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292)
패배 이후의 세계 – 3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이었기에, 옆에 있던 에리카나 아이리스, 클라우디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리제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전히 얼굴에 비웃음을 띄우고 있는 세계를 먹는 자가 당돌하게 나선 인간 여자를 조롱이 한껏 담긴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짝, 짝, 짝,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참으로 용감하다. 이곳에는 어떤 이유로 나섰지?”
“더는 못 들어주겠다고, 그쪽 말. 듣자듣자하니 벌써부터 다 이긴 것처럼 입을 나불대는 것 같은데.”
“이런, 용감함이 아니라 주제를 모른 것이었나. 슬픈 일이로군. 진실을 말해주어도 듣지를 않으니. 정말로 내가 이긴 것이 맞다면 어떻게 할 텐가?”
“헛소리. 난 그쪽이 델타가 죽었다고 떠벌리는 것도 안 믿었어.”
세계를 먹는 자의 얼굴에 걸려 있던 비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스스로의 자유다, 인간. 하지만 명심하도록. 현실을 부정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진실을 목도한 순간의 좌절과 절망 역시 커질 터.”
“진실을 목도해? 내가 믿는 진실이라고는 그쪽이 거짓말을 한다는 거랑 델타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 뿐이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군. 너희들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 인간이 유품으로 남긴 이상한 힘을 들고 있다 해서 무언가 달라지리라 생각하나? 그 힘을 이용하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리제는 대답 대신 표면에 서리가 끼기 시작한 단검을 치켜들었다.
“어리석은 자여. 불가능한 일에 매몰되어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다니 안타깝다. 근거 없는 믿음은 곧 억측과 망상으로 이루어진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근거라면 있어. 델타가 어떤 사람인지 옆에서 봤으니까.”
푸른색 단검에 시퍼런 냉기가 감돌았다. 후우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이 새하얀 입김으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걔가 뭘 했는지 봤고, 뭘 알고 있는지 봤고, 뭘 하려고 했는지 봤으니까. 그러니까…….”
서리로 뒤덮여 완전히 새하얘진 단검이 짧게 빛났다.
“나는 싸울 거야. 델타가 돌아올 때까지.”
세계를 먹는 자는 그 대답을 듣고 기꺼이 웃음을 터뜨려주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드래곤이 인간처럼 웃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카이킬리아가 이를 갈며 성검을 겨누고, 플로레타와 루나는 성유물을 쥐었다. 스텔라와 셀레네가 교황들의 뒤로 다가가 철퇴와 레이피어에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은빛 여명 기사단의 나머지 세 기사단장이 리제의 옆에 섰다. 미네르바와 닉스가 카이킬리아의 옆으로 이동하며 각각 지팡이 끄트머리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제자리에 멍하니 있던 아우로라를 향해 이클립스가 속삭였다.
“너도 같이 싸우기를 원하는 걸까, 아이야?”
“……당연하죠. 저 혼자서만 뒤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는 않아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떡하겠니?”
“정말인가요?!”
아우로라가 튀어오르듯 눈앞의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이클립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게 가능성을 부여해줄 수 있단다. 너의 미래가 지닌 가능성 중 하나를 현재에 덧씌우는 것이지. 하지만…….”
말꼬리가 살짝 흐려졌다.
“일단 가능성을 한번 덧씌우고 나면, 너는 절대로 그 미래를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걸 명심하렴. 네가 이번에 검을 쥐고 싸웠다면 다시는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고, 마법으로 싸웠다면 다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지. 신성력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인간의 몸으로 미래를 감당하는 대가란 그런 것이란다.”
“…….”
“그래도 하겠니?”
“하겠습니다.”
아우로라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즉답했다.
다시는 검을 휘두르지 못해? 앞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상관 없다. 어차피 그런 힘에는 미련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우로라가 원하는 것은 강해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저 델타의 외형을 하고 있는 놈과 싸울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후의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ㅡ톡.
황금빛 눈동자에 차오른 의지를 확인한 이클립스가 아우로라의 머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렇게 될 거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우로라의 전신에 뻗은 마나 회로가 모두 개방되며 손끝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나왔다. 깜짝 놀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뒤를 쳐다보았다.
특히 미네르바는 나머지가 다시 고개를 돌린 이후에도 아우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금은 사라져버린, 저 아이의 가능성 중 하나를 깃들게 해준 거란다.”
“가능성 중 하나, 라고요……?”
미네르바는 아우로라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푸른색 마나를 살폈다. 이만하면 지금 당장 마탑에 들어오더라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다.
“아이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힘이란 사실을 명심하렴. 몸이 오래 버텨주지는 않을 거란다. 그리고 힘이 모두 사라지면 아이는ㅡ”
“다시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되겠죠. 알고 있어요.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델타에게 저도 같이 맞서 싸웠다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마침내 아우로라마저 미네르바를 데리고 카이킬리아의 근처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세계를 먹는 자는 오히려 손에 든 무기마저 없애버리며 조소를 흘렸다. 각자의 무기에 진혼이 깃들고 있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결정한 여자들이라……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로군.”
세계를 먹는 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너희들의 의지는 잘 알았다. 그렇다면 어디 전력을 발휘해보아라. 혹시 아느냐, 그 남자랑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을지.”
“헛소리를.”
카이킬리아가 제일 먼저 튀어나갔다. 돌진하는 인영의 뒤를 황금색 빛이 바짝 따라붙었다. 세계를 먹는 자는 무기를 사용할 가치도 없다는 듯 주먹을 휘둘렀다.
허공을 찢으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카이킬리아는 성검을 옆으로 들어서 충격파를 막으려 했지만, 분명 막았음에도 등부터 땅에 처박혀 한참을 밀려났다.
“커흑……! 쿨럭…….”
간신히 멈춰선 카이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오른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발목이 180도로 꺾여 있었다.
“정말로 날 죽이려고 덤벼든 것이 맞나?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뒷짐을 지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에 플로레타와 루나가 나서려 했으나, 브레스가 토해지는 것이 한 발 빨랐다. 교황들이 다급히 신성 장벽을 펼쳤다.
칠흑색 브레스가 황금색과 은색으로 이루어진 빛의 장막에 충돌했다. 장막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깎여나갔고, 2초도 못 되어 싸그리 증발했다.
교황들은 장막이 녹아내리는 순간 그 자리를 벗어났다. 브레스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쳤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도 살이 녹아내리고 근육과 뼈가 드러났다.
“고작 그것이 전부인가?”
플로레타와 루나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며 치료를 시작한 사이, 스텔라와 셀레네가 발을 움직였다. 스텔라는 정면으로, 루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사각을 노렸다.
“……!”
소용 없는 짓이었다.
머리를 노린 무게추는 아주 간단히 손바닥에 붙잡혔다. 레이피어도 마찬가지로 아주 간단히 손바닥에 쥐어졌다. 그 안에 담긴 진혼은 허무하게 가짜 본질을 향했다.
두 명은 어떻게든 붙잡힌 무기를 빼내려 발버둥을 쳤지만, 세계를 먹는 자의 손은 스텔라와 셀레네가 동시에 발악을 하고 있음에도 일말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형편 없군.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다.”
무기를 쥐고 있던 팔이 가볍게 움직였다. 정확히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간 스텔라와 셀레네의 몸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혹시 그 둘이 휘말릴까 전전긍긍하던 은빛 여명 기사단장들이 거리를 좁혔다. 리제가 선두였고, 아이리스가 그 다음이었으며, 클라우디아와 에리카가 양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계를 먹는 자는 제일 앞에 선 리제가 단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움직였다. 그 손이 푸른색 단검을 붙잡고 옆으로 집어던졌다.
리제와 에리카가 있는 힘껏 충돌했다. 으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부딪힌 자리의 뼈가 박살났다. 리제는 어깨뼈였고, 에리카는 허벅지뼈였다.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아이리스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투박한 롱소드에 담긴 본질을 베는 힘이 엷게 떨렸다.
“내가 뭐라고 했지?”
하지만, 다음 순간에 세계를 먹는 자는 공격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카이킬리아를 날려버렸던 것과 똑같은 충격파가 아이리스를 덮쳤다. 아이리스는 피를 왈칵 토하며 저만치로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클라우디아의 대검이 세계를 먹는 자의 목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가짜 본질로 진혼을 흘려보낸 세계를 먹는 자가 대검의 칼 끝을 밀었다.
ㅡ푸우욱!
뒤로 밀려난 대검의 손잡이가 클라우디아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휘둘러지는 검을 밀어서, 그것도 칼 끝이 아니라 손잡이로 인간의 흉부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아, 마법이로군. 그렇다면 동료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나 줘야겠지.”
클라우디아가 바닥에 쓰러지고, 세계를 먹는 자가 텅 빈 공간으로 이동했다. 저만치에서 남은 인간 셋이 마법을 준비하는 걸 봐서였다.
어디 쏘아보라는 듯, 그 고개가 느긋하게 위아래로 까딱여졌다. 미네르바와 닉스, 아우로라가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메테오가 추락하고, 흑염이 대지를 집어삼켰으며, 남은 공간을 감히 헤아리기도 힘들 숫자의 마나 창이 채웠다.
“이게 전부인가?”
세계를 먹는 자는 뒷짐을 진 채 태평히 마법을 감상하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칠흑색의 브레스가 터져나왔다.
브레스에 아주 잠시 스친 3명의 팔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아우로라는 증발해버린 팔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눌러 참았고, 닉스와 미네르바는 고통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곧이어 마법이 떨어졌지만, 세계를 먹는 자는 그 생지옥 속에서도 멀쩡한 모습으로 유유히 걸어나올 뿐이었다.
“이제 너의 차례다, 여신.”
딱, 하고 놈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이클립스를 가두고 있던 검은 공간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이클립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처음 손가락을 튕겼을 때부터 줄곧 검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나. 빨리 치료해주지 않으면 죽을 텐데?”
세계를 먹는 자가 턱짓을 했다. 교황들도, 미네르바도, 닉스도, 아우로라도. 이곳의 그 누구도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이클립스는 허둥지둥 빛의 장막을 펼쳤다. 증발한 팔이 되돌아오고, 부러졌던 뼈가 붙고, 뒤틀린 몸이 회복됐다.
아무리 치료 마법과 신성 주문을 쏟아부어도 고쳐지지 않던 상처들이 이클립스가 펼친 장막에 닿자마자 말끔하게 나았다.
세계의 법칙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똑똑히 보아라, 인간들아.”
부상자들을 한 데 모아 장막으로 감싼 이클립스를 향해 세계를 먹는 자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손에는 어느새 날개 잃은 악몽의 외형을 한 검이 들려 있었다.
“너희들의 여신이 패배하는 모습을.”
불사의 사명
나는 이상한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사실 떠다닌다는 표현이 옳은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로 흘러간다는 감각만이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물 속에 잠겨서 힘을 빼고 있으면 이것과 비슷한 감각일 듯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구분 못 할 지경이었다. 눈을 감았다고 생각해도, 떴다고 생각해도 보이는 것이라곤 암흑만이 전부였기에.
‘……죽은 건가?’
하염없이 흘러가던 시간 속에서 문득 떠오른 기억이었다. 무료함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며, 떠오른 기억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이 내 복부에 칼을 찔러넣었고, 마지막에는 머리가 날아갔었다. 인간은 머리가 날아가면 대부분 죽는다. 나 역시 그때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죽은 거라면,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뭔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배부터 어깨까지 통째로 찢어졌으니 가만히 놔두더라도 죽었을 거고, 마지막에는 머리까지 날아갔다. 살아있다고 여기는 쪽이 더 이상했다.
그런데, 막상 죽었다고 하자니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행동 자체가 마음에 걸렸다. 이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상황이 정리되기는 커녕 머리만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모르겠다. 그냥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길까.’
어차피 결론을 낸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다. 나는 그 도마뱀한테 졌고, 그래서 죽은 거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하고 대충 넘기는 것이 제일 속 편할지 모른다.
이미 많이 해왔던 행동이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명확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꾸역꾸역 상처를 누르고 죽음을 짓밟으며 나아가지 않았는가.
그 행동에 목적 따윈 없었다. 이유도 없었다. 그저 죽지 않았기에 움직였음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비슷하게 받아들이면 그걸로 끝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라는 개념이 육체를 벗어났다.
몸이 희미해지는 감각은 점차 위쪽으로 상승했다. 곧이어 팔꿈치 아랫부분이 사라지고, 무릎 밑이 사라졌다. 그렇게 팔뚝과 종아리를 먹어치우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까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걸 떠올리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내가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아무거라도 좋았다. 주의를 돌릴 것이 필요했다. 온갖 잡다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그러자, 희미해져가던 사지의 감각이 돌아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움직이고 있었다. 발가락도 꼼지락거려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 여기가 실재하는 공간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디인지는 일단 제쳐두고 말이다. 그러니 팔다리가 사라졌던 감각이나 사라졌던 게 돌아온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뭐 하는 세계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대충 넘기기로 결정하자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니 사라졌던 몸이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상황인가 싶었다.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세계를 먹는 자와 싸우다 배가 꿰뚫렸고, 놈이 마무리를 하겠답시고 머리를 날렸다. 이건 수십 번도 더 돌이켜본 기억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가 현실일 리는 절대로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죽은 다음에 사후 세계로 떨어졌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아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단칼에 부정했다.
그게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둘째치더라도, 만약 여기가 사후 세계라면 이클립스든 세계를 먹는 자든 둘 중 하나는 내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니까.
이클립스가 알아차렸다면 나를 데리러 왔을 거고, 세계를 먹는 자가 알아차렸다면 나를 완전히 죽이러 왔겠지. 그러고 있지 않은 이상 여기가 사후 세계일 가능성은 적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언제부턴가 몸의 감각이 훨씬 더 선명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흐르는대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떠져라.’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강하게 꿈틀댔다.
‘떠져라.’
다시 한번 명령했다. 단어 하나에 힘을 담고, 목적을 담고, 의지를 담았다.
눈이 떠졌다.
칠흑색의 동공에 세상이 반사됐다.
“…….”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검은색 무언가로 이루어진, 혹은 텅 비어버렸기에 검은색인 공간을 오직 나만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내 몸을 살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착용하고 있던 칠흑색의 제복. 딱히 바뀐 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려던 나는 손등에서 밝게 빛나는 화사한 색채를 확인했다.
손등을 뒤집었다.
“이게 왜 여기……?”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불사의 사명을 상징하는 표식. 황금색과 은색을 반씩 섞어놓은 그 표식이, 게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 오른손등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리둥절함 다음으로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 육체에 불사의 표식이라니, 도저히 말이 안 됐다.
나는 브닼 3에서 최후의 불사 지네를 처치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진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살했고, 자연히 육체는 말라 비틀어졌다. 이건 이클립스가 새로 만들어준 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만들어진 육신에 불사의 표식이 새겨질 수 있단 말인가? 이클립스가 새 육체를 만들면서 불사의 사명을 제멋대로 부여한 것도 아닐 텐데.
애초에 사명 따위는 브닼 1의 시대에서 끝났다. 브닼 2는 그저 망가진 영혼을 회복하는 과정에 불과했고, 브닼 3는 불사 지네를 처치하기 위한 여정이었으니까.
브닼 4는 애초에 세계부터가 다르니 그런 걸 논할 이유조차 없ㅡ
‘……잠깐.’
정말로, 관계가 없는 건가?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세계를 구원하고, 영혼을 회복하고, 불사 지네를 처치한 것으로 내 사명이 끝났나?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이, 정말로 그게 맞았나?
뭘 위해서 여기로 왔는데?
“으윽……!”
그 사실을 자각하자, 손등에서 무언가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불사의 사명을 상징하는 표식이 정말로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주위를 뒤덮은 어둠은 감히 그 빛에 다가서지 못했다.
“……그랬었나.”
오른손을 강하게 쥐었다.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여기로 온 목적은 세계를 먹는 자에게 빚을 갚는 거였으니까. 이클립스가 날 여기로 데려와 생고생을 시키게 만들어야 했던 빚을 말이다.
갚을 빚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아직이다.”
몸에 혈색이 돌았다. 하얗던 피부가 원래 색으로 돌아갔다.
“아직…… 안 끝났어.”
호흡이 재개됐다. 목을 움직여 숨을 들이쉬였다. 굳어있던 사지가 삐걱였다. 체온이 상승하고,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쿵, 쿵 하고 작은 맥동 소리가 들렸다.
ㅡ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1을 즐기면서 망가진 불사자를 여럿 보셨을 것이다. 모두 한때는 불사의 사명을 부여받은 인간이었지만, 반복되는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영혼이 망가져 육체만이 남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주인공이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의지 때문이다.
ㅡ게임에서는 편의상 체력으로 표기되지만, 그건 사실 정신력을 의미한다. 불사자이기에 절대 죽지 않고, 상처는 자동으로 회복되니 체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겠나.
ㅡ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1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력이 0까지 깎여 잠시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1의 죽음이다. 한마디로 일시적인 기절 상태라고 보면 된다.
ㅡ하지만 주인공은 기절하더라도 다시 일어난다. 묵묵히 플레이어의 의지를 따라 공격하고, 피하고,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게임의 엔딩에 도달한다.
ㅡ주인공은 절대 꺾이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꺾이는 순간은 오로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포기할 때 뿐이다.
ㅡ플레이어가 있는 한, 주인공 역시 언제나 그곳에 있다.
브닼 5의 소식이 없은 지 7년째 되던 무렵에, 뜬금없이 재발굴되어 밈으로 써먹혔던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 제작사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꺾이는 때는 오로지 플레이어가 게임을 포기했을 때 뿐이라고. 플레이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인공 역시 그 의지에 따라 몇 번이든 묵묵히 다시 일어날 거라고.
“주인공은 꺾이지 않는다…… 그래. 맞는 말이네.”
그리고, 나는 아직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ㅡ파아아앗!
내 의지에 따라, 불사의 사명을 상징하는 표식이 한층 더 강하게 발광했다. 영혼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사명이 죽음이라는 트리거를 통해 완전히 깨어났다.
이것이 존속하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한, 나는 꺾이지 않는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몸의 감각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나는 내 두 다리로 서 있었고, 내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내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억눌린 최후의 기억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려왔다. 수없이 반복되었던 죽음들이, 그 경험들이, 모두 내 안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육체가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돌아오다
리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중년 남성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렸다. 푸른 단검에 깃든 진혼이 그 존재를 부정하자 목 잘린 몸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한 명이 없어진 자리를 세 명이 메꿨다.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난 리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라우디아도, 에리카도, 아이리스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경과는 영 좋지 못했다. 처음에 비해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호흡은 거칠었고, 흰 민소매는 땀으로 푹 젖어 속이 살짝 비쳤다.
하지만 쉴 틈 따위는 없었다. 리제는 휘둘러지는 푸른 단검을 받아치며 이를 악물고 팔을 휘둘렀다.
“왜 그러지? 벌써 힘들기라도 한 건가?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이것들이 너희 세상에 퍼질 텐데?”
이클립스와 싸우면서도 이곳에 남은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던 세계를 먹는 자가 그런 리제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사실 싸운다는 말도 별로 적절하지 않았다. 이클립스는 단 한번의 유효타도 먹이지 못한 채 말 그대로 압도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차마 전투라고 불릴 수조차 없는 무언가였다.
“뒤에서 응원만 하고 있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었거늘, 왜 기쁘지 않은 표정이지?”
자비라니,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바닥에서 무한정으로 기어나오는 복사본들은 이쪽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지.
만약 죽일 작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스펙을 왕창 올려서 내보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원본에 비해 아주 살짝만 모자라서 온 힘을 다하면 죽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터져라!”
아우로라의 손 끝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결정이 산탄처럼 튀어나왔다. 인간들의 몸에 퍽퍽 박혀들어간 결정 산탄은 그 몸 안에서 다시 한번 작은 덩어리로 쪼개졌다.
산탄에 직격당한 인간들이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바닥을 굴렀으나, 그러고도 꾸역꾸역 일어나 덤벼들었다. 구멍으로 피가 새어나오든 말든, 뼈가 부서졌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이 끈질긴 것들…….”
아우로라가 험한 말을 하는 사이, 황궁에 나타났던 여자와 똑같이 생긴 인간의 손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아우로라는 이를 악물고 방어 마법을 펼쳤다.
수백 개의 결정 산탄이 방어 마법을 두들겼다.
ㅡ콰직!
“아악!”
마법은 얼마 버티지 못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보호막을 꿰뚫고 들어온 산탄 하나가 오른쪽 종아리에 박혔다. 아우로라가 몸을 휘청였다.
연이어 수십 개의 산탄이 보호막을 박살냈으나, 다음 순간에 아우로라는 다른 어딘가로 이동해 있었다. 미네르바의 옆이었다.
자신의 복제품을 상대하면서 마법이 아군을 해치지 않도록 범위까지 조절해야 했기에, 미네르바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 가슴골까지 땀투성이였다.
미네르바가 뺨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집중하려무나, 아이야. 아직 무너져서는 안 된단다.”
“……죄송합니다, 미네르바 님.”
“죄송할 것이 무엇이 있겠니. 필요하다면 잠시 쉬렴.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벌어볼 수 있을 것 같구나.”
“아니요.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아우로라는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며 어떻게든 일어섰다. 여기서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었다.
치료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의 법칙인지 뭔지 때문에 상처 치료가 불가능하니까. 저 델타의 모습을 한 쓰레기같은 것이 직접 설명해준 사실이었다.
안 믿고 시도해본 결과 그 말이 맞았다.
“잘들 발버둥치는군. 그렇지 않나, 여신?”
그 모든 것을 비웃음이 한껏 담긴 눈으로 바라보던 세계를 먹는 자가 이클립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낱 인간들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여신씩이나 됐는데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나?”
“쿨럭, 닥치…….”
“입버릇이 나쁘군.”
날개 잃은 악몽이 검집째 이클립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헛숨을 들이킨 이클립스가 맞은 자리를 부여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케흑, 하고 숨을 토해내자 입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그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피부 곳곳이 찢어지고, 시퍼런 멍이 열 군데도 넘게 들어 있었다.
“이쯤 되면, 너 같은 것이 정말로 여신이 맞는지부터 의심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클립스는 일말의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힘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저놈은 강해지고 이클립스는 약해진다는 의미다. 심지어는 이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두들겨 맞기만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세계를 먹는 자는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산책을 하듯 주위를 걸어다녔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복사본과 싸우고 있는 인간들의 모슴이 붉은색 세로 동공에 담겼다.
“저 하찮은 존재들을 보아라.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지를, 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을 보아라. 가질 수 없는 희망을 억지로 되새기며 무의미한 발악만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저 모든 행동이 한낱 허상에 불과한데도.”
“…….”
“저것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여신.”
힘이 빠져나가는 탓에 간단한 상처조차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이클립스가, 그 말을 듣고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의 입으로 직접 희망을 부정해라. 그 인간은 죽었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여신의 이름으로 선언해라. 그렇다면 저 인간들은 살려주마. 어떠냐?”
“헛소리를…… 커헉?!”
이클립스는 들을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는 듯 단칼에 거절했다. 그 머리를 날개 잃은 악몽이 다시 후려갈겼다. 얻어맞은 몸이 철퍼덕 엎어졌다. 맞은 자리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세계를 먹는 자는 싸움이 벌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칼날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너 따위는 칼집으로 충분하다는 조롱의 의미였고, 실제로도 충분했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는군. 시간을 끌겠다고 했다면 나를 그만큼 즐겁게 해줘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그렇게 맞고만 있을 거지?”
“아직, 더 싸울 수 있ㅡ”
ㅡ퍼억!
“이 과정은 싸움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여신. 주제를 알아라.”
배를 얻어맞은 이클립스는 그대로 붕 떠서 날아갔다가 추락하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세계를 먹는 자가 여신이 떨어진 자리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어디 말해보아라. 너 역시 무의미한 희망을 믿나?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고, 아직 살아 돌아올 거라고 믿나?”
“……델타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런, 이런. 말귀를 못 알아듣는 여신이로군. 내가 그것을 어떻게 죽였는지 말해준 지도 벌써 열 번이 넘어간다. 그런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는 의미인가?”
“처음, 델타를 이곳에 데려올 때도, 쿨럭. 그랬다. 나 역시 불가능하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너는 델타에게 당해서 꼴사납게 도망ㅡ”
ㅡ콰앙!
이클립스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세계를 먹는 자가 왼손의 일부를 드래곤 모습으로 되돌려 위에서 짓누른 것이다. 그 표정에는 분노의 편린이 깃들어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리지 마라, 여신. 한 마디만 더 했다간 혀를 뽑아주마.”
“원한다면…… 몇 번이고, 말해주마…… 델타에게, 당해서…… 도망간 주제ㅡ 끄, 으으으윽?!”
“너의 의지를 잘 알았다.”
콰드득, 짓누르는 힘이 한층 강해지자 이클립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살심이 깃들었다.
“원하는대로 해 주지. 너 같은 것에게 말을 할 권리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터.”
세계를 먹는 자가 왼손을 뗐다. 바닥에서 이상한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이클립스를 강제로 꿇어앉히고, 아래턱을 잡아 입을 억지로 벌렸다.
검은 액체가 막 혀를 잡아뽑기 위해 입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멈칫, 액체의 움직임이 입과 손가락 두 마디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멈췄다.
세계를 먹는 자가 이상함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갑자기 몸 앞에 그림자가 생겨나 있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주변이 환해지며 그림자가 한층 선명해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에, 세계를 먹는 자가 그림자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보였다.
“…….”
지상의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행동을 중지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웠던 전투의 소음이 말소되듯 사라졌다.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태양. 눈 달린 모든 것이 그 찬란한 광휘를 목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것은 태양이되 태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클립스가 만든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클립스의 태양이 아니었으니까.
“아아…….”
이클립스의 황홀한 목소리와 함께, 태양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내려앉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상의 그 어떤 것도 노을진 하늘에 대응하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 채 땅에 닿아 부서지는 태양을 목격할 뿐.
ㅡ쿠우우우웅…….
태양이 완전히 내려앉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광휘가 터져나왔다. 빛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대지를 휩쓸었다. 눈 닿는 모든 장소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빛에 휩쓸린 몸이 치료되기 시작했다. 망가졌던 팔이 돌아오고, 잘려나갔던 피부가 붙고, 부러졌던 뼈가 아물었다. 심지어는 이클립스의 상처까지도 말이다.
그 어떤 수단으로도 치료되지 못한 채 무작정 늘어나기만 하던 상처가 모두 낫고 있었다. 이클립스는 아물어가는 피부와 사라지는 멍들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ㅡ!!!!!!”
상처가 회복된 인간들과는 달리, 빛에 휩쓸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들이 있었다.
세계를 먹는 자가 만들어낸 복제품들이었다. 복제품들은 빛에 감싸이자마자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고, 바닥에 엎어져 뒹굴었다.
“흑…….”
맺혔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만들어진 그것은 ‘자애로운 태양’이라는 이름의 신성 주문이었다. 이클립스 자신이 직접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에 넣기까지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효과는 광범위하게 아군의 체력을 회복하고, 그 회복량의 일부만큼 적에게 대미지를 주는 것. 그 말인 즉, 저 태양은 이클립스와 다른 인간들을 아군으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네년의 짓이냐! 여신!”
세계를 먹는 자의 격노한 소리가 들렸다. 놈은 핏발 선 눈으로 이클립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시하고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만월이 떠올랐다.
사라져가는 황금빛의 자리를 은빛이 대신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만월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던 복제품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이클립스는 이것 역시 알고 있었다. ‘자비로운 만월’이라는 이름의 신성 주문이었다.
효과는 광범위한 범위의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 입힌 피해의 일부만큼 아군의 체력을 회복하는 것. 이번에도 저 만월은 이클립스와 다른 인간들을 아군으로 인식했다.
그 생각이 맞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이클립스의 몸은 회복되는 걸 넘어서 싸우기 전보다도 훨씬 더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를 먹는 자가 핏발 선 눈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사이, 이클립스는 사방에 흩어진 여자들을 자신의 주위로 끌어모았다. 수많은 시선들이 어리둥절함을 가득 담아 여신을 향했다.
“방금은 여신님이 하신 게……?”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클립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뺨에 아로새겨진 눈물 자국을 발견했는지, 열두 쌍이나 되는 눈동자들이 동그랗게 바뀌었다.
잠시나마 침묵이 감돌았지만,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익숙한 외형의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공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아직도 내 외형을 하고 있는 세계를 먹는 자가 경악에 찬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체통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표정을 하고선 온 몸으로 놀랐다는 감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아직도 내 모습으로 그 지랄 떨고 있었냐?”
“네놈…….”
놈이 이를 갈았다. 가뜩이나 붉었던 세로 동공이 한층 더 시뻘겋게 물들었다. 본능적으로 이쪽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너는 죽었다! 죽었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확인했단 말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여유있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악에 잔뜩 받힌 목소리였다.
“그래. 죽었지. 기억 끊겨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아마 확인 사살도 철저하게 당했을 거고.”
태연하게 되받았다. 내가 이런 반응이자, 놈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분명 되살아날 기색이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 어째서!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
“어떻게 살아있냐니, 이유야 뻔하잖아.”
날개 잃은 악몽을 겨누었다. 그리고, 저놈이 여태껏 지어보였던 비릿한 웃음을 되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2페이즈다. 이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