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89)
결전 – 10
“왜 그러지? 계속 도망만 칠 건가?”
굉장히 익숙한 음성과 함께 벼락이 날아들었다. 쿠르릉, 하는 소리에 맞춰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샛노란 벼락이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스파크를 튀기는 충격파가 착탄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퍼졌다가 내 바로 앞에서 힘을 잃었다. 거리 계산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내 모습을 한 세계를 먹는 자의 손에서 커다란 양날 도끼가 까딱였다. 도끼날에는 번개가 감돌고 있었다. 저 무기의 특수 능력이었다.
‘어떤 무기인지는 다 알겠는데, 아는 건 둘째 치고…….’
무기의 종류나 공격 범위, 특수 능력 같은 정보는 모조리 다 꿰고 있다. 브닼 2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한번씩은 써봤던 무기들이니까.
게다가, 브닼 4의 플레이어는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내 기억을 습득했으니, 자연스레 저놈이 무기를 휘두르는 방법도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에서 플레이어 캐릭터가 무기를 휘두르는 방법과 거의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 아슬아슬하게 닿던 거리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거리로 바꿀 수 있다. 방금 전의 벼락 섞인 충격파처럼 말이다.
어째서인지 저놈이 주로 브닼 4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도 한몫 했다. 아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꿍꿍이가 있든 말든 덕분에 피하기는 쉬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공격 수단이 부족하다.’
들어오는 공격이야 쉽게 피한다 해도, 정작 저놈한테 대미지를 줄 방법이 없었다. 마나와 신앙이 아직까지도 봉인되어 있는 탓이었다.
둘 중 하나만 사용할 수 있었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봤을 것 같은데, 지금 상태는 맨몸이나 다름없는지라 도저히 피해를 입힐 각 자체가 안 나왔다.
멀리서 저놈의 공격을 죽어라 피하다가, 어쩌다 한두 번씩 깔짝이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죄다 손쉽게 막혔고.
“덤비지 않겠다면 그러도록 해라. 시간은 너의 편이 아니니.”
세계를 먹는 자의 손에 들린 무기가 또다시 외형을 바꿨다. 위로 갈수록 날이 넓적해지다가, 칼날을 중심으로 끄트머리가 손잡이를 바라보는 초승달 모양처럼 휘어진 괴상한 검이었다.
그 외형대로, 브닼 4에서는 ‘초승달 검’이라 불렸다.
“또 멀리서 칼질이나 하려고?”
놈은 내 빈정거림을 아주 깔끔하게 무시하며 팔을 휘둘렀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 끝에서, 생긴 것과 똑같은 형태의 참격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구르기로 피하자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곧장 2번째 공격과 3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그 뒤편에는 족히 네다섯 개의 참격이 더 보였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세계를 먹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저게 바라는대로 해주는 셈이지만, 어차피 이대로 계속 도망다녀봤자 작정하고 원거리 공격만 날려댈 테니 불리해지는 쪽은 나였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니까. 저놈 말대로.’
내가 달려드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손에 들린 괴상한 모양의 검이 외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저놈이 선택할 수 있는 무기의 가짓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완벽하게 튕겨낼 수 없도록 속성 공격이 가능한 대검 혹은 둔기류. 그 중에서도ㅡ
‘역시.’
예상대로, 혼자서 꾸물거리던 무기는 커다란 붉은색 대검의 형태를 취했다. 마치 용암을 반쯤 굳혀놓은 것처럼 생긴 칼날 안에서 군데군데 주황색 용암이 비쳐보이는 검.
칼날 안에서 비쳐보이는 용암의 색깔이 한층 짙어졌다. 특수 능력을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나는 급하게 제동을 건 다음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검이 나뭇가지처럼 간단히 휘둘러졌다. 칼날의 궤적을 따라 용암이 분출되고, 어둠 뿐이던 세계에 색을 덧댔다.
용암에는 직접 닿지조차 않았음에도 후끈한 열기가 밀려왔다. 주홍빛 용암이 사방으로 넘쳐흐르며 내 움직임을 제한했다.
사그라드는가 했던 주홍빛이 다시금 타올랐다. 다음 번 공격에 1회 한정으로 용암 장판을 까는 것이 저 대검의 특수 능력이지만, 놈은 그걸 한 번만 쓸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용암으로 덮이지 않은 자리를 찾고, 대검의 칼날이 주홍빛으로 타오르기 직전에 거리를 좁혔다.
ㅡ쾅!
이런 내 움직임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 한 발자국 앞을 커다란 철퇴가 내리찍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머리가 찍혔을 위치였다.
무게추의 크기가 어지간한 사람 머리보다 크고, 이단심판관을 처치하면 입수할 수 있는 무기. 툭 까놓고 말해, 스텔라가 쓰는 철퇴랑 똑같은 물건이다.
한 손에는 용암 대검을, 다른 한 손에는 단죄의 철퇴를 든 세계를 먹는 자가 나와 마주보았다. 황금색과 주황색이 동시에 빛을 밝혔다.
‘튕겨내기는 사용 못 한다. 무조건 굴러서 피해야 돼.’
용암 대검은 외형답게 화염 대미지가 절반가량 되고, 단죄의 철퇴는 무게추가 금색으로 변한 동안 신성 대미지가 같이 들어온다.
저걸 튕겨낸다 한들 속성 대미지는 고스란히 받는데다, 둘 모두 특대형 무기라 튕겨내고 뒤로 밀려나는 동안 들어올 후속타를 못 막을 가능성이 컸다.
‘오른손 먼저.’
놈의 오른쪽 어깨가 먼저 움직였다.
수평으로 휘둘러지는 대검을 굴러 피하며 철퇴의 위치를 확인했다. 내 오른쪽 어깨에서 약간 비스듬한 대각선 방향이었다.
관성에 의해 나아가려는 몸을 억지로 멈추고 몸을 비틀자마자 삐죽삐죽한 무게추가 오른어깨를 스쳐지나갔다.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풍압만으로 몸이 살짝 휘청일 정도였다.
둘 모두 첫타는 피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바닥을 내리찍은 철퇴가 위로 들어올려졌다. 우우웅, 무게추의 황금색이 한층 더 강렬하게 변했다.
놈은 어느샌가 용암 대검을 내팽개친 채 철퇴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스텔라 보스전 2페이즈의 3연타 패턴을 구현한 특수 능력이었다.
‘특수 능력이면…….’
재빨리 구를 곳을 확인했다. 왼쪽은 용암밭이고, 오른쪽도 용암밭이고, 뒤로는…….
‘돌겠네.’
이러면 어쩔 수 없었다. 거리를 더 좁혀서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졌던 철퇴가 있는 힘껏 바닥을 후려갈겼다. 콰앙! 하고 지축이 흔들리며 무게추를 중심으로 칠흑색 문양이 잠시 나타났다.
나는 이미 공격이 닿지 않는 안쪽까지 파고든 뒤였다. 날개 잃은 악몽에 놈의 본질을 베는 힘을 담아 힘껏 휘둘렀다.
ㅡ까아앙!
살을 베는 감각이 아니라 금속에 막힌 감각이 느껴졌다. 놈의 왼손에 어느새 악마 모양이 조각된 건틀릿이 나타나 있었다.
건틀릿은 얼마 안 가 흐물흐물하게 변해 사라졌다. 텅 빈 손이 다시 철퇴의 손잡이를 쥐었다. 세계를 먹는 자가 공중으로 살짝 떠오르더니 그대로 철퇴를 휘둘렀다.
칠흑색 바닥에 무게추가 틀어박혔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큰 크기의 칠흑색 문양이 그려졌다.
‘2타.’
어떻게 된 무기가 중간에 양잡을 풀었는데 특수 능력이 계속 이어진단 말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 브닼 4에는 저런 기능 따윈 없었는데.
나는 조금 전에 구르면서 미리 봐두었던, 용암이 제일 얇게 흩뿌려진 자리를 찾아 그걸 단숨에 뛰어넘었다. 세계를 먹는 자도 같이 도약했다.
거의 내 눈높이만큼을 뛰어오른 놈이 마지막 3타를 준비했다.
ㅡ콰과과과과광!
황금빛으로 물든 무게추가 칠흑색 바닥과 있는 힘껏 맞닿았다. 반지름이 내 키의 몇 배는 될 법한, 무지막지하게 큰 칠흑색 문양이 새겨졌다.
문양이 새겨진 자리를 따라 흑염이 피어오르고, 연이어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날개 잃은 악몽을 바닥에 쑤셔넣고 충격파에 휘말려 날아가지 않도록 지탱했다.
바닥에는 성국의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약간 밝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교황들이 보면 엄청 화내겠네.’
저 문양을 새긴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신성 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스텔라와 셀레네가 보더라도 마찬가지일 테고.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는군.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냐?”
칠흑색 문양의 중심에서 몸을 일으킨 세계를 먹는 자가 입을 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을 하고 검은색 옷을 입은 남정네가 흑염 속에서 저러고 있으니 진짜로 악당 같기는 했다.
내가 이런 감상을 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지만.
“그런 싸구려 도발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안 됐네. 난 누구처럼 쓸데없는 짓거리나 벌이다가 꼴사납게 도망치는 성격이 아니라서.”
“…….”
이번 비아냥만은 그냥 넘기지 못한 듯, 놈의 눈썹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말 그대로 아주 살짝이었으나,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아직도 혓바닥을 놀릴 힘이 남아있나? 알았다. 힘을 더 빼주도록 할까.”
꿈틀, 세계를 먹는 자 근처의 바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잔뜩 깔린 칠흑색 무언가가 위로 솟아올랐다. 심지어 한두 개도 아니고 정확히 열에 달하는 숫자였다.
솟아오른 기둥이 점차 인간의 외형으로 바뀌었다. 그 정체를 알아본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보스들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내 곁에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진 보스들. 작정하고 노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젠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브닼 4에서 지겹도록 잡아봤던 보스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였다.
“원한다면 더 만들어주겠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마음껏 가지고 놀도록.”
“더럽게 익숙해서 갖고 놀기 지루할 정도인데, 다른 건 없냐?”
“다음부터는 고려해보도록 하지.”
놈은 그러면서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브닼 4의 보스들이 단체로 달려들었다. 혹시 저놈들이랑 같이 덤비려는 게 아닌가 하고 잔뜩 긴장했었는데, 적어도 지금 당장 그러지는 않을 듯했다.
혹시 모르니 긴장을 풀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하나하나 다 때려잡아야 하나?’
일단 거리를 벌린 내가 방법을 고민했다. 처음에는 일일이 다 때려잡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바로 그건 힘들다는 결론이 나왔다.
닼라 모드가 적용되어 있는 상태일텐데, 마나와 신앙이 그대로 있어도 될까말까한 상황에 맨몸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한 놈씩 상대한다면 몰라, 단체로 덤벼든다면 당할 재간이 없었다. 한 놈이라도 잡으면 다행이고, 그 전에 눈먼 공격이든 뭐든 처맞고 죽겠지.
애초에 브닼 시리즈에서 전통적으로 제일 피해야 하는 상황이 일대다 전투다. 잡몹과의 전투도 그럴진대, 심지어 보스전이라면 결과는 뻔했다.
‘……잠깐. 혹시 이 방법은 통할지 모른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르카나, 아르카나가…… 아, 저기 있네.’
그러기 위해선 마지막까지 살려둘 보스가 필요했다. 나는 재빨리 아르카나의 위치를 살폈다. 저 수많은 보스들 중에서, 범위공격에 제일 특화된 보스 말이다.
아르카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재빨리 그 앞까지 달려나갔다. 다른 놈들이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달려와 무기를 휘두르는 와중에, 아르카나는 교황들이랑 같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 손에 들린 지팡이가 푸른색으로 빛나며 마나의 격류를 생성해냈다. 아르카나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나로 이루어진 격류가 날 향해 내쏘아졌다.
나는 무척 익숙한 타이밍에 그걸 굴러서 피했고.
ㅡ콰아아아아악!
구르기로 회피한 나를 대신해 뒤에서 쫓아오던 보스들이 휩쓸렸다.
패배
ㅡ풀썩…….
목에 박아넣은 검을 뽑아내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비쩍 마른 몸이 무너져내렸다. 머리 잃은 몸뚱아리가 서서히 검은 진흙처럼 생긴 무언가로 바뀌어 사라졌다.
주변에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잠시 호흡을 정돈했다. 차라리 세계를 먹는 자와 일기토를 벌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빡셌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각도를 맞춰서 팀킬까지 유도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놈들한테 동료가 공격에 휩쓸리는 걸 보고 방향을 바꾸거나 공격을 중단할 지능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훌륭하다, 인간.”
짝, 짝, 짝.
저 멀리서 느긋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놀이는 재미있었나?”
멀찍이 떨어져 내 사투를 구경하던 세계를 먹는 자가 사람 열 뻗치게 하는 표정으로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럭저럭. 니가 같이 안 덤벼줘서 훨씬 수월했지. 같이 덤볐으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죽었을 건데 말이야. 아쉽게 됐겠어, 응?”
“전혀. 나는 너의 재롱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얻었고, 너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체력을 소모했다. 그 사실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저따위로 말하는 걸 보아하니 팀킬이 가능했던 것 역시 의도한 사항인 듯했다. 설마 진짜로 내 체력만 깎아두려고 그런 짓을 벌였던 건가.
‘……굳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얼굴이군. 원한다면 알려주겠다. 듣겠나?”
“그래. 어디 한번 들려줘 봐. 얼마나 잘난 계획을 세우셨는지 평가해줄 테니.”
자기가 알아서 시간을 낭비해준다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그래줄 마음은 없는 모양인지, 놈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좋다. 잘 듣도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짓한 감각에 다급히 앞으로 굴러 거리를 벌렸다. 수직으로 내리쳐진 롱소드가 칠흑색 바닥을 강타했다. 고개를 돌려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아이리스를 본따 만든 보스였다. 놈이 왼발을 앞으로 딛으며 왼쪽 허리춤에 찼던 검집을 오른쪽 옆구리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무게중심을 뒤로 싣자 검집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회색빛 바람이 모여들었다.
쿵, 놈의 몸이 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회전했다. 몸이 회전하는 동안 오른발이 앞으로 내딛어지고, 검집에서 롱소드가 뽑혀져나왔다.
오른발이 바닥을 힘껏 짓밟음과 동시에, 롱소드가 그린 수직의 궤적을 따라 바람으로 이루어진 참격이 날아들었다.
날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바람을 날개 잃은 악몽으로 튕겨냈다. 한 폭의 커튼처럼 날아들던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그 탓에 몸이 휘청였다.
곧이어 참격의 경로를 따라 또다른 바람이 솟구쳤다. 그것마저 옆으로 굴러 피하자마자 놈이 달려왔다.
‘1대1이라면 할만 하다.’
나는 그 손에 들린 롱소드를 튕겨내면서 빈틈을 노려 칼을 휘둘렀다. 저 뒤에서 세계를 먹는 자가 떠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너를 죽이기 위해서 소환한 게 아니다. 너를 죽이는 것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해야지. 굴욕을 되갚아줘야 하지 않겠나.”
“너 같은 놈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 의외네. 너처럼 베베 꼬인 성격이면 힘든 건 전부 아랫것들한테 시키고 막타만 칠 줄 알았는데!”
마지막 4타를 튕겨내고 중년 기사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목의 오른편으로 들어간 칼 끝이 왼쪽 귀 밑까지 뚫어버렸다. 꿈틀, 그 몸이 경련하는 걸 보고 칼을 빼며 물러났다.
놈은 목이 꿰뚫려놓고도 멀쩡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야 내 울분이 풀리지 않는다. 저런 하등한 것들에게 당해서 다 죽어가는 너를 처리해봤자 공허한 마음만이 남을 뿐.”
“저번에 우릴 가지고 논다면서 여유나 부려댔다가 한 방 먹었던 건 까먹으셨나 봐? 이번에도 그러겠다니, 그거 참 고맙네! 기회를 줘서!”
다음 패턴은 굳이 안 봐도 된다.
세계를 먹는 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조소하며 검을 휘둘렀다. 금속이 금속을 튕겨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확히 네 번 들린 다음, 내 쪽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칼 끝이 물컹한 살덩이를 깊게 찔렀다.
“그렇다면 어디 설명해보도록. 내가 너한테 어떤 기회를 줬지? 그것들이 서로 공격하도록 해둔 걸 말하나? 원한다면 수천, 수만 마리씩 다시 만들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런 걸 열 마리쯤 죽일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기회를 준 셈인가?”
회오리가 둘러진 롱소드를 튕겨내고, 놈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 검을 들고 있는 쪽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곧장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칼날이 머리를 반쯤 파고들자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칼을 뽑았다. 기우뚱,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날개 잃은 악몽에 묻은 이상한 액체를 털어냈다.
“너는 아직 내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인간. 그 이상한 힘과 용언을 제외하면 날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니 그렇겠지. 하지만 둘 다 실패만을 거듭했을 텐데?”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놈에게 상처를 입힐 유일한 방법인 진혼은 사용하는 족족 파훼당했고, 용언으로 새로운 법칙을 창조해보려 해도 저놈이 사용한 용언에 상쇄당했다.
다행히 먼저 걸어두었던 용언까지 풀린 것은 아닌 듯 했지만, 새로운 법칙을 창조해낼 수도 없었다. 그나마 저놈의 용언도 내가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시간은 너의 편이 아니라고. 네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이기 위해서에 불과하다.”
“글쎄. 나한테 몇번 더 당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를 직접 죽이겠다니, 원래 그런 점에 집착하는 놈들이 꼭 역으로 당하기 마련이다. 나중에 싸움을 끝내고 나서 시체에다 대고 충고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비웃음이 걸린 얼굴로 입을 열려던 세계를 먹는 자의 표정이 살짝 흥미롭다는 투로 바뀌었다.
“아, 그 여신이 찾아왔군. 너를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인간.”
“……뭐?”
이클립스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불사 지네를 어떻게든 처리했다는 의미다.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주렁주렁 데리고 있으니, 내가 보냈던 것들은 다 죽었나. 어차피 쓰고 버릴 목적으로 간단히 만든 것들인데 상관 없지. 기뻐해도 좋다, 인간. 네 곁에 있던 여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걸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뭔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다. 널 죽이고, 내가 너인 척 돌아가서 모두 죽여버리자는 생각이지. 어떤가?”
놈이 큭큭거렸다.
“기나긴 혈투 끝에 나를 죽이는 건 성공했지만, 내가 최후의 발악으로 심어놓은 정신 함정이 작동했다는 설정이면 충분하겠군. 흥미로운 계획이지 않나? 저 여자들은 너를 제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다 죽는 거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진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딴 치졸한 소리나 지껄이면 안 쪽팔리냐?”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꾹꾹 억눌렀다. 저건 날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지껄여대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은 없다.
“아니면, 너를 이곳에 버려두고 나 혼자 빠져나가서 모두 죽이고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있겠지. 걱정 마라. 목은 잘라와 줄 테니. 네가 죽는 모습을 목도해야 하지 않겠나.”
“…….”
“흠,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공격과 동시에 잘린 머리를 집어던지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공격에 맞으면서 머리를 붙잡아줄 건가? 공격을 피하고 머리가 땅에 닿아서 터지도록 내버려둘 건가?”
“…….”
“뭐 하고 있나? 내가 궁금증을 해결하러 가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라면 상관 없다. 그 편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 말, 정확히 네가 지껄였던 반대로 해주마.”
날개 잃은 악몽을 빼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날 도발해서 인내심을 깎아먹으려는 목적인 건 알지만, 슬슬 말을 못 들어줄 수준까지 이르렀다.
아직 분노 때문에 일을 그르칠 정도까진 아니니 괜찮았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고 그럴 일은 없다.
“어디 해 보아라.”
놈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 뒤로도 공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검, 단검, 대검, 창, 둔기, 철퇴, 도끼 등등. 익숙한 모습의 무기 수십 개가 놈의 손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쪽은 나였다. 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판을 깔지도, 원거리 공격을 사용하지도 않고 오직 근접 난타전만을 고집했다.
제일 까다롭던 점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내가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를 먹는 자의 손에 들린 무기가 외형을 바꾸었다. 날개 잃은 악몽과 비슷한 길이에 크기를 지닌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가볍게 튕겨내고 목을 노렸다.
칼날에 진혼이 담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놈은 피하는 대신 왼손으로 무기를 소환했다. 등 뒤에 가짜 본질이 나타나고, 날개 잃은 악몽이 갑자기 나타난 대검에 가로막혔다.
진혼이 180도 비틀려 가짜를 베고 지나갔다. 카가가각, 칼날이 대검의 표면을 긁으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칼을 거두어들이며 공격을 이어갔다.
ㅡ까앙!
그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들려 있었다. 도끼를 튕겨내고 목을 노렸다. 놈은 반사적으로 가짜 본질을 생성하며 공격에 맞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칼날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생성된 가짜 본질을 파고들었다. 균형을 잃은 세계를 먹는 자가 주춤거렸다. 그 틈을 타 검을 내리쳤다.
놈이 양손에 든 무기를 교차해 공격을 막았다. 진혼을 담은 칼날이 세계를 먹는 자의 머리 근처에서 엷게 진동했다.
“거창하게 선언한 것 치곤 별 거 없으신데?”
차라리 휘두르는 당식이 달랐다면 몰라, 이놈의 공격 방식은 브닼 4에서 플레이어 캐릭터가 사용하던 모션과 거의 일치했다. 그러니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비아냥거리자, 놈이 큭큭대며 얼굴에 비웃음을 띄웠다.
“한낱 인간 따위가 이런 강대한 재능을 보유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여신도 나름 안목이 있었나.”
‘뭐야, 이놈? 갑자기 왜 이래?’
이런 놈한테 인정받아 봐야 하나도 기쁘지 않다. 그냥 또 무슨 지랄을 벌이려고, 하는 생각만 떠오를 뿐.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싶었다.
가뜩이나 브닼 2랑 3 무기는 거의 안 쓰고 브닼 4 무기만 써대는 것부터 신경 쓰여 죽겠는데.
“네가 제일 잘 하는 것을 정면에서 꺾어 자존심을 부수려 했건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군, 인간. 아무리 나라도 이런 방식으로 널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여신조차 해내지 못한 업적이니 마음껏 기뻐해라.”
“싸우다 말고 뭔 지랄을ㅡ”
“기쁨은 잠시 뿐이겠지만.”
놈의 눈동자가 특유의 붉은색 세로 동공으로 변했다.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그걸 보고 오싹한 느낌을 받은 내가 급히 거리를 벌리려는 찰나, 놈의 발 밑에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컥?!”
충격파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온 몸에 격통이 몰려왔다.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턱 막혔다. 내장이 상했는지 목구멍을 타고 끈적한 액체가 올라오려 했다.
‘이…… 건……?’
선딜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다, 굉장히 익숙한 색과 모양을 띠는 충격파.
루치아 보스전에서 루치아가 사용하던 패턴이었다.
정말 극한까지 집중하고 있어도 제때 피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패턴인데, 하물며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다면 피하기는커녕 반응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충격파를 정통으로 처맞은 내가 휘청이는 동안 세계를 먹는 자가 움직였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인지했는데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ㅡ푸욱!
배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꽂혔다. 목구멍에 비릿한 액체가 차올랐다. 그걸 왈칵 뱉어내자, 붉은색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힘겹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개 잃은 악몽과 똑같이 생긴 검이 복부에 꽂혀 있었다. 팔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검을 쥔 손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참 길고도 길었지.”
세계를 먹는 자의 중얼거림과 함께 복부에 꽂힌 칼이 움직였다.
살이 갈라지고, 갈비뼈와 쇄골이 부서지고, 내장과 근육이 찢겨나가며 배에 꽂힌 칼이 오른쪽 어깨로 빠져나왔다.
명치 부근부터 오른쪽 어깨까지가 통째로 베여나간 상태였다. 지지대를 잃은 오른쪽 팔이 어깨부터 아래로 축 늘어졌다. 징그럽게 피를 쏟는 절단면이 보였다.
눈앞이 아찔했다. 시야가 뒤집히며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등부터 처박혔지만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비릿한 향을 지닌 붉은색 액체가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역류했다.
“뭐가…… 쿨럭, 길었, 다고…….”
“네놈에게 착각을 심어주는 일 말이다. 의심도 많더군, 인간.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로 오래 걸렸어.”
기침을 하자 입으로 피가 흘러넘쳤다. 옆구리살로 간신히 몸에 붙어있을 뿐인 오른팔은 아예 감각이 사라져버렸고, 그나마 감각이 남아있는 왼팔은 벌벌 떨리기만 했다.
“내가 네놈과의 싸움을 왜 이렇게 질질 끌었다고 생각하나? 단순히 네놈을 죽일 목적이라면 다른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놈이 뒷짐을 지고 내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날개 잃은 악몽을 저만치로 걷어찼다.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인간. 네게 복수할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
쿨럭.
“거의 다 밀어붙였다고 생각한 찰나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구도일 텐데.”
“……커흑, 너…… 이, 미친…….”
“이걸로 날 공격했던 빚은 갚아주었다, 인간. 나는 당한 걸 똑같이 갚아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아서 말이야.”
미친놈. 나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다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자세 탓에 피가 눈 근처에 고였다. 시야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놈은 그러든 말든 자기 혼자서 말을 이었다.
“그 점이 무척 신경쓰이지 않던가? 내가 왜 ‘브라티스트 다크니스 2’와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3’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무기만을 사용했는지?”
“……설마, 쿨럭. 일부, 러……?”
“아주 약간의 의심이라도 시작된 순간, 너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에 할당되지. 자그마한 의심이라도 모이고 모이면 그 너머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든다.”
어쩐지 처음에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는 죽어라 브닼 4 무기만 쓰더라니. 애초에 내가 의문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나.
“너의 외형으로 모습을 바꾸고, 철저하게 네가 사용했던 무기만을 사용하고, 네가 겪었던 보스들을 소환해 덤비도록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네 생각을 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저놈이 내 외형으로 나타나서 브닼 4의 무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나는 무의식적으로 저놈이 내가 사용했던 무기와 기술만을 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 지식을 모두 받아들였다면 필시 보스가 사용하는 패턴도 이해했을 텐데 말이다.
“아, 말이 너무 길었군. 너처럼 질긴 놈이라면 이 와중에 날 죽일 방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는데. 쓸데없이 위험을 남겨둘뻔 했어.”
오른손에 날개 잃은 악몽을 만들어낸 세계를 먹는 자가 머리 근처로 다가왔다. 구태여 저 무기를 선택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악감정이 남은 모양이었다.
상처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아픔을 느낄 감각 자체가 희미해져가고 있었으니까. 팔다리가 어디 붙어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든데 고통 따위가 느껴지겠는가.
“이제 날 막을 존재는 없다.”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날 향해 휘둘러지는 날개 잃은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