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69)
r 269 – 기억 – 2
내 과거 이야기라는 말에 제일 격렬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기사단장들과 아우로라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다섯은 예전부터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번은 나한테 술까지 먹여서 그 숨기는 게 뭔지 알아보려했다가 실패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말해주겠다는 구두 약속 하나로 질질 끌어왔던 내용이 밝혀지기 직전인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살포시 눈을 감아버린 닉스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었다. 평소에 감정 표현이 무척 적은 셀레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 이야기라, 무척 흥미롭게 들리는 말이로구나. 어디 털어놓아 보거라. 너는 옛날에 누구였느냐?”
다리를 꼰 자세로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 허리를 숙여 손등으로 턱을 괸 카이킬리아가 흥미 가득한 미소를 띠며 재촉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요.”
“지금 다른 세계에서 왔다 하였느냐?”
“예. 미네르바 님이라면 아실 겁니다. 제가 보여드린 그 자줏빛 마법들은 이 세상에서 결코 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러니 미네르바 님조차도 아직 모르고 계셨겠죠.”
“그렇단다. 아이가 알려준 마법을 조금 연구해봤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푸른빛의 마법과는 기본 구조부터가 달랐지. 그것만으로도 알겠더구나.”
내 눈길을 받은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마법에 관해서라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한 미네르바한테서 저런 소리가 나오자, 카이킬리아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시작부터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더라면, 여는 필시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목을 쳐서 효수하였을 것이다.”
“허무맹랑하게 들린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일이니까요. 하지만, 엄연히 제가 직접 겪은 사실입니다.”
“알고 있다. 여가 너를 믿지 않으면 대체 누가 믿는다는 말이더냐. 너의 말에 한 치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계속 진행하거라.”
“예, 폐하.”
조용히 다음에 올 말을 골랐다. 역설적으로,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기에 다음 말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미네르바 님의 옆에 앉아있는 닉스 역시, 저와 비슷하게 다른 세계에서 건너왔습니다. 저희 둘은 같은 세계에 있었죠.”
이목이 잠시 닉스에게 쏠렸으나, 곧바로 나를 향해 되돌아왔다.
“닉스와 제가 건너왔던 세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세계 그 자체가 붕괴되어 흩어졌으니까요.”
나는 불사 지네의 기원과 그 기원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불사 지네는 원래 세계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면 그 뒤틀림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들이고, 그렇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세계가 무너지는 속도를 가속시킨다고 말이다.
존재만으로도 세계를 뒤튼다는 말에, 이곳의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당장 세계가 망할지도 모른다는데 심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느냐. 당장 그것들이 수백 마리씩 나타나 은빛 여명 기사단장들을 거의 죽일 뻔 했다 보고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즉시 제국의 여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소재를 파악해야ㅡ”
“여신님께서 최대한 막고 계시니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진짜 위험한 것은 그 다음에 나타날 존재입니다.”
“다음? 아직도 다음이 남았느냐?”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궁에 나타났던 그 드래곤 말입니다.”
황궁에 나타났던 드래곤이 언급되자, 카이킬리아가 이를 뿌득 갈았다.
성국에서 복부가 뚫린 이유를 설명했을 때도 저런 반응이었으니, 포효 한 번에 픽 쓰러져버렸던 일이 정말 어지간히도 뇌리에 깊게 박힌 듯했다.
“그 드래곤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닉스의 세계가 멸망한 것 역시, 그놈으로 인해 여신의 권능이 흔들린 여파였죠.”
여신의 권능이 흔들렸다는 말에 성국 측 인원들까지 카이킬리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저 입장에서는 세계를 먹는 자가 신성 모독을 저지른 것과 다름없으니 그럴 테지.
“너의 말대로 그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니 그것을 죽일 방법부터 말하여라. 방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 가만히 앉아 멸망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놈을 죽일 방법이 제가 말한 진혼입니다, 폐하. 그것이 본질을 벨 수 없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상에야, 진혼으로는 피해를 주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그 진혼이라는 것의 사용법을 말할 차례로구나. 너의 과거에 대하여 들었으니, 이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듣겠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조금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었다.
닉스의 말로는 정신력이 강하면 버틸 확률이 높아지는 게 맞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당장 내가 그 좋은 예시였고.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영혼이 망가져버린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하지만, 결정권은 전적으로 저쪽에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혹시 너희들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한 마디뿐.
그 걱정을 듣고 마음을 돌린다면 몰라, 하지 말라고 완전히 못을 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걱정이 아니라 구속에 가까우니까.
“진혼을 배우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덤덤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해야 영혼이 존재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아이야, 한 번만 더 말해줄 수 있겠니?”
미네르바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진혼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 하였습니다.”
“잠시 기다리려무나. 그러면 아이가 진혼을 배웠다는 것은ㅡ”
“예. 미네르바 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는 의미죠.”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주자, 그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걸 듣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덩달아 경악이 섞였다.
자신은 수없이 많이 죽어봤다는 사실을 저리도 태연하게 말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저는 무너져가는 세계를 어떻게든 살려보기 위하여 죽고, 또 죽고, 끝없이 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본질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죠. 그것이 제가 진혼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일은 결국엔 실패했지만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반응이 제법 적었다. 다들 경악만 하고 있느라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은…… 그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무수한 죽음을 겪었다고? 어떻게? 여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이상에야ㅡ”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뚝, 카이킬리아의 말이 멎었다.
“저는 원래 닉스가 있던 세계의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황금빛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원래 살고 있던…… 또 다른 세계에서 끌려왔죠. 여기 있는 모두, 제가 여러 가지 의미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것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끌려왔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하였다는 말이냐?”
“그럴 사람은, 아니, 여신은 이 세계에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여신이 언급되자 교황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스텔라와 셀레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이유는 없었기에 나머지 사실도 모두 털어놓았다.
목숨을 잃고 영혼 상태로 방황하던 나를 여신이 그 세계로 데려가 불사의 사명을 부여했다는 것.
사명을 받아 움직이며 수없이 많은 죽음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기에 의지가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망가졌다는 것.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잠에서 깨어나 영혼을 회복할 목적으로 마물을 죽이고 다녔고, 다시 봉인 속에 들어가 망가진 영혼을 회복했다는 것.
잠들어 있던 동안 불사 지네에 잠식당했지만, 영혼의 격이 높아진 덕분에 이성을 유지했으며 불사 지네의 처치를 위해서 닉스와 함께 여정을 떠났던 것.
마지막으로, 최후의 불사 지네를 처치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진혼을 사용하여 자살했던 것.
“……하지만, 기억을 되찾기 전의 저는 그놈에 대한 복수심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여신님한테 여기로 다시 불러달라고까지 했으니.”
놈에게 빚을 갚아주기 위해 다시 여기로 돌아왔고, 내 존재를 그놈이 알아차려선 안 되니 여신이 닉스를 통해 ‘마녀의 저주’라 불리는 권능을 내렸던 일까지도.
“뭐, 이제는 기억을 거의 되찾은 상태입니다. 제일 먼 과거의 기억이자, 저한테는 제일 끔찍했을 시절의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죠.”
나는 그걸로 설명을 끝냈지만,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충격이 너무 컸는지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특히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의 충격이 제일 심해 보였다. 스텔라와 셀레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플로레타와 루나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으니까.
“자, 잠시…… 잠시, 기다려 주세요…… 델타 님. 그,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대체 죽음의 고통을 얼마나 많이 감내하셨다는 뜻이십니까?”
플로레타가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로 질문했다.
“글쎄, 이제 와서는 몇 번인지도 기억 안 나는데. 아무리 최소치로 잡아도 몇백 번은 되지 않을까?”
그나마 내 힘이 대략적으로 갖춰져 있던 브닼 2와 3 시절만 해도 몇백 번은 된다. 거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 주제에 불사의 사명 하나만 믿고 몸을 들이밀었던 브닼 1 시절까지 합친다면?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은 횟수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플로레타. 진혼을 배우지 못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이런 경험을 해야 사용할 수 있으니까.”
교황들의 얼굴에 충격이 아로새겨졌다. 특히 플로레타는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저런 반응일까 봐 일부러 최대한 태연하게 말한 거였는데, 딱히 효과는 없어보였다.
“미리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이걸로 여신님을 비난한다거나 원망하진 않습니다.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불사의 사명을 견디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여신을 원망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이 조금씩 꺾이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도 별다른 원망의 감정이 없다는 건 내가 특이한 거라고밖에는 말 못하겠지만.
“허나, 성국의 신으로 인해 네가 고통받은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 아무리 델타 네게 세계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더라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란 절대로 쉽지 않았을 터인데?”
내가 그런 짓을 당했다는 사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카이킬리아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표정이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제게 그 세계를 구하려는 사명감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무어라?”
카이킬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이 좋아 불사의 사명이지, 세계의 명운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사명감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고요. 제가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던 이유는 그저…… 죽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내가 그런 처지였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를 떠올리며 적당히 내뱉은 말이었지만, 말을 하는 내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도 저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는 듯 말이다.
카이킬리아는 이런 내 의견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당사자인 내가 이런 반응인지라 뭐라 지적할 수는 없는 건지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구나, 아이야. 머리가 이토록 부정적으로 복잡해진 것도 정말로 오랜만인걸.”
미네르바가 이마를 짚었다. 그 옆에 있던 아우로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델타. 네가 많이 죽어서 진혼을 쓸 수 있게 됐다는 건 알겠는데, 저 여자도 진혼을 쓸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저 여자도 너처럼 많이 죽어봤다는 뜻이야?”
손가락이 닉스를 가리켰다.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했음에도 구태여 ‘그 여자’라고 호칭한 걸 보아하니 첫 만남 당시의 앙금이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한창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즐기다가 닉스가 나타나서 다 망쳐버렸으니까.
물론 지금은 해제되고 없었다. 스스로도 풀 수 없다느니 뭐니 하는 건 거짓말이고, 마녀라는 소문을 좀 더 확고하기 위해 사용한 마법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진혼을 쓸 수 있는 건 맞지만, 방식이 조금 달라요. 본인이 직접 죽은 것이 아니라 닉스는 다른 영혼들의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다른 영혼?”
“네. 그리고 그게 제가 말한 방법이기도 하죠.”
미네르바의 은백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말을 조합해서 방법이라는 게 무엇일지를 대충 짐작한 듯했다.
“닉스가 다른 영혼들의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제 기억을 공유해서 제가 겪었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혼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방법입니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네르바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음에도, 내심 속으로는 틀리기를 바랐었는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제 과거 이야기를 들려드린 이유도 그래서고요. 무작정 제가 겪은 죽음을 공유하면 된다고 해봐야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으나, 고요는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충분히 이해하였다. 언제 시작하면 되느냐?”
특유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얼굴을 한 카이킬리아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카이킬리아.”
나는 일부러 카이킬리아라고 부르며 단호하게 제지했다.
“기억을 공유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제 죽음을 읽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느낀다는 걸 의미합니다. 게다가 그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고요.”
이런 내 반응이 예상 외였는지, 카이킬리아가 주춤거렸다.
“만약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면 영혼이 망가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저는 영혼이 반복되는 죽음을 견디지 못해 망가지고 육체만 남아 돌아다니는 망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죠.”
브닼 1의 주요 적들 중에는 망자가 제법 많았다. 아마 나보다 먼저 끌려왔을 다른 세계의 영혼들 말이다.
아직 그 시절의 기억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는 내 과거 행적을 묘사한 게임이니 직접 봤다고 말해도 문제는 없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제 곁의 사람이 그렇게 된 모습을 절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아예 진혼을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을 정도로요.”
“…….”
“하지만 그런 것까지 구속하고 싶지도 않으니,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길 겁니다. 당신들은 그저…… 제가 걱정한다는 사실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카이킬리아는 나를 쳐다보고 입꼬리를 씰룩이며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발 끝을 까딱였다. 무척이나 모순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다른 질문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에야 더 말해줄 게 없었고, 나머지는 각자의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빠서였다.
그 침묵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알현실 중앙에 태양과 달이 강림했다. 빛이 쏟아지면서 각자의 등 뒤로 엄청나게 짙은 그림자가 졌다.
“ㅡ!!!!!!”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사람들도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꿋꿋이 버티고 선 2명마저 엄청나게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신성한 광경이었다.
나 역시 놀라기는 했으나, 이유는 달랐다. 뭐가 저리도 다급하길래 이런 사달까지 일으켜가며 지상으로 직접 강림했다는 말인가.
“여신님? 이곳에는 무슨 일로ㅡ”
“……그것입니다.”
“네?”
여신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이클립스가 그것이라고 부르는 존재라면 세계를 먹는 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무심코 되물었다. 그러자 태양과 달이 나를 향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