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62)
r 262 – 깨어나는 혼돈 – 2
“…….”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마음을 추스렸다. 절대로 성급해선 안 된다. 될 것도 안 될 수 있으니.
방금 전까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넷 모두 해코지를 당하기 전에 간신히나마 구출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저 넷이 불사 지네에게 기생당했더라면 그 뒤의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불사 지네를 죽일 방법만 알지, 그놈한테 기생당한 사람이나 마물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방법 따윈 모르니까 말이다.
‘불멸에 그런 기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로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불멸 덕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낸 불멸이 자기 혼자서 웅웅거리며 떨려댔고, 그 이유를 알아차린 닉스가 불멸이 가리키는 장소를 말해준 것이다.
미네르바가 순간이동을 사용하자마자 보인 것이 불사 지네 수십 마리에게 둘러싸인 넷이었으니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몇 초만 더 늦었더라도 끝장이었다.
‘저 균열은…….’
머리의 열이 가라앉자 주변을 차분하게 살필 여유가 생겼다. 나는 한데 모여 주춤거리기만 할 뿐, 덤벼들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불사 지네 무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네 무리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균열이 열려 있었다. 브닼 3 시절에 몇 번이고 닫아보았던 바로 그 균열이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기억 속의 균열처럼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라 남색이 제법 섞여있다는 사실이다. 남색이 섞인 검은색, 굉장히 익숙한 조합이었다.
불사 지네의 갑피도 똑같은 색깔이었으니, 왜 저런지는 뻔했다.
‘이클립스의 힘이 얼마나 빠져나갔다는 거지?’
저게 열리기 시작했다는 건, 이클립스가 이 세계조차 제대로 틀어막지 못할만큼 심각하게 약해졌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브닼 3의 세계에서도 이클립스가 본격적으로 힘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 뒤틀림이 생겨났고, 그 뒤틀림에서 불사 지네가 튀어나왔다고 했으니까.
‘시간이 별로 없다.’
그 도마뱀 새끼는 이곳에 균열을 친히 열어젖힐 만큼 상처를 회복했는데, 이클립스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
물론 세계를 먹는 자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처를 완전히 회복했다면, 그놈 성격에 균열을 여는 게 아니라 몸소 행차해서 나를 죽이려 들었겠지.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생각할까.’
불사 지네를 바로 앞에 두고도 제자리에 서있기만 하니 불멸이 미친 듯이 떨려댔다.
손잡이를 한층 더 강하게 쥐었다. 일단은 저것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대책 생각은 그 다음이다.
ㅡ키이이이이이잉!
내가 그런 생각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균열에서 굉장히 높고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쇠그릇을 쇠숟가락으로 긁는 듯한 소리였다.
“……이러면 누가 균열을 열었는지 너무 뻔히 보이지 않냐, 도마뱀 새끼야?”
쇳소리를 들은 지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갑피의 색깔이 훨씬 더 진해지는 걸로도 모자라 징그러운 비늘이 덕지덕지 돋아났다. 아래턱은 한층 더 커진 데다 삐죽삐죽한 돌기가 솟아올랐다. 몸통까지 1.5배가량 두꺼워졌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흉포하고, 훨씬 더 단단하게 변한 지네들이 일거에 달려들었다. 이래서야 누가 저 균열을 열었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증거만 더 보태주는 셈이다.
나는 제일 먼저 달려든 지네의 머리를 불멸로 내리쳤다. 강화된 외형이 무색하게, 머리는 너무나도 간단히 몸통과 분리되었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는 내 옆을 스치듯 흘러가 한참을 구르더니 어느 바위 근처에서 멈췄다. 머리 잃은 몸통이 흙바닥에 철퍽 엎어졌다. 처음 한 놈이 죽은 자리를 수십 마리가 메웠다.
이제 지네들에게서 망설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기가 죽든, 아니면 동료가 죽든. 무조건 나를 물어뜯겠단 일념으로 자기 목숨을 내다버리듯 달려들었다.
ㅡ콰드드득!
그리고, 정확히 덤벼드는 순서대로 조각났다.
제깟 것들이 목숨을 내다버리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불멸은 지네 한 마리에게 절대로 두 번 휘둘러지지 않았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몸을 토막내고, 한 번의 휘두름으로 머리를 터뜨리고,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몸 전체를 갈랐다.
나는 불사 지네를 기계적으로 토막내며 균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수십 마리나 되는 지네들 중, 불멸의 사거리 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균열을 닫는 게 먼저다.’
내게 덤벼들었다가 죽어나가는 과정이 워낙에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다 보니,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불사 지네를 꾸준히 뱉어대는 저 균열이 그걸 방해하고 있었다. 지지부진한 소모전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면 제일 먼저 균열을 닫는 게 맞았다.
불멸에 힘을 모아 휘둘렀다. 녹슨 검의 궤적을 따라 검붉은색의 파장이 퍼져나갔다. 파장에 휩쓸려 토막난 불사 지네는 절단면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균열로 걸어가며 몸이 토막난 채 꿈틀거리는 지네의 머리를 짓밟아 부숴버렸다. 근처에 초록색 피가 왈칵 튀었다.
“다음.”
이것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돌렸다. 그 짧은 시간만에 족히 백 마리는 넘게 썰려나갔음에도 아직 남은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개중에 한 놈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용감했는지, 땅을 뚫고 튀어올라 내 머리를 씹으려 시도했다. 근처까지 다가온 머리를 손으로 붙잡고, 발로 몸통 어딘가를 짓밟은 다음 반으로 찢어버렸다.
찢겨나간 몸통이 재생하기 전에 불멸을 찔러넣었다. 움직임이 뚝 멎었다. 나는 축 늘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뒤로도 줄곧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세계를 먹는 자가 장난질을 쳐놨는지 조금 더 흉폭해지고 조금 더 커지긴 했지만, 숙주도 없이 덤벼드는 불사 지네 따위가 나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한낱 지네 따위가 무슨 수로?’
그렇게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살아 움직이는 불사 지네는 단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놈은 수백에 이르던 동료가 모두 죽어버렸음에도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아래턱을 딱딱 맞부딪히며 덤벼들었다.
“어딜.”
왼손으로 놈의 머리를 손으로 붙잡아 땅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마음 같아서는 미네르바에게 던져주고 연구해보라는 부탁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했다.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푸욱, 불멸로 지네의 몸과 땅을 동시에 꿰뚫었다. 불멸로 땅에 고정된 불사 지네는 몸을 바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대로 내버려두고 균열을 향해 다가갔다.
균열은 더 이상 불사 지네를 뱉지 않았다. 아무리 덤벼들어봐야 헛수고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는 모른다.
그리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나는 그 앞까지 다가가 날개 잃은 악몽을 빼들고, 안쪽을 향해 푹 찔러넣었다. 균열의 본질은 너무나도 간단히 잘려나갔다.
본질이 잘려나간 균열은 혼자서 쪼그라들듯이 사라졌다. 이런 점은 예전과 똑같았다.
이내 균열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 앞에서 속으로 10초를 세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했다. 10초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기사단장들이 있는 자리로 걸어가며 왼손으로 불멸을 뽑아냈다. 지네의 시체가 크게 들썩였다.
“…….”
근처에 떨어진 지네 한 마리를 갈기갈기 찢어대는 닉스를 제외하곤, 다른 모두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 저놈들을 상대하던 기사단장들은 더더욱 그랬다.
“저…… 델타.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안 죽던데…… 혹시 그 무기 때문이야?”
리제가 내 오른손에 들린 불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머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오직 진실을 알고 있는 닉스만이 태연하게 지네를 조각내기 바빴다.
“비슷해. 이걸 사용해서도 있고, 내가 저놈들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어서도 있고.”
애초에 불사 지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진혼으로 본질을 잘라내거나, 불멸을 사용하거나.
정확히 말해, 불멸은 내가 직접 사용하는 진혼의 하위호환 격에 가까웠으니 실질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브닼 3에서는 완전히 잘게 토막내면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적 허용이었다. 게다가 나중 가면 그 기믹도 사실상 잊혀진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안 쓰인다.
“그러면, 저번에 말한 대로 기억을 전부ㅡ”
“다 찾지는 못했어. 언젠가는 그러겠지만, 적어도 근시일 내는 아닐 거야.”
이제야 만족했는지 얌전해진 불멸을 등 뒤로 돌렸다. 불멸은 내 등에 달라붙는가 싶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등 뒤에 느껴지던 녹슨 검의 감촉도 같이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우리 대화를 흥미진진한 눈초리로 경청하던 미네르바를 쳐다보았다.
“미네르바 님. 혹시 제가 놓친 게 있는지 찾아주세요. 이놈들은 땅도 팔 수 있으니까 흙 밑까지 살펴보셔야 할 겁니다.”
내 부탁에 미네르바가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미네르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푸른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지평선까지 뻗어나갔다.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있는 놈들이 끝이란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기사단장들을 황궁으로 돌려보내시고, 제가 말씀드렸던 연구에 착수하시면 됩니다.”
“알았단다. 아이는 여기 남을 거니?”
“네. 뒷정리 할 게 있어서요. 닉스, 너는 남아서 좀 도와줘.”
“키히힛, 알았어.”
불사 지네가 감지되자마자 반말로 인격을 바꿨던 닉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미네르바는 순간이동을 사용하려는 듯 지팡이를 살짝 들었다.
“아, 잠시만, 델타!”
클라우디아가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 뒤로 리제와 에리카, 아이리스가 줄지어 따랐다.
“왜?”
“고맙다는 말을 못했잖아. 구해줘서 고마워, 델타. 이번은 진짜로 죽는 줄 알았거든. 너 도착한 거 보자마자 눈물이 날 뻔 했다니까?”
“그런 것치곤 멀쩡한 얼굴인데?”
“나중에 내 방으로 찾아오든가. 있는 눈물 없는 눈물 다 쥐어짜내서 우는 거 보여줄게.”
클라우디아가 낄낄댔다.
“뭐, 그래도 제법 괜찮은 느낌이더라.”
“뭐가?”
“위기의 순간에 너한테 구해지는 거. 리제가 왜 그런 취향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나 불렀어?”
마지막은 나한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기에, 에리카와 같이 있던 리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클라우디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며 대충 넘겼다.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조금 더 늦게 와도 됐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되돌아왔다.
클라우디아 다음은 리제와 에리카였다. 리제는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나를 요란하게 끌어안고선 고맙다며 방방 뛰어댔다. 풍만한 가슴이 내 흉부에 한껏 눌러졌다.
“어때, 에리카?”
“……제가 뭐요, 언니?”
바로 뒤에서 쭈뼛거리면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에리카가 소심하게 되받았다. 에리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무기를 안는 베개 끌어안듯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델타, 아까 좀 멋졌지?”
“…….”
“아니라고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네! 내가 너랑 얼마나 오래 지냈는데 그것도 모를 것 같아? 봐봐, 델타. 에리카도 조만간이라니까?”
리제가 꺄르륵 웃었다. 에리카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리제의 등을 떠밀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조심스레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마지막은 아이리스였다. 시원시원한 반응이던 클라우디아나 대놓고 시끄러웠던 리제 에리카 자매와는 달리, 아이리스는 무척 조용하게 다가왔다.
“고맙다, 델타. 네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앞에서 하도 시끄러워서 말할 기회를 놓쳤는데, 감사 인사는 됐어.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네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네가 우리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을 하는 아이리스의 뺨이 불그스름한 홍조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그리고…… 이 은혜는, 내 모, 몸을 사용해서 반드시 갚도록 하겠다.”
“잠깐, 뭐?”
“다시 한번 고맙다, 델타!”
아이리스가 후다닥 몸을 돌려 나머지 기사단장들에게로 돌아갔다. 기사단장들에게로 돌아가자마자 리제가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광경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기 있는 저 푸른 머리가 바람을 불어넣은 범인인 듯했다.
“자, 그러면 나중에 보자꾸나, 아이야.”
미네르바는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기사단장들과 파르나리를 데리고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미소였다.
닉스는 옆에서 내 손을 자기 멋대로 가져가 고롱고롱 뺨을 비벼대고 있었다. 그 뺨과 머리를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충격을 추스른 내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닉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진혼을 배울 수도 있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