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79)
종막 – 6
“저것은 내가 상대하겠노라. 너희는 치료를 최우선으로 하여라.”
동공이 극도로 수축된 채 온 몸으로 살벌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카이킬리아가 성검을 겨누었다. 성검의 날은 마치 제 주인의 감정을 표출하듯 굉장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서 플로레타와 루나가 반쯤 울다시피 하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톡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건 다친 게 아니라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카이킬리아가 한계까지 압축된 빨간 액체를 박차며 세계를 먹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황금빛 섬광이 한 줄기 선을 그렸다.
ㅡ쿠오오오오오오!!!!!!
세계를 먹는 자가 포효를 내질렀다. 자신이 제국의 수도에 강림했을 시절, 눈앞의 여자가 포효 한 번으로 기절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이킬리아는 기절하긴커녕 오히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브레스 역시 방향을 꺾어 아주 간단히 피해버렸다.
칠흑색 불꽃이 지상을 태우는 사이, 카이킬리아는 훌쩍 도약해 세계를 먹는 자의 머리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성검이 한층 더 환하게 빛났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놈의 눈 근처까지 접근한 카이킬리아가 전력을 다해 성검을 휘둘렀다. 콰앙! 하고 폭발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먹는 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성검 역시 놈의 비늘을 뚫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저놈을 죽이려면 진혼이 필요하다고 말해줬던가?’
사건이 연이어 터지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마 불사 지네를 상대할 때 필요하다고만 말해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진혼을 쓰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저놈은 카이킬리아가 진혼을 사용할 수 있단 걸 모른다. 그러니,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하게 공격해야 한다.
‘그 전에 마나랑 신성력이 증발하는 상황만 조심하면 돼.’
만약 카이킬리아의 마나와 교황 자매의 신성력이 사라진다면, 저 놈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일부터가 난관이 될 거다.
“델타 님! 델타 님!”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부디 안정을 취해주세요!”
내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는 동안, 플로레타와 루나가 무척 다급한 모습으로 달려왔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두 다리로 직접 달려서 오는 걸 보아하니 패닉에 빠져 제대로 된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얼굴에 떠오른 울기 직전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투명한 검은색 시스루 너머로 가슴이 저러다 끊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격렬하게 흔들려댔다. 그러면서도 가슴 특유의 탄력은 하나도 잃지 않았다.
이클립스의 차림새를 본딴 가리개 역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가슴골로 흘러들어가 두 언덕 사이에 끼이거나, 아니면 겨드랑이로 말려들어가며 핑크빛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허벅지를 가린 천쪼가리도 마찬가지였다. 은밀한 부위를 가린다는, 의복으로서 할 수 있는 정말 최소한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플로레타와 루나는 사실상 알몸이나 다를 바 없는 차림이 되었음에도 그런 것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가슴을 출렁대며 내 옆까지 다가온 교황들이 울상을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델타 님…… 흐윽…… 저희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그랬으면 이런 고초를 겪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루나는 날 보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보라색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방울져 새어나왔다.
“아아…… 어떻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제발 부탁입니다, 델타 님……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겨주세요…… 제발…….”
플로레타도 비슷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맑디 맑은 눈물을 밖으로 흘려보냈다.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아래턱에서 잠시 맺혔다가, 빨간 액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둘의 가녀린 손이 빨간 액체로 범벅이 된 내 제복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제복을 만지는 손이 쉴 새 없이 떨려대는 것으로 보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에반젤리나. 어서 치료를…….”
“치료 안 해도 돼, 루나. 이건 다친 게ㅡ”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루나가 버럭 소리를 쳤다.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이 처치되기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부러 미움받기 위하여 날카롭게 굴던 때의 루나가 생각나는 목소리였다.
“그 수많은 죽음을 겪으셨다 해서, 상처에 익숙하시다 해서, 죽음에 익숙하시다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눈물방울은 어느새 눈물줄기가 되었다. 깜짝 놀란 내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루나는 이런 내 모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하염없이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플로레타가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델타 님. 스스로를 더 소중히 여겨주세요. 당신께서 겪으셨던 수많은 고통들이…… 그 상처들이…… 저희들의 눈앞에서 반복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이내 플로레타도 자신의 언니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흐느낌이 근처를 가득 메웠다.
“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혀 있다가, 카이킬리아가 세계를 먹는 자와 싸우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되찾았다.
루나의 손을 감싸면서 플로레타의 손도 같이 쥐었다. 그리고 가운데로 모아 포갰다.
“나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진짜로 치료 안 해도 돼. 애초에 다친 적이 없으니까.”
“……예?”
그 말을 들은 즉시, 교황 자매의 눈물이 뚝 멎었다. 히끅, 하고 귀여운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둘 모두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바닥 한번 봐줄래? 여기 뭐가 깔려 있나.”
녹안과 자안이 아래를 향했다. 나는 포갰던 손을 풀며 바닥을 스윽 훑었다. 손 끝에 새빨간 액체가 묻어나왔다.
“그냥 이게 묻은 거야.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아무튼 그래.”
플로레타와 루나도 허리를 살짝 숙여 손가락을 땅에 콕 찍었다. 검지와 중지 끝에 마치 피처럼 생긴 빨간 액체가 발라졌다.
둘은 손가락에 묻은 빨간 액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 하지만…….”
“바닥에 깔린 걸 왜 온몸에 뒤집어 쓰고 있냐고? 저놈 공격 피하느라 이리저리 굴러대서 그래. 다친 곳은 하나도 없으니까 안심해.”
“…….”
“…….”
교황 자매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상황 파악을 끝내자마자 뺨과 귀를 새빨갛게 붉혔다. 바닥의 액체에 지지 않을 만큼 새빨간 색이었다.
“그, 그런…… 그러언…….”
“죄, 죄송합니다, 델타 님.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화를…….”
엄청나게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걸 감상할 시간 따윈 없었다.
“괜찮아. 오해할만한 몰골이긴 했으니까. 내가 봤어도 피 뒤집어 쓴 줄 알았을걸? 그러니까 사과는 됐고, 카이킬리아부터 도와주러 가자. 저대로 혼자 싸우게 둘 순 없잖아.”
언제부터인지 공수가 뒤바뀌어 있었다. 공격을 하던 쪽인 카이킬리아는 이제 공격을 막는 쪽이 되었고, 공격을 받아넘기던 쪽인 세계를 먹는 자가 공격을 하는 모양새였다.
카이킬리아는 보스로서 사용했던 수많은 기술들을 눈앞의 드래곤에게 아낌없이 퍼붓고 있었다.
황금빛 장판을 깔고 잠시 뒤에 그 장판을 폭발시키는 기술이나, 성검을 어마어마한 광량으로 뒤덮어 전방위를 베는 기술 등. 익숙한 모습이 제법 보였다.
‘카이킬리아로도 안 되는 건가.’
문제는, 그 어떤 것도 세계를 먹는 자에게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은색과 남색이 뒤섞인 비늘은 여전히 멀쩡했고, 놈이 고통스러워 하는 기색도 없었다.
저대로 가다간 얼마 못 버틸 게 분명했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델타 님.”
“부디 원하시는 대로 명령하여주시지요.”
플로레타와 루나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뺨과 귀는 여전히 새빨갰다. 방금의 오해가 정말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던 듯했다.
“저놈을 잡으려면 진혼이 필요한데, 지금 당장 사용하지는 마. 어설프게 사용하면 모두 막힐 거야. 경각심만 심어주는 꼴이 되겠지. 나중에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명령은 없으신지요?”
“혹시 저놈이 이상하게 들리는 포효를 내지르려 하면 최대한 뒤로 물러나. 신성력이 봉인당할 수도 있거든. 내가 지금 그런 꼴이고.”
내 신성력이 봉인당했다는 말에, 둘의 얼굴에서 새빨간 기색이 싹 날아갔다. 그 자리를 핏기가 증발해 창백해진 피부가 메웠다.
“……신성력이 없어지셨다니요?”
“없어진 게 아니야. 쓸 수 없어진 거지. 저 드래곤 짓이야. 마나랑 신성력을 둘 다 봉인당했는데, 너희까지 그렇게 되면 안 될 거 아니야?”
사실, 지금도 세계를 먹는 자가 왜 카이킬리아의 마나를 봉인하지 않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우리 쪽에 좋은 일이니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지만, 찝찝한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우리가 정확한 타이밍에 진혼을 쓰려 하는 것처럼, 놈도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들의 마나와 신성력을 날려버리려 한다든가 하는 찝찝한 생각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플로레타와 루나가 동시에 신성력을 일으켰다. 마치 태양과 달을 눈앞에 갖다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수십 개나 되는 빛의 창이 세계를 먹는 자의 등에 내리꽂혔다. 막 브레스를 내뿜으려던 놈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킬리아가 그 틈을 타 뒤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몸은 괜찮으냐, 델타? 상처는? 일어설 수 있겠느냐? 불편한 곳이 있다면 지금 당장 말하거라.”
그리고는 곧장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카이킬리아는 질문을 퍼부으면서도 다급하게 내 몸 곳곳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다친 적이 없는데 치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카이킬리아는, 설명을 듣고 어이가 없는지 살짝 웃었다.
“너는 사람의 걱정을 쓸모없게 만드는 일에 재주가 있구나. 그런 이상한 재주는 한시라도 빨리 버려야 할 것이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카이킬리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성검 끝으로 교황들과 싸우는 중인 드래곤을 가리켰다.
“그러면, 저것은 어떡하겠느냐?”
역시 플로레타와 루나의 공격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애초에 저 둘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이클립스의 공격조차 먹히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계를 먹는 자가 언제 이쪽의 신성력과 마나를 봉인할지 모른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
“저것을 이길 방법이나 털어놓아 보거라. 너는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 아니냐.”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는 신뢰였다. 나는 생각했던 바를 최대한 간결하게 털어놓았고, 카이킬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 생각을 수락했다.
이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었다.
종막?
거창하게 작전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부를만한 것도 없었다. 적당히 시선을 끌다가 틈을 봐서 진혼을 사용한다, 로 요약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적당히’를 해낼 방법이 핵심이겠지만. 나는 날개 잃은 악몽을 검집에 집어넣고 불멸을 꺼내들었다.
딱히 커다란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불멸은 불사 지네를 상대로나 유용하게 쓰이지, 세계를 먹는 자 상대로는 날개 잃은 악몽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근데 저놈은 그걸 모르잖아?’
핵심은 세계를 먹는 자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무기를 바꿔 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잠시나마 의문을 갖게 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봉인되었다던 마나와 신성력은 아직도 그대로이느냐?”
“그대로긴 한데, 저놈도 아직 못 날고 있으니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죠. 공격 범위에 저까지 들어가지 않도록만 주의해주시면 됩니다.”
“알고 있노라. 걱정은 접어두어라, 델타.내가 너를 곤경에 빠지도록 만드는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카이킬리아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카이킬리아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곧이어 성검이 빛을 발했다.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정장 바지로 감싸인 두 다리가 빨간 액체를 박차고 세계를 먹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새빨간 동공이 잠시 카이킬리아를 향했다.
2명으로도 심기가 거슬리는 마당에 1명이 더 추가되었단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놈이 앞다리를 굴렀다.
쾅!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바닥이 얇은 살얼음판처럼 쩍쩍 갈라지며 사방으로 뒤집어졌다. 갈라진 바닥이 서로 부딪히고 밀려나며 위로 삐죽삐죽하게 솟아올랐다.
카이킬리아는 갈아엎어진 바닥을 가볍게 뛰어넘어 거리를 좁혔다. 하늘에서는 교황들이, 지상에서는 카이킬리아가 연신 공격을 퍼붓자, 세계를 먹는 자가 짜증스레 사념을 표출했다.
ㅡ인간…… 거슬린다…….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 입에서 커다란 포효가 튀어나왔다.
사념에 내성이 하나도 없는 카이킬리아와 교황들이 표정을 찡그렸다가, 포효와 함께 번진 충격파에 휩쓸려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 세 명의 몸이 핏빛 바닥을 굴렀다.
순간적으로 용언에 당한 건가 싶어 등골이 오싹했지만, 빛무리가 셋의 몸을 희미하게 휘감는 걸로 보아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ㅡ쓸모없는 발악…… 무의미하고…… 나약하다…….
일부러 내 쪽으로는 충격파를 발산하지 않은 듯, 이 자리에서 두 다리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세로 동공이 날 향하자 머릿속으로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재수없게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만약 교황들과 카이킬리아의 공격이 원래 세계에서 퍼부어졌다면, 전투가 끝나고 제일 먼저 지도부터 새로 그려야 했을 거다.
그만한 위력의 공격을 수십 번씩 퍼부었음에도 저놈의 비늘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교환비가 엉망이었다.
“뭐, 부정은 못 하겠네.”
나는 태연히 입을 열어 사념에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 카이킬리아와 교황 자매가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가 몸을 일으키든 말든, 세계를 먹는 자의 이목은 완전히 내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거진 십 분 가까이 자신에게 공격을 퍼부었던 셋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처음 싸웠을 때 이클립스를 철저히 무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날 먼저 죽이고 내 시체로 이클립스를 조롱할 목적이었으니 이유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 계속 그렇게 착각하고 있어라.’
진실을 알아차리는 건 이미 늦은 뒤일 테니까.
“어디, 내가 하는 공격도 쓸모 없다고 말할 수 있나 한번 볼까?”
불멸을 겨누었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칠흑색 검이랑은 전혀 다른, 잔뜩 녹슬고 삭아선 이까지 빠져버린 검의 모습에 놈이 잠시 의문을 가진 듯 보였다.
의문은 잠깐뿐이었다. 낡고 녹슨 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자, 세계를 먹는 자가 용언으로 법칙을 뒤틀었다. 진혼은 놈의 옆에 생겨난 가짜를 베고 사라졌다.
카이킬리아가 내 말을 제대로 전달해줬는지, 발 앞에 황금색과 은색의 장판이 깔렸다. 나는 그 장판을 밟고 위로 도약했다. 떠오르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질 무렵에 새로운 발판이 나타났다.
장판을 밟고 세계를 먹는 자의 바로 눈앞까지 날아올라 다시 진혼을 사용했다. 세계를 먹는 자가 오직 내게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ㅡ!!!!!!
쩌렁쩌렁한 포효화 함께 진혼의 궤적이 뒤틀렸다. 나는 허공에 그려진 신성력 장판을 밟고 옆으로 돌아 빠져나갔다. 한 발 늦게 휘둘러진 앞다리가 신성력 덩어리를 뭉개버렸다.
놈의 이목은 오롯이 내게 쏠려 있었다. 장판을 만들어내는 교황들이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인 카이킬리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일단 첫 번째는 성공이었다.
‘오래 끌기는 부담이 크다. 최대한 단시간에 끝내야 해.’
저놈이 아직 회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기회를 잡아야 한다. 오래 끌어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이다!”
공중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려, 머리쪽에 만들어진 빛무리를 박찼다. 아래로 추락하던 몸에 가속도가 붙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거대한 발톱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판에 착지한 다음 불멸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였다. 진혼은 세계를 먹는 자가 창조해낸 본질을 벤 다음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내가 교황들을 소리쳐 불렀다.
“플로레타! 루나!”
곧장 세계를 먹는 자의 눈 앞을 태양과 달이 뒤덮었다. 머리를 가볍게 휘저으면 사라질 신성력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놈이 브레스를 내뿜는 틈을 타 진혼을 사용했다. 진혼은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가짜를 베고 지나갔다. 반응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방금 걸로 싸움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머릿속으로 불쾌감을 가득 담은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ㅡ잔재주를 부리는 건가…….
“그 잔재주에 당해서 죽을 뻔한 놈이 뭐래? 다음 번 공격은 맞출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나는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방금 한 협동 공격이 내 노림수처럼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세 명은 날 도와줄 들러리에 불과하며, 자신을 죽이는 게 가능한 존재는 진혼을 가진 나밖에 없다고 착각하도록.
그러면 그 착각은 어느새 눈과 마음을 모두 가려서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들겠지. 착각이라는 안개 속에서 죽음이 낫을 들고 서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제대로 된 기회를 노리려고 최대한 틈을 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낌없이 진혼을 퍼부었다. 마구잡이로 사용하면 정신이 조금 지치긴 하지만, 놈을 끝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세계를 먹는 자 또한 자연스레 진혼을 막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격이 용언을 사용해 막지 않는다면 정확히 본질을 베고 지나갈 궤도로 날아갔으니까.
“가십시오! 카이킬리아!”
“알고 있노라!”
“지금입니다! 뒤로 물러나시지요!”
플로레타와 루나, 카이킬리아 역시 제 역할을 다 했다.
카이킬리아는 중간중간에 내 공격이 빈다 싶으면 곧장 치고들어와서 세계를 먹는 자의 신경을 긁어댔고, 교황 자매는 그런 카이킬리아를 사방팔방으로 옮겨주었다.
세계를 먹는 자도 기회가 생기는 틈틈이 3명을 공격하려 하긴 했으나, 교황들은 공격이 들어올 낌새만 보여도 칼같이 순간 이동을 사용해 거리를 벌렸다.
진혼이 쉬지 않고 날아드는 상황에, 작정하고 거리를 벌리는 셋을 비행이 봉인된 몸뚱아리로 따라잡을 방법 따윈 없었다.
‘이쯤 하면 됐겠어.’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세계를 먹는 자는 눈이 거의 뒤집히다시피 해서 날 죽이려 들었고, 서서히 놈의 공격을 피하기가 버거워지고 있었다.
플로레타와 루나, 카이킬리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에, 나는 실수인 척 일부러 한 박자를 더 쉬었다. 그러자 세계를 먹는 자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공격할 준비를 했다.
‘지금.’
나는 미리 마력 속성으로 바꿔둔 날개 잃은 악몽을 머리 위로 힘껏 던졌다. 푸른 섬광 한 줄기가 빙글빙글 날아갔다.
이것이 내가 정해둔 신호였다. 말로 전달하면 놈이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까.
신호를 확인한 플로레타와 루나가 순간이동으로 카이킬리아와 함께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성검이 흉흉하게 빛나고, 태양과 달의 성유물에 각자의 신을 상징하는 빛이 차올랐다.
내가 사용하는 진혼에 비하면 살짝 모자랐지만, 그래도 본질을 벤다는 개념을 충족하기엔 손색이 없는 기세였다.
세계를 먹는 자가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그 순간에 3명은 이미 진혼을 사용한 뒤였다. 궤적을 따라 그려진 참격이 세계를 먹는 자의 몸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ㅡ!!!!!!
날 씹어먹기 위해 벌려졌던 주둥아리에서 대신 포효가 터져나왔다. 놈의 양 옆에 새로운 본질이 나타났고, 카이킬리아와 교황들의 진혼은 그 가짜를 집어삼켰다.
“잘 해줬어. 너희 모두.”
그리고, 아직 내가 남아 있었다. 나는 교황들의 도움을 받아 순간이동으로 단숨의 놈의 가슴팍까지 접근했다. 이 싸움의 끝이 바로 목전에 보였다.
힘을 한껏 끌어올려, 놈의 본질을 향해 불멸을 꽂아넣었다.
ㅡ푸우욱!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공격이 무색하게도, 낡고 녹슨 칼날은 너무나 쉽게 검은색과 남색이 섞인 비늘을 파고들어갔다. 불멸이 제대로 본질에 닿았다는 신호였다.
아래를 향해 내리그었다. 지형을 바꿀 공격조차 흠집을 내지 못하던 비늘이 칼날의 궤적대로 갈라지며 그 안의 검은색 피를 토해냈다.
세계를 먹는 자의 몸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서서히 굳어갔다. 나는 본질이 토막난 감각을 확실하게 인지한 뒤, 불멸을 뽑았다.
아래로 떨어지려는 내 몸을 카이킬리아가 정확히 받아냈고, 어느새 날개 잃은 악몽을 회수해 온 플로레타와 루나가 순간이동으로 우리 둘을 데리고 멀찍이 물러났다.
나는 날개 잃은 악몽을 건네받으며 세계를 먹는 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불멸을 꽂아넣었던 자리가 아주 확실하게 갈라져 있었다.
얼마 안 가, 놈이 행동을 멈췄다.
ㅡ꿈틀!
멈췄어야 했다.
“……뭐야?”
놈을 처치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분명 본질이 반토막나서 죽었어야 할 세계를 먹는 자가 다시 움직임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일 당황한 것은 나였다. 분명 진혼이 제대로 들어갔고, 칼 끝으로 본질을 썰어버린 감각까지 느꼈다. 당연히 그걸로 끝났어야 했는데?
“조심해라, 델타!”
“델타 님! 피하세요!”
“공간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놈이 날개를 활짝 펴며 포효를 내지름과 동시에, 바닥이 통째로 무너지며 몸이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무너진 공간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며 플로레타와 루나, 카이킬리아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이내 붉은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검은색만이 남았다.
추락은 한참을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떨어졌을까, 발이 무엇인가에 닿았다. 다행히 추락사는 면한 것 같았다.
뭔가 디디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사방이 죄다 검은색이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발을 힘껏 굴러보았지만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혼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충격에, 또 이상한 공간으로 떨어졌다는 충격까지 겹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온 사방이 다 새까맸다. 이게 암흑으로 뒤덮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공간의 색깔 자체가 검은색이어서인지는 몰랐다. 일단 내 몸 중에 어둠 속에 파묻힌 부위는 없었다.
그리고.
“……환장하겠네. 분명 죽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앉은 세계를 먹는 자를 보면 아마 후자인 듯했다. 이게 정말로 암흑이었다면 저놈이 보일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세계를 먹는 자의 가슴팍에는 불멸이 긋고 지나갔던 상처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온통 검은색인 공간 속에서 검은색 계열의 비늘을 지닌 드래곤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상황도 어이가 없었지만, 저놈이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지부터가 훨씬 의문이었다.
ㅡ그런 수를 감추고 있었나…… 인간…….
“너…… 어떻게 살아있냐? 진혼은 제대로 먹혔잖아.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놈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하냐니, 그게 짐작이 갔으면 내가ㅡ”
짜증스레 대답하려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저놈…… 입으로 직접 말한 건가?’
여태까지 사념으로만 대화하던 놈이 갑자기 왜?
ㅡ콰드드득! 콰득!
이런 내 의문이 해결되기도 전에, 세계를 먹는 자의 몸이 살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은 산과도 같던 크기의 몸이 평범한 언덕 정도로 줄어들고, 황궁 크기로 줄어들고, 저택 크기로 줄어들고, 평범한 건물 크기로 줄어들고, 마침내 인간과 비슷할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인간 크기까지 줄어든 세계를 먹는 자의 모습을 본 내가 조용히 경악했다.
“너…….”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를 그런 공간까지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나?”
칠흑색 머리카락에 칠흑색 눈.
“그 공간 자체가 널 위한 함정이었다. 너 같은 것이 공간을 뒤틀어 마련한 함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지.”
황금색 장식이 섞인 칠흑색 제복.
“덕분에 너의 지식에 대한 이해는 끝났다. 그 여신이 다른 차원에서 데려온 존재라…… 아주 흥미롭더군.”
마지막으로, 나와 정확히 똑같은 눈높이.
“어디보자…… 네 지식으로 이걸 뭐라고 그러더라…… 그래. 그랬었지.”
저건, 내 모습이었다.
“2페이즈, 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