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90)
패배 이후의 세계 – 1
세계를 먹는 자의 동공이 바닥에 싸늘하게 죽은 채로 널브러져 있는 어느 한 인간의 시체를 응시했다.
오른쪽 명치 바로 옆부분부터 시작된 자상은 오른쪽 어깻죽지를 향해 그 사이의 뼈를 죄다 부수며 솟아올랐고, 덕분에 옆구리 피부로만 연결된 오른쪽 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절단면으로 피와 내장, 부서진 뼛조각과 뜯겨나간 살점이 줄줄 흘러 바닥을 적셨다. 몸 근처가 이미 피범벅인지라 언뜻 보면 시체가 빨간색 물웅덩이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 무척 핼쓱했다.
참으로 질긴 녀석이었다. 세계를 먹는 자는 오른손에 구현한 검은색 무기를 없애버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낱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끈질겼다.
지금껏 수많은 세계를 먹어왔지만, 여신을 제외하면 단일 개체와 이렇게 오래 전투를 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에게 상처를 입었던 적도 없었고.
“더 오래 가지고 놀았어야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완벽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 끝에 이룬 성취였으나, 객관적으로는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상처가 너무 컸던 나머지 얼마 안 돼서 죽어버린 것도 있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놈의 눈에 전투 의지가 살아있던 것 역시 무척 아쉬웠으니까.
그 마지막 전투 의지까지 부숴버려서 절망에 빠진 얼굴이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채 죽였어야 완벽하다고 부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너 같은 것을 그대로 살려둘 수도 없었겠지.”
물론 곧바로 죽인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마음같아서는 목숨을 붙여둔 채 조롱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런 짓을 벌였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똑같은 짓을 두 번 반복할 순 없다.
설령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한들 어쨌든 죽였으니 된 것이기도 하고.
ㅡ이제…… 끝을 내야 하겠지…….”
세계를 먹는 자의 외형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꼬리가 생기고, 손과 발이 아닌 앞다리와 뒷다리가 바닥을 힘차게 내딛고, 등 뒤에 커다란 날개가 솟아났다.
고작 인간 시체 따위로는 눈동자조차 다 가리지 못할, 작은 산과 맞먹는 크기를 지닌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성과 비슷한 길이의 동공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입에서 브레스가 준비됐다. 세계를 먹는 자가 내뿜을 수 있는 최대 위력의 브레스였다.
과한 위력은 절대로 아니었다. 확인 사살은 철저할수록 좋고, 괜히 시체를 남겨뒀다가 쓸데없는 일을 초래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마음같아서는 저놈의 목을 잘라서 여신에게 보여주며 조롱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여신이 저 인간을 살려낼 가능성도 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조차도 제공해주고 싶지 않았다.
드래곤의 가슴 중앙이 칠흑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목에서부터 터져나오는 브레스가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내는 브레스.
세계 하나를 멸절시킬 위력을 담은 숨결이었다.
ㅡ치이이이익…….
몸 곳곳이 붉게 달아오르며 연기를 내뿜었다. 드래곤의 몸으로도 쉽사리 견디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딛고 서 있는 바닥이 녹아내릴 정도였으니 그 온도를 짐작할만 했다.
칠흑색 빛이 천천히 상승했다. 가슴을 지나고, 목에 들어섰다. 몸 전체를 휘감은 열기가 눈을 통해서 빠져나가며 시뻘건 색깔의 세로 동공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 위력의 브레스를 준비한 세계를 먹는 자가 앞발로 힘차게 땅을 내딛었다.
그 입이 쩌억 벌어졌다.
ㅡ쿠오오오오오오오!!!!!!
한껏 벌어진 입 사이로,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칠흑색의 브레스가 터져나왔다.
우선적으로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의 공간이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형성했다. 공간 너머로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세계 그 자체를 녹이는 힘이 인간의 시체를 향해 쏟아졌다.
당연히, 고작 시체 따위가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체는 브레스가 직접 닿기도 전에 액체로 변하는 단계를 건너뛰며 승화해버렸다. 공간마저 녹아내린 자리를, 브레스가 한 발 늦게 덮쳤다.
녹아내린 공간이 한데 뭉치고, 뭉친 자리에서 다시 녹아내리며 근처의 개념까지 뒤틀었다. 검게 뒤덮인 세계가 무너지며,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찾아왔다.
세계를 먹는 자의 입은 무려 1분이 넘는 시간동안 브레스를 쏘아낸 후에야 닫혔다. 비늘 사이로 피어오르던 연기가 잠잠해졌다.
그 앞의 공간은 원래 모습조차 알 수 없을만큼 녹아내린 상태였다.
ㅡ…….
주변을 초토화시킨 드래곤은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을 보냈다.
만에 하나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른 술수를 써서 부활할 수도 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선 상황을 조금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세계를 먹는 자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그 동안 아무런 생명의 징후도 없고, 살아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놈이 죽었음을 확정지었다.
ㅡ남은 것은…… 하나인가…….
작은 산처럼 거대했던 몸이 줄어들었다. 몸집을 키웠을 때와 정확히 반대되는 과정을 거치며, 세계를 먹는 자의 외형이 다시금 델타의 외형을 갖췄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본질까지 완벽하게 위장한 드래곤이 새빨간 공간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인간을 도발할 목적으로 떠벌렸던 것, 그걸 실행에 옮겨볼 생각이었다.
통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까.
자신이 가진 저 인간의 기억은 오직 그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에만 한정된 것이다. 질문 몇 개만 해봐도 금방 들통날 거다.
어차피 남은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신은 지금껏 해왔던 대로 상대하면 되고, 나머지는 그 이상한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는 것들이므로.
검은 공간 자체를 붕괴시킨 세계를 먹는 자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불사의 사명을 상징하는 표식이 아주 짧게 빛났다.
“…….”
이클립스는 열심히 델타의 위치를 알아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빨간 세계에서는 무엇 하나 감지되지 않았다. 델타의 기척도, 그리고 그 망할 드래곤의 기척도.
마지막으로 감각을 한계까지 확장한 이클립스가 빛을 거두어들였다. 간절한 표정으로 빛무리를 바라보던 여자들이 바짝 긴장해선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델타는 이 세계에 없구나.”
“……네? 그것은 어떤 의미이십니까?”
“단어 그대로란다. 그놈이 만든 이 세계에서 델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지.”
“그렇다면 설마…… 돌아가신ㅡ”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진정하렴. 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래로 빨려들어갔다고 했지? 아마 심층 공간으로 끌려갔을 듯 하구나.”
심층 공간이라는 말에 주위 여자들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변했다. 그 눈빛을 읽은 이클립스가 덧붙였다.
“나도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알지 못한단다. 내가 창조한 세계가 아니라 그놈이 창조한 세계였으니.”
“……찾을 수는 있는 것입니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무척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감안하렴. 그 수많은 공간을 하나하나 뒤져보아야 하니……?”
이클립스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저반치에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칠흑색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인영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클립스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델타?”
델타였다.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날개 잃은 악몽을 지팡이 삼아 걸어오던 델타는, 이쪽을 향해 약간 수척해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옆으로 날아가려던 이클립스가 잠시 멈춰섰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그 본질마저 델타와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오히려 비슷하기에 이상하다는 그런 감각.
델타와 닮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위화감이 든다. 애초에 저것이 델타가 맞다면 ‘닮았다’라는 표현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니까.
이클립스를 이클립스와 닮았다고 하는 게 이상하듯이, 델타를 델타와 닮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위화감을 느낀 이클립스는 제자리에 멈춰서서 우물쭈물거렸다. 그 위화감의 정체가 뭔지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나머지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는지, 환한 표정 구석에 긴가민가하는 눈치가 하나씩은 꼭 껴들어 있었다. 그리고 델타를 반겨주러 뛰쳐나가지도 않았다.
이클립스 혼자만의 착각도 아니고 다 같이 이런다면 뭔가 있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게 진짜가 맞다면 나중에 몸으로 사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클립스가 델타의 발을 멈춰세웠다.
근처에 빛으로 이루어진 삐죽삐죽한 가시창이 솟아오르자, 발을 멈춘 델타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이클립스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뭡니까?”
“잠시만 멈춰주세요. 하나만…… 딱 하나만 질문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제가 아는 델타가 맞나요?”
“제가 아는 델타가 맞냐니.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여신님. 방금 전까지 죽어라 싸우다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뜬금없이 왜 그러십니까?”
델타가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 위화감이 들어서…….”
“위화감……? 아,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중간에 그놈이 쓴 용언 때문에 큰일 날 뻔 했거든요. 그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렇게 느껴지시는 거겠죠.”
“…….”
이클립스가 망설였다. 겨우 위화감이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델타를 언제까지고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명확한 근거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주위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하나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생각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말이죠. 그거, 좀 많이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기껏 살아서 돌아왔더니 그런 눈으로 바라봐지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요? 네?”
델타의 표정에 짜증이 깃들자, 심약한 몇 명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곳의 그 누구도 저 남자가 화를 내는 모습만큼은 보고싶지 않았으니까.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델타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가고 있는지라 당황하는 마음이 더 컸다.
여태껏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던 델타였으니 더더욱.
“잠시만, 델타.”
이클립스가 허둥지둥 빛의 창을 거두려는 찰나, 가만히 있던 아우로라가 나섰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델타도 일단 화를 참고 답을 해주려는 분위기였다.
“……네, 폐하. 무슨 일이시죠?”
“하나 묻고 싶어서. 저번에 너 살아돌아오면 물어보겠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그런 말도 했었습니까?”
“했어.”
“뭐…… 그러면 제가 똑바로 못 들었겠죠. 뭔가요?”
“예전에 네가 그 이상한 창으로 내 아빠 죽였을 때, 그걸 어디서 가져왔다고 했지? 나중에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고 싶어서 그래. 혹시 모르잖아.”
델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다, 라…….”
아우로라의 황금빛 금안이 살벌하게 변했다.
아무리 델타라 해도, 그때 그 악마가 깃든 책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잘 모를 수는 있다. 애초에 제법 된 일이니까. 정확한 장소까진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때 손에 든 무기가 뭐였는지는 잊어선 안 됐다.
“너, 누구야?”
그 말을 들은 델타의 동공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