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02)
외전: 황금 열쇠 – 2
나는 열쇠를 집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페치를 대신해 열쇠를 주워들었다. 브닼 4의 모델링과 똑같이 생긴 열쇠였다.
페치는 열쇠가 내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지 딸꾹질 소리를 내며 벌벌 떨어댔다.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기에 어깨를 잡아 일으켜주고,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한 뒤 나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페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쿠션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체 얼마나 긴장한 거야?’
언더붑과 타이즈 사이로 드러난 피부에는 땀이 흥건했고, 움푹 파인 배꼽을 향해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마치 사우나에라도 들어갔다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땀에 젖은 몸이 무척 찝찝할 텐데도, 페치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뻣뻣하게 굳어선 내 눈치만을 살펴댔다. 핫핑크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회전했다.
“일단 긴장부터 풀고 가자. 편하게 숨 좀 고르다가 말할 준비 끝나면 불러. 그동안 나도 좀 쉴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히끅!”
테이블에 놓인 과자접시를 들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페치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긴장이 좀 풀렸는지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니 땀범벅이 된 몸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몸을 닦으려던 페치가 날 확인하고 우뚝 멈췄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 눈을 피해주었다. 그러자 손수건이 피부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입고다니는 옷은 위로 들추나 마나 별 차이가 없는데, 저런 것은 또 의식을 하는구나 싶었다.
“다,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렸다. 전체적으로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사람다워진 모습의 페치가 쭈뼛쭈뼛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코트는 벗어서 옆에 얌전히 개어놓았고, 흐트러진 앞머리와 옆머리도 꼼꼼히 정리했다. 잔뜩 굳어있던 표정 역시 처음에 비하면 제법 많이 풀린 상태였다.
“긴장은 좀 가라앉았어?”
“네. 저…… 그런데 방금은…….”
“방금? 어떤 거?”
“키스로…… 어…….”
차마 키스로 열 번을 넘게 절정시켰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순 없었는지, 대체할 단어를 찾으려는 듯 더듬거려댔다. 하지만 그걸 대체할 고풍스러운 어휘가 있을 리 없었다.
설령 있다 한들,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을 리도 만무했고.
“너 긴장 풀어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해서 보낸 거야. 카이킬리아랑 같이 있으면 말도 제대로 못 꺼낼 게 뻔하니까. 아니면 여기로 다시 불러줘?”
“아니요아니요아니요아니요! 배려 감사해요! 다시 부르실 필요 없어요!”
페치가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핫핑크색 트윈테일이 붕붕 흩날렸다. 전력을 다해 내 말을 거부한 페치는 다시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황제 폐하랑 미래를 약속하신 건가요?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키스…… 에도 거리낌이 없으셔서요.”
‘황제 폐하라고?’
의문도 잠시, 아직 제국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공표한 적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페치도 저런 착각을 하고 있을만 했다.
“너도 카이킬리아가 나 들어왔을 때 뭐라고 했는지 들었잖아? 확인 같은 거 안 받아도 짐작은 하고 있을 텐데. 그 짐작대로야.”
물론 착각을 정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정식으로 공표되면 다 알게 될 일이다. 저걸 착각한다 해서 신변에 중대한 위험이 생기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아까 교황 성하들이 안기셨던 것도……?”
“맞아. 카이킬리아랑 똑같은 이유 때문인데. 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요…….”
페치는 질문 몇 번만에 다시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내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긴장할 거 없어. 우리 관계는 이걸로 끝이잖아?”
“하, 하하…… 네, 그렇죠…… 그걸로 끝이죠…….”
손에 들린 황금 열쇠를 흔들어보이자, 페치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얼굴로 하하 웃었다. 날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일을 떠올린 듯했다.
“저번에도 말했을텐데. 페치 네가 판 함정에 걸려들었던 건 일부러 한 짓이라고. 다 알고도 일부러 속아준 건데 내가 널 원망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
“내가 뭐 지름길이 있다 해놓고 정작 들어가면 문을 닫아서 가둬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라도 했어, 비탈길 계단 위에서 돌을 굴려버리는 짓을 당하기라도 했어, 다리를 건너는데 그걸 내려버려서 반대편까지 한참을 돌아가기라도 했어, 그것도 아니면…….”
내 입에서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페치’가 저질렀던 뒤통수들이 하나씩 설명되자, 그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갔다. 어떻게 본인이 하려던 짓을 다 파악하고 있나 싶겠지.
“그러니까, 페치.”
나는 페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핫핑크색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하, 하하…… 네, 겁먹지 않아도…… 네…….”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페치의 성격상, 내가 너무 굽히고 들어간다면 은근슬쩍 기회를 엿보려 할테니 이 정도가 제일 적당하다.
“빨리 할 일이나 끝내자고. 이건 어디서 찾았어, 페치?”
“그, 그건 영업 비밀…….”
“어디서, 찾았어?”
“……딸꾹.”
페치가 딸꾹질을 했다.
조금 강압적으로 물어보긴 했지만, 게임에도 안 나와 있던 정보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무려 10년간 이어져 온 호기심이 풀릴 기회였다.
“……저, 듣고 화내시면 안 돼요?”
“안 낼게. 말해봐.”
“진짜진짜 화내시면 안 돼요……?”
“화 안 낸다니까?”
뭐 어디서 찾았길래 저런 태도인지 의문이었다. 내 의문이 깊어지는 사이, 가슴 앞에서 검지를 맞대고 꼼지락거리던 페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예전에 발견해서 쓰고 남은 거예요.”
“……?”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지금은 어딘지 까먹었는데, 어느 버려진 공방에서 찾았어요. 처음엔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공방이더라고요. 들어가니까 의자에 앉아서 죽은 해골이랑 잡동사니 몇 개뿐이던데, 해골 앞의 책상에 황금 열쇠랑 쪽지가 있었어요. 천 번 쓰면 부서지지만, 부서지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잠금장치라도 단숨에 해제할 수 있는 열쇠라길래 냅다 챙겨서 나왔죠.”
얼마니 뛰어난 연금술사였길래 이런 물건을 만들었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천 번이라고?”
“네, 네!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천 번 사용하면 부서진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 풀려버렸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페치는 자기가 황금 열쇠를 멋대로 사용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이런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했는지 벌벌 떨어댔으나, 내 관심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애초에 일회용이 아니었다 이 뜻인가.’
나는 무려 1000번이나 사용할 수 있다던 황금 열쇠를 일회용품으로 바꾼 장본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또다시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더 얘기할 건 없어?”
“그, 그걸로 이것저것 영업 이익을 추구하다가, 마지막 한 번은 진짜로 큰 걸 터는데 써야겠다 싶어서 아끼고 있었는데…… 델타 님이 황금 열쇠를 들고 오라고 하셔서…….”
페치가 말을 하다말고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었다.
“아, 안 혼내신다면서요!”
“안 혼내고 있잖아. 계속 설명해도 돼.”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전부 말했어요! 진짜에요! 버려진 연금 공방에 있던 걸 제가 주워서 썼고, 남은 한 번은 어디에 쓸지 고민하느라 남겨뒀었는데 델타 님이 찾아오라고 하시길래 가져다 드린게 전부라고요!”
“내가 황금 열쇠 찾아오라고 시켰을 때는 뭔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찾아오냐고 항변하지 않았었나?”
“…….”
페치가 슬쩍 눈을 피했다. 보나마나 거짓말이었겠지.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정말로 감탄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상대방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판단해서 거짓말을 하다니 말이다.
지금도 만약 페치가 심적으로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거짓말을 하려고 기회를 엿봤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카이킬리아한테 상 줘야겠네.’
의도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척 큰 활약을 했다.
“날 찾아온 게 왜 하필 지금이었는지도 알겠네. 너무 일찍 돌아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찾았냐면서 추궁당할까봐 일부러 늦게 찾아온 거지?”
“네. 정확히 맞추셨어요. 근데 진짜로 저 안 혼내시는 거 맞죠? 헤헤.”
잔뜩 움츠러든 페치가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미소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어쩐지 그 귀한 걸 순순히 넘겨주더라니…… 이 빌어처먹을 사기꾼 새끼, 자기가 실컷 써먹어놓고선 딱 1번 남은 걸 갖다준 거였냐? 그러면서 생색은 있는대로 다 냈다고?’
브닼 4의 페치한테 속으로 쌍욕을 퍼붓느라 바빴으니까.
‘이제 앞뒤가 맞아떨어지네.’
제국의 선대 황제들이 황금 열쇠를 찾기 위해 그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놓고도 끝끝내 실패한 이유는, 열쇠가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뒤였기 때문이었다.
황금 열쇠가 일회용인 이유는 제일 처음 습득한 페치가 신나게 사용해대서 그런 거였고.
“저기…… 저 안 혼내시는 거 맞죠……? 그렇죠……?”
내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것을 확인한 페치가 미소를 싹 지우고선 벌벌 떨며 말을 걸어왔다.
당연히 여기 눈앞에 있는 ‘진짜’ 페치에게 화풀이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클립스에게 모든 진실을 들은 뒤로, 나는 브닼 4와 이 세계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어놓았다.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NPC와 이곳의 인간들은 행동 양식만이 비슷할 뿐 엄연히 다른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니 NPC 페치에게 당한 일을 인간 페치에게 갚으려 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열받은 대상은 플레이어를 그렇게 통수쳐놓고도 최종 보상을 줄 때마저 거짓말을 하고, 그런 주제에 진짜로 귀한 거라며 온갖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던 NPC 페치였으니까.
‘이클립스한테 브닼 4 업뎃 좀 해놓으라고 해야겠다.’
물론 복수를 안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말했잖아. 그럴 일 없다고. 내가 생각했던 이유랑 달라서 좀 많이 놀랐을 뿐이야. 너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 감사, 합니다……?”
페치는 그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대신, 나랑 어디 한 군데만 들르자.”
일이 끝난 줄 알고 안심했던 핫핑크색 트윈테일이 내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움찔거렸다. 그 얼굴이 반쯤 울상으로 변했다.
“어, 어디 말인가요?”
“연금 공방.”
이게 정말로 연금술사가 만든 아이템이라면, 확인해볼 것이 있었다.
“잠깐만. 그러면 페치 너 대체 몇 살이야? 황금 열쇠를 찾는데 실패했다는 기록은 200년 전 것까지 있다던데?”
“…….”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