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73)
파국 – 3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성국은 일 끝날 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을 테니까.’
내가 성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되든, 그건 세계를 먹는 자를 처리하고 상황이 모두 끝난 이후에 걱정하면 된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날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성국의 시민들은 결연한 표정과 함께 알아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데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중앙 광장이 텅 비게 되자,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클립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의 정점에 가까운 몸과, 그에 대비되는 얄팍한 천쪼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님. 그놈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하늘이 저따위로 변한 걸 보면 아마 금방일 것 같은데요.”
“차원의 틈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몇 분 이내일 거예요.”
저번에 워낙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서인지, 이클립스는 약간 주눅까지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자책하지 말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클립스가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했으니 놈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였든가 했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도착할 장소가 어디쯤인지도 아실 수 있으십니까? 이 세계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세계를 먹는 자가 여기에 바로 나타나거나, 여기서 싸우도록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놈이랑 여기서 싸웠다간 내가 이기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게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아마 제가 거주하는 차원일 확률이 높아요.”
“그건 다행이네요. 여기로 찾아왔었으면 그놈을 유인할 방법까지 따로 생각해야 했을 텐데. 여신님의 차원에 도착할 예정이라니 저희가 먼저 맞이하러 가죠.”
“네, 당신. 따르겠습니다.”
“여신님은 어떡하실래요? 저랑 같이 싸우실 겁니까?”
“당신이 요구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것과 맞서 싸우게 하셔도 되고, 다른 일을 시키셔도 돼요.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해주세요.”
그래도 하나보다는 언제나 둘이 더 나은 법이니 같이 싸워달라고 하려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세계 외부에서 나타날 놈은 세계를 먹는 자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일단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만약 그놈이랑 같이 쏟아지는 게 없다 싶으면 같이 싸우셔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불사 지네가 같이 들어온다면 여신님은 그것들을 우선해서 막아주세요.”
저번에 확인한 물량만 억 단위다. 만약 그 정도 숫자의 불사 지네가 지상까지 내려온다면, 내 기억을 받아들인 여자들이 기적적으로 모두 진혼을 각성하더라도 사실상 가망이 없었다.
여신쯤 되니까 억 단위 물량을 몇백 마리가 새어나가는 선에서 끝냈지, 억 단위는커녕 만 단위만 되더라도 대륙 전체가 지네로 뒤덮일 것이다.
“……당신.”
이클립스가 내 손을 살며시 감싸쥐었다. 순간이동을 사용하려는 건가 했는데, 날 향한 오드아이가 아련하게 변한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당신께서 짊어지신 무게가 얼마나 커다란지 알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당신이란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그리고…… 저 역시 당신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다는 것도요. 아직 제게 주실 상도 벌도 남았으니까요.”
가녀린 손가락이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클립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런 말은 꼭 사망 플래그로 작동하던데.’
나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머리 한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가 진짜로 재수가 없어질라.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괜히 불길한 느낌을 받을 생각도 없다.
대신 반대쪽 손을 들어 칠흑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표정이 눈물젖은 미소로 변했다.
다음 순간에, 우리 둘은 어느새 이클립스의 차원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본 나는 조용히 감상을 내뱉었다.
“……완전 작살이 나버렸네요.”
이클립스의 차원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푸른 낮과 어두운 밤이 반씩 섞여 조화를 이루던 하늘은, 보기만 해도 역겨움이 치밀어오르는 시뻘건 핏물의 색으로 물들었다.
낮의 하늘을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던 하얀 구름과,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 반짝이던 별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로 이루어진 바다를 유영하는 지네 무리만이 보일 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꽃과 풀, 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색을 잃은 꽃들이 꽃잎을 모조리 떨군 채 바스라졌고, 잔디와 풀은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졌다. 나무는 잎이 죄다 떨어지고 줄기마저 죽어버려 앙상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토양 역시 다를 건 없었다.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말라붙은 땅은 바람이 부는 대로 연갈색 흙먼지를 풀풀 날려댔다.
어딜 둘러보아도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도마뱀이랑은 저 혼자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꾸물거리는, 마치 거대한 산맥 같은 불사 지네의 무리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클립스가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당신. 결국 마지막까지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여신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놈을 쓰러뜨리는 것만큼이나 세계가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도 중요하니까요. 여신님이 있으시다면 저는 불사 지네한테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이 찢겨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발톱이 튀어나오더니, 근처 하늘을 마치 유리창 깨뜨리듯 깨뜨려버렸다. 조각난 공간이 와르르 무너졌다.
발톱이 아래를 향해 천천히 내리그어지기 시작했다. 깨져나간 공간 뒤에서 시커먼 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왔네요.”
드디어 왔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번만큼은 게임의 지식을 활용할 수도 없고, 죽은 뒤에 재도전을 할 수도 없다.
‘목숨 한 개로 엔딩 보는 짓이라면 예전에 해봤잖아. 그때랑 똑같다고 생각하자.’
한 대라도 맞으면 해당 세이브 파일이 삭제되는 모드를 깔고, 한 대도 안 맞은 상태로 1회차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달성하고 엔딩을 봤던 사람이 나다.
그러니, 그때랑 똑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이클립스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의 오른쪽 절반이 황금색, 왼쪽 절반이 은색으로 빛났다가 사그라들었다.
“당신께 가호를 드렸습니다. 혹 의지를 담은 용언이 먹히지 않는다면 필요하실 테니까요. 부디, 조심하시길.”
이클립스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불사 지네를 처치하러 떠난 모양이었다.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세계를 먹는 자는 이클립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얼마 안 가 하늘은 거의 절반 가량이나 찢겨나갔고, 그 안에서 검은색과 남색이 혼합된 비늘을 가진 붉은 눈의 드래곤이 강림했다. 여전히 몸뚱아리 하나는 더럽게 컸다.
ㅡ쿠우우웅!
놈의 네 다리가 바싹 마른 황무지에 내려앉았다. 지축이 뒤흔들리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땅이 쩍쩍 갈라졌다. 세계 그 자체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ㅡ도망치지 않았다…… 인간…….
“뭐야, 대화부터 하게? 보자마자 죽이려 드는 게 아니라? 축하해. 날 놀래킬 작정이었다면 성공했네.”
머릿속에 사념이 들려왔다. 나는 저놈이 또 무슨 꿍꿍이속인가 싶어 날개 잃은 악몽을 겨눈 채 되받았다.
그래도 놀랐다는 말 자체는 진심이었다. 설마 선공이 아니라 대화로 최종 결전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다. 보자마자 날 죽이려 들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ㅡ나의 자만과 방심……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허나…… 힘의 차이는 변하지 않으니…… 다급할 이유가 없다…….
“이야, 그래도 자기가 헛짓거리를 했단 사실은 알고 있나보네?”
대체 왜 대화가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주기로 했다. 어쨌든 시간을 끌어서 이쪽에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불사 지네는 이클립스가 막는 중이고, 그 애들이 기억 공유를 끝마칠 때까지 여유가 생기는 셈이니까.
ㅡ조롱과 조소가 아닌…… 죽음이 목적이라면…… 어려울 것은 없다…… 인간…… 너의 시체만으로도…… 절망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하다…….
“날 죽일거면 지금 공격하든가 해. 뭘 믿고 그렇게 여유가 넘쳐? 그러다가 나한테 또 베이려고?”
ㅡ어디 해 보아라…… 인간…….
명백한 비웃음의 감정이 섞인 사념이었다.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한 걸 보면, 뭔가 진혼을 상대할 방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진혼 자체를 막을 수 있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공격을 피하거나 할 수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저놈 성격상 진혼의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여기로 모습을 드러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신! 큰일났습니다!”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클립스가 허둥대며 돌아와 나를 찾았다. 당혹감이 한가득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세계를 먹는 자한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여신님?”
“혹시 새어나간 불사 지네가 없는지 살피려 지상을 둘러봤는데, 마물들이 갑자기 몇 배로 흉폭해져서 인간에게 달려들고 있어요. 저 혼자서 불사 지네와 지상을 동시에 보호하기는 벅찹니다.”
“……그게 무슨 의미죠?”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이클립스가 내 앞에 자그마한 공간을 열었다. 세계를 먹는 자를 곁눈질해 놈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이클립스가 만든 공간을 살폈다.
브닼 4에서 중간 보스로 등장했던 익숙한 외형의 마물이 보였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일단, 크기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장소도 원래 있어야 할 곳과 많이 달랐다. 던전에 배치된 마물이니 던전 밖으로 나갈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지상에 남아있던 모든 마물들이 저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인간을 사냥하려 드는 중이에요.”
이클립스는 손을 휘저어 공간을 닫더니, 내가 뭐라고 말해보기도 전에 굉장히 다급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짐작컨대, 어디 한 군데가 뚫리기 직전인 듯했다.
나는 세계를 먹는 자를 쳐다보았다.
“네 짓이냐?”
ㅡ나의 존재로 인하여 생겨난 것들이다…… 달리 무엇이 원인이겠느냐…….
다시 한번 비웃음의 감정을 담은 사념이 날아들었다.
마물의 근원에 대해서는 예전에 이클립스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자기 세계와 피조물들을 끔찍하게 아끼던 이클립스가 자기 피조물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만들어낼 리 없다.
세계를 먹는 자가 나타난 여파로 인해 세계의 일부가 작게나마 오염되어 저런 마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오염의 본체가 살아있으니 정화를 해도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고.
ㅡ시간이 너의 편인 줄 알았더냐…… 이 하찮은 것아…….
즉, 저놈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던 것도 이런 짓을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다. 어쩐지 날 죽이려 드는 게 아니라 입부터 연다 싶더라.
ㅡ여럿이서 덤비려 했다면…… 지상을 막는 일에 사용해라…… 인간을 죽이는 일…… 방해는 허락할 수 없다…… 그 무엇도…….
쿵! 놈이 발을 굴렀다. 그러자, 놈을 중심으로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 닿는 곳마다 빨간색으로 물들고, 심지어는 바닥에도 피 비스무리한 시뻘건 액체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저놈이 나를 이곳에 강제로 옮겨버린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새빨간 세계에서 다른 색깔을 지닌 것은 오직 세계를 먹는 자와 나, 이렇게 둘뿐이었다.
ㅡ온 힘을 다해 덤벼라…… 인간…… 너의 발버둥을 시간축에 새겨…… 그 여신에게 영원히 보여주겠다…….
놈이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닥에 들어찬 액체가 풍압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곧바로 다시 차올랐다.
ㅡ죽은 시체는…… 일으켜세워…… 여신의 세계를 부수도록 만들 것이다…….
나는 놈이 지껄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언에 세계의 법칙을 덧씌우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여긴 놈의 공간이고, 솔직히 잘 될지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된다면, 저 기고만장한 놈한테 내가 아직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터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세계를 먹는 자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발목까지 차오른 핏빛 액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들이쉬었던 숨을 내뱉으면서, 온 힘을 다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려와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