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72)
파국 – 2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으니, 사람들의 반응도 당연히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경호를 서던 은빛 여명 기사단의 단원들이 술렁이며 동요했고, 정원을 바쁘게 오가며 할 일을 하던 메이드들 역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심지어는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밖으로 하나둘씩 걸어나올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델타 기사단장님!”
날 알아본 기사 한 명이 경례를 올렸다. 나는 한데 모여 웅성이는 은빛 갑옷들에게로 다가갔다.
“분위기 안 좋지?”
“안 좋다고 말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겠죠. 황궁 안이라 놀라는 선에서 그친 거지, 바깥 반응이 어떨지는 뻔합니다. 최악이에요.”
“혹시 뭐 아시는 거 있으세요? 이 근처만 이런 겁니까, 아니면 다른 곳도 전부 이런 상황입니까?”
“어디서 봐도 똑같을 거야. 성국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일 거고. 대륙 전체가 이렇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무기를 쥔 은빛 건틀릿에 힘이 들어갔다. 대륙 전체의 하늘이 저런 꼴이라면 어마어마한 혼란이 뒤따라 올 게 명백하니까.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지경인데, 언제까지 이런 상황일지 모르겠네요. 설마 영원히 이런 모습이진 않겠죠?”
“영원히는 아니야. 영원히는 아니긴 한데…….”
저 하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나한테 달렸다. 내가 세계를 먹는 자를 빨리 죽이면 그만큼 빨리 풀릴 테고, 못 죽이거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내가 역으로 죽는다면 끝장인 거고.
게임에선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면 그때부터 낮과 밤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낮이나 밤, 혹은 특정 시간대에서만 등장하는 트리거들이 비활성화 되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여기서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한다면, 낮과 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영 좋지 않은 징조였다.
ㅡ그것과 연관된 현상은 예전에 잡아먹힌 다른 세계들을 참고해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비슷할 거예요.
머릿속에 이클립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사실상 낮과 밤이 없어진다는 건 확정이다. 그놈과 최대한 빨리 결착을 지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일단 몇 명이 기사단장님께 보고를 드리러 가긴 했습니다. 대책은 기사단장님들과 상의해도ㅡ”
“걔들 지금 자리에 없을 거야. 다른 일을 처리할 게 있어서.”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오늘 따로 일정은 없었는데요?”
어리둥절한 되물음이 돌아왔다. 지금 그 애들은 내 기억을 공유해 진혼을 습득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넌지시 그러지 않기를 권유하긴 했는데, 내 걱정이 통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았다.
나를 살아있는 성자로 모시는 성국 측의 4명은 말할 것도 없고, 카이킬리아와 리제, 아이리스도 당연히 받아들일 테고, 미네르바랑 에리카, 클라우디아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아마 받아들이겠지.’
그나마 가능성이 제일 낮은 사람은 아우로라였다.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싸움이랑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여기 있었네, 델타.”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진혼의 습득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몸을 돌렸다. 아우로라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우로라의 머리 위에는ㅡ
‘……황제의 관?’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 뒤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행동 하나하나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황제의 관이라니, 어떻게 된 겁니까, 영주님?”
“이제 영주가 아니라 황제야. 고모님께서 나한테 넘겨주셨어. 나는 그 진혼이라는 기술을 쓸 수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잖아. 아마 그래서인 것 같아.”
“……황제 자리를 넘겨줬다고요? 카이킬리아가요?”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얼마나 큰 각오를 했길래 그 카이킬리아가 황제의 자리를 포기했다는 말인가.
“맞아. 이렇게라도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도록 해주려는 배려인 거겠지. 이런 배려는 필요 없었는데 말이야. 차라리 진작 검이라도 좀 배워뒀더라면ㅡ”
나는 재빨리 아우로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슬픔으로 가득 찬 자책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우로라.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지금부터 할 일을 하시면 돼요.”
“……그렇네. 이런 걸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할 일은 해야겠지. 그래서 이제 어떡하면 되는데, 델타?”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나는 저런 건 살면서 처음 봤어. 근데 너는 아닐 수도 있잖아. 예전 세계에서 봤을 가능성도 있고, 네가 살았다던 세계에서 봤을 수도 있지. 그리고 너, 지금 안 놀라고 있잖아. 너는 뭔가 생각해놓은 게 있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안 놀랐거든.”
설마 저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간파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이긴 했다. 내 쪽이 더 익숙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나라고 딱히 뾰족한 수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원론적인 대답만을 내놓았다.
“저는 일단 그놈을 막으러 가야하니, 폐…… 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동요하지 않도록 해주셔야겠죠.”
아우로라를 폐하라고 높여부르려니 영 어색했다. 어색하기는 아우로라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델타 너한테 폐하라는 말을 들으니까 어색하네.”
“저도 영주님을 폐하라고 부르니까 어색한데요. 반말도 아직 적응 못했는데.”
이상하게 교황들이나 카이킬리아를 반말로 부르는 것보다 아우로라를 반말로 부르는 게 훨씬 더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불명이었다.
분명 제일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진 건 아우로라인데도 말이다.
“됐어. 그냥 아우로라라고 불러. 어차피 우리 관계잖아. 뭐 어때?”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은 당혹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우로라 당신이라면 황제 자리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요.”
내 대답을 들은 아우로라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가녀린 팔이 내 등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나도 아우로라의 등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었다.
“고모님도 그러셨지. 내가 잘 할거라고. 그러니까,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가 돌아올 자리를 가꿔놓고 있어달라고. 그렇게 해줄게. 네가 있을 자리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테니까…….”
아우로라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줄게. 네가, 아니, 네 주위의 모두까지 있을 자리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테니까…….”
툭, 머리가 가슴팍을 가볍게 쳤다.
“멀쩡히 살아서 돌아와. 이건 네 황제로서 하는 명령이기도 하고, 네 여자로서 하는 부탁이기도 해. 알겠지?”
카이킬리아도 저거랑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역시 고모랑 조카 관계라고 이런 것까지 닮은 건가 싶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우로라.”
내 대답에, 아우로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아우로라는 까치발을 든 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우리 둘은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아우로라는 자신이 언제 감정적으로 입을 맞췄냐는 듯 태연하게 표정을 바꿨다. 카이킬리아 특유의 고압적인 얼굴이 아우로라의 얼굴에도 나타났다.
‘저러니까 진짜 카이킬리아 판박이네.’
여태까지는 나이에 맞게 카이킬리아보다 좀 더 어려보이고 순둥순둥한 외모였는데, 표정을 저렇게 바꾸니 정말로 닮았다. 조금만 더 큰다면 아예 외모로는 구분이 안 갈 것 같았다.
“은빛 여명 기사단, 명령을 내리겠다.”
“예, 하명하십시오, 폐하.”
은빛 갑옷의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몸이 학습한 대로 착실하게 아우로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단호히 명령을 내리는 아우로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적이 드문 정원 구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ㅡ앞으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놈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성국에 들러야 합니다. 제국의 혼란은 아우로라가 수습할 수 있을 테지만, 성국은 교황들이랑 이단심판관, 이단심문관이 전부 자리를 비웠으니까요.”
어차피 성국에서의 내 위치는 태양과 달 바로 밑이다. 교황들이 없더라도 나 혼자서 충분히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
“대신, 속도를 높이려면 여신님께서 도와주셔야겠죠.”
ㅡ이를 데 있겠습니까. 부디 원하는만큼 사용해주세요.
그 말과 함께, 나는 눈을 깜빡이자마자 태양의 대성당과 달의 대성당이 위치한 교황령으로 이동해 있었다. 대성당 앞의 중앙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벌벌 떨며 대성당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은 날 보자마자 홀린 듯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비유를 하긴 뭐하지만, 꼭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들어라.”
내가 입을 열자 웅성이던 소리가 싹 사라졌다.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 순식간에 조용해진 나머지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과장 좀 보태면 나비의 날갯짓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동시에, 핏빛 광원을 걷어내며 황금색과 은색의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과 달이 빛 닿는 모든 곳을 밝혔다. 군데군데 입을 틀어막으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내 말을 방해하기 싫어서인 듯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길게 끌지 않겠다. 그대들은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태양과 달을 적대하고, 모독하려는 이단이 벌인 행동이지. ‘악신’이 이 세상에 강림하기 직전이라고 생각해라.”
태양빛과 달빛이 오롯이 내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시각적인 임팩트가 중요하다 해도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도 없었기에, 나는 마치 스포트라이트 수십 개를 독점한 듯 환히 빛나는 주위를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 악신을 저지하러 갈 것이다. 이 신성 모독을 끝내러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들 또한 스스로의 할 일을 해야 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몸이 하늘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적 그 자체나 다름없는 광경에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환장하겠네.’
졸지에 내리쬐는 태양빛과 달빛을 받으며 빛무리 속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묻겠다. 그대들은 내가 혼자 싸우기를 바라느냐?”
누군가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필사적인 부정은 곧 광장에 모인 인파 전체에 퍼져나갔다.
“자신은 이곳에서 벌벌 떨며 기도를 올리고, 나 혼자 외롭게 싸우기를 바라느냐?”
사람들은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필사적으로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일어나 라파엘라 성국을 지켜라. 혼란을 가라앉히고, 하나 되어 무기를 집어라. 이 틈을 타 밀려드는 부정한 것들을 모조리 말살하라.”
아무리 못해도 족히 수천 쌍은 될 각양각색의 눈동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쪽에 영 재능이 없는지라 적당히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건데, 내 위치와 모습이 이래서인지 효과가 엄청났다.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단체로 몸을 일으켰다.
“그대들의 성자 된 자로서 명하노니.”
ㅡ신앙을 증명할 순간이 찾아왔노라.
나는 그걸로 말을 끝맺었다. 마지막 말은 여신이 따로 수를 쓴 듯, 여신이 말할 때처럼 은은한 메아리를 퍼뜨리며 마치 에코를 넣은 것처럼 울려퍼졌다.
영화에서처럼 연설이 끝나자마자 천지를 가득 메울 듯 들려오는 환호 소리는 없었다. 나를 보고 목이 터져라 열광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하나 되어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이만하면 됐겠습니다. 성국 전체에 전달하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것까지 저희가 해줄 필요는 없을ㅡ”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
“네?”
“이미 태양과 달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가 성국 전체에 울려퍼지도록 하였습니다. 라파엘라 성국의 모든 신도가 당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요. 당신을 향한 기도가 끝나면, 다들 무기를 잡고 일어서겠죠.”
“…….”
갑자기 모든 상황이 끝난 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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