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70)
r 270 – 기억 – 3
델타가 성국의 신과 함께 황급히 알현실을 뛰쳐나간 후,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태양과 달이 직접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이 목전에 밀어닥쳤다고 경고까지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시간 따윈 없다는 걸 이곳의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후는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여신님께서 그러도록 안배를 해주셨으니까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닉스가 입을 열었다.
미네르바의 시선에 의문이 떠올랐다. 존댓말을 하는 인격과 반말을 하는 인격 모두를 겪어봤지만 저런 말투를 사용하는 인격은 본 적이 없어서였다.
존댓말을 하는 쪽은 소심했고, 반말을 하는 쪽은 음침했으니까.
“지금의 저는 둘로 나뉘었던 인격이 다시 합쳐진 상태입니다. 이게 제 본래 성격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죠.”
“눈치도 아주 많이 빨라졌구나.”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건 눈치밖에 없으니까요.”
그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평소의 음침하고 소심한 웃음이 아닌, 굉장히 복잡한 감정을 담은 미소였다.
“그래서, 어떡하시겠습니까? 방금 들어서 아시겠지만, 델타 씨는 될 수 있는 한 여러분들이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강조할 필요는 없노라.”
“물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이고, 저든 델타 씨든 그것까지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그저 실패할 확률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여신님조차 별로 추천하시지 않을만큼요.”
여신까지 들먹인 닉스의 경고에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검은색 눈동자가 아우로라를 향했다.
“특히 그쪽은 훨씬 더요. 목숨이 걸린 사항이니 돌려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쪽, 싸움 전혀 못하죠?”
“…….”
아우로라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사실상 전력 외 취급을 받는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진혼을 각성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각성한다 하더라도 평생토록 칼 대신 펜을 쥐어온 손으로는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세계의 명운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 검을 가르친다 한들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러다 잘못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슬픔은 고스란히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그쪽은 기억 공유에 참여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마세요. 그래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테니까.”
닉스는 일부러 거친 말을 골라 아우로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뭉게버렸다. 어설픈 배려로 쓸데없는 희망을 갖게 하느니 혼자서 나쁜 년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냉정하다 못해 폭언으로까지 들리는 말이지만, 닉스가 저러는 이유를 알았기에 일말의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처지에 화가 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아우로라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앞니가 얇디 얇은 선홍색 피부를 파고들어갔다.
가뜩이나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우로라가 저런 말까지 들어버렸으니, 분위기는 거의 얼어붙다시피 냉랭해졌다.
리제와 에리카, 아이리스는 마치 자신이 저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곁에서 본 것 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직접 들었다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 하나 묻겠다, 단신 여자.”
“닉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폐하. 아니면 제 예전 이름인 플로르로 불러주셔도 되고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만약 여가 델타의 뜻을 따라 진혼의 습득을 포기한다면, 델타는 그것과 혼자서 맞서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델타에게 승산이 있느냐?”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대답해드릴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다들 어느정도는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어느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카이킬리아는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황금빛 동공이 날카로워지고,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근처에 있던 기사단장들과 스텔라, 셀레네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릴 정도였으나, 닉스는 그 살기를 태연히 받아넘겼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있지 않느냐.”
아우로라에게로 몸을 돌린 카이킬리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리바누스의 피를 이은 여자를.
“아우로라.”
“……네, 고모님.”
“고개를 들어보아라.”
아우로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가에는 손톱만 한 눈물이 맺혀 있고, 입술은 온통 터져나가선 붉은 피를 흘려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별 것 아닌 일처럼 유지하려는 게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둘 다 리바누스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한쪽은 약간 어리고 한쪽은 성숙하다는 것만 빼면 너무나도 닮은 외모를 가진 둘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닉스, 아니, 플로르라고 하였느냐.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들어라, 단신 여자.”
“……네. 말씀하시죠.”
“여는 델타의 기억을 받아들일 것이다. 몇 백번의 죽음을 견뎌야 하든, 몇 천번의 죽음을 견뎌야 하든, 반드시 해내보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그리 말하신다면.”
“그러니, 아우로라.”
카이킬리아의 오른손에 동그란 빛무리가 생겨났다. 그 빛무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미네르바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머지는 그게 뭔지 몰랐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단지 미네르바가 저런 반응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리란 것만을 짐작할 뿐.
하지만 얼마 안 가 빛무리가 완전한 물체의 모습을 갖추었을 땐, 다른 사람들마저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이킬리아의 손에 들린 것은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관이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리바누스다.”
아이테르눔 제국의 문양이 중심에 자리잡고, 순금과 다이아몬드로만 이루어진 관. 그것이 아우로라의 칠흑색 머리카락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황제의 관이 자기 머리 위에 얹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우로라가 경악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모님! 이게 무슨ㅡ”
“보는대로이니라. 지금 이 순간부로, 여는 더 이상 카이킬리아 리바누스가 아니다. 리바누스라는 성을 사용함은 오로지 현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권위이지 않느냐.”
그 말을 듣는 아우로라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황제의 관이라고? 이런 순간에?
아우로라는 순간 고모님이 때아닌 농담이라도 하시려는 줄 알았으나,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황금색 동공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저건 틀림없이 진심을 담은 눈이었다.
“하, 하지만…… 저는 이런 걸 감당하지…….”
“너는 그 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 전 황제였던 이 몸이 보증하는 사실이니라. 네 아비였던 것은 같은 인간이라 부르기조차 창피할 쓰레기였으나, 너는 리바누스의 혈통을 아주 잘 물려받았으니. 너라면 능히 제국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카이킬리아가 자신의 왼손을 아우로라의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아우로라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는…… 아니, 나는. 이제부터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길을 걸어갈 사람이다.”
툭, 그리고 다시 툭. 가녀린 손바닥이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참으로 많은 것이 담긴 격려였다.
“그 남자는 내가 망가지는 꼴을 보고싶지 않다 하였다. 내가 망가질 것을 걱정한다 하였다. 허나,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니냐. 그것은 단지 그 남자 혼자만이 지닌 감정이 아닐진데.”
아우로라는 말이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델타가 나를 걱정하는만큼, 나 역시 델타를 걱정하고 있다. 내 남자가 홀로 외롭게 싸우는 꼴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노라.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고.”
저 말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렸기에.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황제로 있을 수 없다. 나는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 카이킬리아 리바누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여인 카이킬리아로서 그 남자를 돕고 싶은 것이니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카이킬리아는 속으로 잠시 그런 의문을 가져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제멋대로인 성격파탄자였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보였던 것처럼, 카이킬리아 또한 그리 해보였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는다지 않는다던가. 이건 그 연장선이었다.
“고모님…….”
“너라면 나의 말 속에 담긴 무게를 알 것이다. 이제 제국의 존망은 너의 손에 달렸느니라. 가거라, 아우로라 리바누스여. 가서……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우리가 돌아갈 장소를 마련해두어라.”
아우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터져버린 입술 탓에 입 안 가득 피 맛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결정된 양위였지만, 그것에 반항심을 가질만한 관료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카이킬리아 리바누스가 걸어온 길은 그러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우로라 리바누스가 걸어갈 길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을 막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면, 외모가 너무나도 비슷한 두 사람은 끝끝내 행동마저 비슷하게 될 테니까.
아우로라는 몸을 돌려 알현실의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분명 최고급 카펫 때문에 들릴 수 없어야 함에도,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발소리는 무척 선명하게 들렸다.
문이 열리고,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인영이 그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살아돌아오세요.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로서 내리는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눈앞에서 제국의 권력이 뒤바뀐 모습에, 그 미네르바마저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황들과 닉스를 포함해서 이곳에 있는 전원이 경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기억의 공유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더냐?”
오직 카이킬리아만을 빼고 말이다.
“……진심이시군요, 카이킬리아.”
“나를 이렇게 만든 사내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는 카이킬리아의 눈빛은 한없이 당당했다.
“저희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방법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곧이어 제일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누군가가 닉스의 앞이자 카이킬리아의 옆에 섰다.
온 몸에 검은색 로브처럼 생긴 옷을 두른 교황들이었다. 얼마나 꽁꽁 싸맸는지, 목 밑으로 맨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저희는 이미 델타 님의 여자가 된 몸, 설령 앞에 놓인 것이 환란으로 가득한 골짜기라도 당연히 그 옆에서 보좌함이 도리인 줄로 압니다.”
“그분께서 저희를 구원하여 주셨듯이, 이제는 저희가 그 분을 위하여 나설 차례인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 말입니다.”
“너희는 교황의 직위를 포기하진 않는 것이더냐.”
그 말에, 플로레타와 루나는 살짝 웃으며 되받았다.
“교황의 직위는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과 달께서 내리셨으니 거두어감 또한 태양과 달께 맡김이 옳지 않겠습니까.”
“선대 교황이 육신에서의 삶을 끝내고 태양과 달의 품에 안길 때…… 태양과 달께서 새로운 교황을 향해 빛을 비추어주실 테니까요.”
셋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스텔라와 셀레네가 교황들의 뒤에 나란히 섰다. 이 둘에게 삶이란 곧 신앙과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당연히 성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장 교황들을 성국 지하의 괴물로부터 구해주었던 일의 은혜조차 다 갚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발을 빼느니 차라리 자살하고 말 것이다.
특히 루치아의 일로 개인적인 빚까지 있는 스텔라는 더더욱.
“너희 역시 마음을 정한 것이더냐?”
카이킬리아의 뒤로도 은빛 여명 기사단장 4명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그 기척을 감지한 카이킬리아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읊조렸다.
“예, 폐하.”
“나는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의 폐하가 아니다. 그러니 카이킬리아라고 부르라. 그래서, 너희가 참가하려는 연유는 무엇이더냐?”
“폐…… 카이킬리아 당신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얼굴에서 특유의 싱글싱글한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리제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에 무뚝뚝하기까지 하니, 서릿발같이 살벌한 기세가 맴돌았다.
“나와 같은 이유라…… 그 자도 정말 구제불능이로구나. 혹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눈물을 흘릴 여자가 이렇게나 많은데, 자기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려 했다는 말이더냐.”
사실, 리제를 제외한 3명 중에서 정말로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리스뿐이었다.
에리카는 아직도 언니의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단 죄책감에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는 중이었고, 클라우디아는 델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긴가민가 하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에리카와 클라우디아조차도 델타가 죽은 뒤의 일은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단 사실만은 동일했다.
“아이야, 이제 무엇을 하면 되겠니?”
미네르바는 어느새 말도 없이 카이킬리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제외된 아우로라를 제외하면, 결국 전원이 진혼을 배우겠단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대뜸 몇천 번씩 죽어댈 순 없으니, 우선 맛만 살짝 보죠.”
물론,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닉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