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77)
종막 – 4
카이킬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방금이 몇 번째 죽음이었더라? 횟수 따윈 이미 까먹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사소한 걸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럼에도 다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카이킬리아가 아니라 기억 속 델타의 행동이긴 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위에서 내리쳐진 나무 몽둥이에 얻어맞았다. 콰득, 하고 왼쪽 어깨가 완전히 박살났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옆구리에 무언가 틀어박혔다.
척추와 갈비뼈가 동시에 부러지며 심장을 찔렀다.
루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거인이 한쪽 발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그대로 내리꽂혔다.
등부터 바닥에 부딪히며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이 상했는지 입으로 피가 왈칵 튀어나왔다.
거인은 팔을 몇 번이나 더 움직였다. 등이 계속해서 땅과 맞닿으며 쾅, 쾅 하는 굉음을 울려댔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망가지고, 살이 터져나갔다.
루나의 죽음은 일곱 번째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플로레타는 또 다시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거대한 이빨 사이에 끼어 있고, 하반신이 늑대의 입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날카로운 이빨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플로레타는 늑대의 이빨을 두드리고 턱에 칼을 휘두르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입이 완전히 닫히는 게 더 빨랐다. 몸 절반이 뚝 끊어졌다. 잘려나간 상반신이 땅으로 추락했다.
플로레타는 내장을 쏟으면서 앞으로 조금 더 기어간 후에야 죽었다.
카이킬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비명이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기억 속의 델타가 질렀던 비명을 따라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셀 수 없을만큼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달라지는 사실은 단 하나, 델타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배경이 계속해서 바뀌었으니까 말이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성을 거쳐, 황량한 숲을 지나고, 거대한 호수를 건넜다가, 황혼이 찾아온 도시에 들어서거나, 지하 유적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델타가 무수한 죽음을 거치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는 증거였다. 셋은 그 사실 하나에 집중해 버티고 또 버텼다.
ㅡ쿠르릉…….
그리고 무수히 반복된 죽음 끝에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의 정상까지 이르렀을 때, 셋은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세 명은, 아니, 델타는, 피폐해진 영혼 탓에 비틀거리면서도 최후의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또다시 수많은 죽음이 반복됐다.
카이킬리아는 공격을 굴러서 피하려다 죽었다. 루나는 공격을 피할 시기를 잘못 잡아서 죽었고, 플로레타는 거리 조절을 실수해서 죽었다.
그러는 동안, 마물의 몸에도 서서히 잔상처가 늘어났다.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놈의 몸에 새겨진 상처가 한층 커지고 한층 선명해졌으며 한층 많아졌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어느 순간, 세계 최후의 마물은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셋은 그걸로 끝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몸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셋은 델타가 최후의 죽음을 맞는 장면 또한 고스란히 느꼈다.
“…….”
세 명이 동시에 눈을 떴다.
굉장히 놀란 기색을 하고 있는, 초록색과 보라색이 반쯤 섞인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의 짜리몽땅한 여자가 각자의 동공에 비쳤다.
기억을 공유하고 아직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셋 다 성공한 걸로도 모자라 이토록 빨리 죽음을 극복해냈다니. 닉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숨이 잘 안 쉬어진다거나, 앞이 안 보인다거나 그런 건 없고요?”
카이킬리아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곳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내실 줄은 몰랐는데 굉장하네요. 뭐라 칭찬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을 지경이에요.”
닉스는 덤덤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저 3명이 자신보다 진혼을 훨씬 더 빨리 습득했다는 걸 질투하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개인의 정신력 차이 때문인데 그걸 왜 질투하겠는가. 왠지 진 것 같다는 기분이 약간 들긴 했지만, 말 그대로 아주 약간이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힘들면 반드시 쉬어야 됩니다. 델타 씨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와주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어설픈 상태로 가면 도움이 아니라 짐이 될 확률만 높아지니까요.”
“……무척, 슬픈 기분이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닉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겪은 죽음들이 모두 델타의 기억이 아니더냐. 델타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도 끝내는 스스로를 불살라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 슬프다고 하였다.”
만약 카이킬리아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었다면 여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목적도, 이유도, 보상도 없이 꾸역꾸역 죽음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카이킬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델타가 겪은 고통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달이시여, 부디 저희에게 그 상처를 보듬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그분께서는…… 아아…… 어떻게 그런…….”
플로레타와 루나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녹안과 자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고 듣긴 했지만, 하나같이 그런 끔찍한 죽음이었을 줄은 몰랐다.
당황한 닉스가 셋을 달래주어야 할지 어쩔지 잠시 고민했다. 닉스는 델타의 기억이 아니라 다른 영혼들의 기억을 받아들였으므로 당연히 저렇게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델타 씨가 겪으셨던 고통 이상으로 저희가 더 잘해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다른 일부터 처리하죠. 본질에 닿는 법은 아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닉스는 주제를 돌리는 걸 택했다. 셋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음 차례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델타를 위해서.
거대한 앞다리가 휘둘러졌다. 그걸 옆으로 굴러 피했으나, 곧장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땅과 수평하게 다가오는 발톱을 튕겨내자 몸이 한참을 밀려났다.
땅에 칼을 박아넣어 몸을 멈추고 일어섰다. 고개를 흔들어 눈가로 흘러내리는 빨간 액체를 털었다. 빨갛게 변했던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몇 번씩 구르고 또 구르다보니 몸 전체가 빨간 액체로 범벅이었다.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냄새를 보니 피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 해서 내 몸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물론 그 사이사이에 진짜 피도 섞여 있었다. 몸 곳곳에 생긴 잔상처 때문이었다. 공격이 워낙 광범위하게 쏟아지는지라 튕겨내기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나와는 달리, 저 드래곤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진짜로 어떻게 되먹은 몸이야?’
놈이 빈틈을 보일 때 무기를 몇 번 휘둘러보긴 했는데, 날개 잃은 악몽이건 불멸이건 죄다 비늘에 흠집도 못 냈다. 그냥 휘둘러지는 족족 튕겨나올 뿐이었다.
저번에도 그랬던지라 나름 대비책을 몇 개 준비해 왔었지만, 마나랑 신앙이 싹 날아가버린 탓에 하나도 실험 못 해봤다.
‘……진혼도 안 통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놈은 내가 진혼을 사용하는 족족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서’ 대응했다. 그 용언을 활용해 법칙을 실시간으로 뒤바꾼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놈의 본질을 노려보려 해도, 세계의 법칙이 저게 창조해 낸 쪽을 진짜라고 가리키는 이상 진혼은 반드시 가짜를 벨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입장에선 그게 진짜였으니 말이다.
내가 그러는 동안 저쪽은 온갖 수단으로 날 죽이려 들었다. 하늘에서 화염의 비를 내리고 그 틈을 타 나를 씹어먹으려 한다거나, 아예 멀찍이 떨어져서 원거리 공격만 퍼붓는다거나.
나로서는 그 짓거리에 대항할 방법이 전무했다. 내 방어 수단이 얄팍한 검뿐인 이상, 공격이 전방위로 들어오면 결국 한두 개 정도는 스칠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마나가 부서져서 마법도 못 쓰고, 신앙이 부서져서 신성 주문도 못 쓰고, 여신의 가호가 부서져서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데 그 와중에 진혼은 사용하는 족족 파훼당한다.
‘게임 좆같이 하네, 진짜.’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건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니까. 이런 말로 욕해봐야 저놈 기세만 더 등등하게 해줄 뿐이다.
ㅡ쿠오오오오오오!!!!!!
놈이 허공에 대고 포효를 내지르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내뿜어진 칠흑색 브레스가 허공에서 하나로 뭉치며 마치 어두침침한 태양과도 같은 구체로 바뀌었다.
칠흑색 화염으로 이루어진 구체가 준비되자 세계를 먹는 자가 뒤로 훌쩍 날아 물러났다. 동시에 구체가 부서지고, 부서진 조각 하나하나가 유성으로 변했다.
하늘에서 칠흑색 불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유성우가 쏟아져내렸다. 이제 내가 저걸 피하느라 정신없는 동안 다시 공격하려 들겠지. 뻔했다.
문제는, 그 뻔한 공격을 막을 수단이 딱히 없단 사실이었다.
날개 잃은 악몽으로 놈의 본질을 벨 준비를 했다. 별 쓸모는 없겠지만, 다른 공격은 더 쓸모 없다. 놈이 방어라도 하도록 만드는 건 진혼뿐이었다.
땅을 박차며 유성우 사이를 질주했다. 바로 옆에, 뒤에 커다란 유성이 퍽퍽 꽂히며 화염을 흩뿌렸다. 그걸 모조리 굴러 피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날개 잃은 악몽을 왼쪽 옆구리 근처로 가져갔다. 낌새를 눈치챘는지, 놈이 용언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ㅡ!!!!!!
내가 날개 잃은 악몽을 휘두름과 거의 동시에 쩌렁쩌렁한 사념이 울려퍼졌다. 서걱, 세계를 먹는 자가 만들어낸 본질이 진혼에 베여 사라졌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내려와라!”
혹시나 싶어 다시 용언을 발동해봤지만 역시나였다. 세계를 먹는 자는 멀쩡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히려 유성이 떨어지는 속도만 더 빨라졌다.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유성을 피하면서 고민했다. 딱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알 수 있을듯 하건만, 정작 그 한 발짝을 내딛을 방법이 뭔지 모르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분명 파르나리가 세계의 법칙을 담는 건 나라고ㅡ
‘잠깐만.’
뭔가, 실패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 된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음 공격을 시작하려는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칠흑색의 불꽃이 얼핏 드러났다. 스스로를 다잡을 시간은 충분했다.
‘아직 1페이즈는 시작도 안 했다.’
생각 자체를 바꿨다. 용언은 힘을 담는 언어이며, 그 힘은 곧 사용할 때의 감정과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법칙을 담을 때 내 무의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세계를 먹는 자는 이클립스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괴물이기에, 어쩌면 내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저 놈은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에서 지겹도록 잡아본 놈이었다. 닼라 모드를 깔고도 잡아봤고, 맨손으로 잡아봤고, 온갖 기괴한 빌드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 지겹도록 해본 보스전을 시작하려면 우선 용언을 이용해 놈을 추락시켜야 한다.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배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내ㅡ 려ㅡ 와ㅡ 라ㅡ!!!!!!”
세계를 먹는 자의 날개가 뻣뻣이 굳었다.
놈은 제자리에 우뚝 굳은 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듯 시도하더니, 날 보며 분노로 가득 찬 포효를 내질렀다.
그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