씬 더 익숙했다.
“글쎄요. 왜일까요?”
물론 익숙한 것과 알려주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나는 능청을 떨었다.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그냥 대놓고 말해. 괜히 돌려서 표현하지 말고. 나 그런거 싫어하니까.”
아우로라는 내 능글스러운 대답에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 네 말대로야. 난 그 돼지새끼가 뒤졌으면 좋겠고, 그 돼지새끼를 죽이고 내가 가주 자리에 올랐으면 좋겠고, 그 돼지새끼 대신 내가 이 도시를 다스렸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차분한 말투였지만, 끝으로 갈수록 점점 격해졌다. 얼굴에 분노가 조금씩 떠올랐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일단은 내 아버지인데 죽이는 게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드냐고? 전혀. 조금도. 절대로 안 들어. 내가 여태껏 그 돼지를 얼마나 죽여버리고 싶어했는지 알아? 틈만나면 내 몸을 그 좆같은 눈으로 훑어보질 않나, 내 몸으로 돈 벌 궁리를 하질 않나, 내 몸을 교섭 재료로 사용할 생각을 하질 않나! 그리더니 기어코 날 팔아버렸네? 그딴 새끼를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돼?”
쾅! 분노를 참지 못한 아우로라가 기어코 테이블을 내리쳤다. 담뱃대가 옆으로 엎어지며 회색 잿가루를 테이블에 흩뿌렸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새끼한테 나는 딸이 아니라 도구였어. 그러면 나도 아버지가 아니라 병신으로 취급해야지. 아니, 그런 취급도 아까워.”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목을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하는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이 다시 나를 향했을 땐, 황금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내가 미리 눈치까고 알아서 처신하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저 돼지새끼 밑에 깔려서 헐떡이고 있거나, 어느 늙은이한테 첩으로 팔려가서 다리 사이에서 아양을 떨고 있거나, 창녀촌에서 허리가 부러지도록 구르고 있었겠지. 내가 일부러 연약한 척, 유약한 척 하면서 살아온 것도 그래서야. 더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 선에서 말을 잘 듣는 딸을 연기해야 했으니까.”
아우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가짜 성격이라고 함은, 아마 방금 전까지 내게 보여주었던 유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말하는거겠지.
역설적이게도 언제든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연약한 딸을 연기했기에 지금껏 나쁜 짓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성격을 그대로 내비쳤다간, 그놈이 기를 꺾겠답시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피곤한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활활 타오르는 감정이 나타났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