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08)
외전: 메이드 라나 – 1
“오랜만에 뵙습니다, 델타 님.”
복도 모퉁이를 돌던 중 라나와 마주쳤다. 라나는 날 보는 즉시 정중히 고개를 숙여왔다. 무척 절도있는 데다 예전보다 훨씬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예전의 라나가 오합지졸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그렇게 느껴질 것 같기도 했다. 손짓 하나하나, 시선 처리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달랐으니까.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오랜만이네, 라나. 잘 지냈어?”
“괜찮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요.”
하지만 그런 모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라나는 10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지쳤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순식간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왜? 무슨 일 있어?”
“힘들어 죽을 지경입니다.”
“응?”
라나가 마치 부모님께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예전에 황궁에서 근무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황제 폐하가 아닌 아우로라 님을 보살피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황제 폐하를 직접 보필하는 위치의 메이드가 되었으니, 위치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들들 볶이는 중입니다.”
“그거야 뭐…….”
황궁에서 일하는 메이드 정도만 돼도 온갖 교육이란 교육은 다 받고 올라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일텐데, 아예 황제를 옆에서 직접 보필한다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아무리 라나가 아우로라의 저택에서 완벽한 메이드였다 해도, 메이드의 평균치가 극도로 높은 황궁과 비교하면 완벽이라는 기준 자체가 다를 테니까.
“저도 제 능력이 황궁에서 요구하는 것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은 아는데, 문제는 가르침 받는 입장인 제가 가르쳐주는 메이드보다 직위가 훨씬 더 높다는 겁니다. 황제의 곁을 보좌하는 메이드가 됐으니 제가 반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황궁에서 일한 시간이 제 나이보다 많은 메이드들한테 반말로 명령하는 건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됩니다.”
라나가 몇 살이었더라. 나는 라나의 나이를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지 어떤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일단 아우로라보다 2배 이상 많은 건 확실하고, 그런 라나의 나이보다 황궁에서 일한 시간이 많다면 그 밑의 메이드들은 최소 50살 이상이었다.
이 세계에는 노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니 50살이든 60살이든 겉으로는 젊은 여자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심지어 제가 전에 황궁에서 일했다는 걸 기억하는 메이드까지 있습니다. 제가 동작 하나를 틀릴 때마다 황궁에서 일했는데 왜 못하냐는 타박까지 추가됩니다. 제가 예전에 황궁에 있었던 적이 있긴 해도, 그건 황제 폐하가 아닌 아우로라 님을 보살피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듯, 라나는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토해냈다. 나는 그것들을 얌전히 들어주었다.
말이 많아질수록 처음의 절도있는 모습은 사라지고 저택에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언행이 포인트였다.
“……크흠. 저 혼자 너무 떠들었네요. 죄송합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쌓아두었던 속마음을 다 털었는지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한 라나가 헛기침을 하며 물어왔다.
“아우로라 만나러 왔어. 황제 교육 받는다고 못 만난 지 제법 됐으니까 얼굴도 볼 겸, 고생했다고 칭찬도 해주게.”
“칭찬이라…… 예, 알겠습니다. 무척 좋은 생각이십니다. 분명 주인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라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내 하반신에 고정됐다가 들어올려졌다. 그런 칭찬은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아우로라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기에 조용히 말을 삼켰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델타 님.”
침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라나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주로 라나 혼자서 일방적으로 떠드는 모양새였다. 그동안 대화할 상대가 굉장히 부족했던 듯했다.
카이킬리아 말로는 교육이 다 끝났다니까, 이제 아우로라 곁에 항상 있을 수 있으니 좀 낫겠지.
“도착했습니다.”
한때는 카이킬리아의 침실이었다가, 지금은 아우로라의 침실로 쓰이는 고풍스러운 문 앞에 멈춰섰다. 겉모습 자체는 예전에 잠시 찾아왔을 때와 바뀐 게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 카이킬리아랑 그렇고 그런 짓을 했던 자리에서 아우로라와 똑같은 짓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원래는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도 예법에 맞춰서 해야겠지만, 델타 님과 저희 사이이니…….”
“생략해도 돼. 상관 없어.”
내 허락이 떨어지자, 라나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라나입니다.”
“어? 라나?! 방금 전에 나가놓고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안에서 허둥지둥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듣기에도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델타 님이 주인님을 뵙고 싶다고 해서 안내해드렸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델타가?!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오 분이면 돼!”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문 너머로 울려퍼졌다. 라나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제법 깊게 열중하고 계셨던 것 같으니, 들어가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아우로라든 라나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긴 했지만,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얌전히 기다리려는데, 라나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주인님은 최근에 욕구불만 상태셨습니다. 선제께 교육을 받으면서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신데다, 주인님과의 잠자리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계셨으니까요. 아마 방금도 제가 나가자마자 손장난을 시작하셨을 겁니다.”
나는 눈 하나 깜짝않고 제 주인의 치부를 줄줄이 늘어놓는 라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걸 나한테 막 말해줘도 돼?”
“제가 정원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도 주인님이 조수까지 지리게 만드셔놓고선, 달아오른 몸을 견디다 못해 자기 위로를 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어차피 남남도 아닌 사이이니 주인님의 귀여운 면모를 하나 더 알게 됐다고 생각하시죠.”
“…….”
저렇게 반박해오면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침묵하자, 의기양양해진 라나가 가슴을 살짝 폈다.
어째 예전보다 훨씬 더 농담의 수위가 뻔뻔해진 느낌이었다. 말에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자기가 먼저 농담을 하고 내가 못 받아주니 쪽팔려했던 그 라나와는 천지차이였다.
“이제 들어와도 돼, 델타!”
말한대로 5분쯤 지나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마법진이 해제되며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크, 크흠……. 잘 왔어.”
아우로라는 침대에 어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가슴께의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피부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얼마 못 봤던 사이에 카이킬리아를 부쩍 닮아가기 시작한 외모는 덤이었다.
카이킬리아 특유의 독기 서린 눈이나 서슬 퍼런 분위기까지 닮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외모만 놓고 보면 고모와 조카 관계가 아니라 쌍둥이 자매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교황이라는 특수성 탓에 머리색과 눈색이 정반대인 플로레타와 루나, 얼핏 보면 자매가 맞나 싶은 리제와 에리카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자매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조, 조금 덥네. 그렇지?”
“방금 전까지 주인님께서 뭘 하셨는지 생각해보면 더울 수밖에 없ㅡ”
얼굴로 날아온 슬리퍼에 얻어맞은 라나가 말을 멈췄다. 충성스러운 메이드의 입을 틀어막은 아우로라가 날 향해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 하하하! 라나 얼굴에 벌레가 있었지 뭐야!”
“미네르바 님의 마법진이 있는데 벌레요?”
“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슬리퍼를 가지런히 정리한 라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주인님께서 자기 위로를 하고 계셨다는 건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모두 말씀드렸으니 감추려고 하셔봤자 소용없습니다.”
“……어?”
쩌적, 아우로라가 그대로 굳었다.
“뭐, 뭘 말했, 다고……?”
“방금 전까지 델타 님을 생각하며 자기 위로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마시길. 스트레스를 발산하기 위한 아주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열심히 설명드렸더니 델타 님께서도 납득해주셨으니까요.”
황금빛 동공이 파르르 떨리고,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이 옅게 뻐끔거렸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주인님께서 전 황제 폐하께 교육을 받느라 스트레스와 피로가 많이 쌓이셨고, 델타 님과 만나지 못한지도 제법 오래되셨기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제가 나가자마자 손장난을ㅡ”
퍽. 라나의 얼굴에 반대쪽 슬리퍼가 날아들었다. 라나는 그 슬리퍼도 태연하게 받아 정리했다.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진 아우로라가 라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런 걸 델타한테 왜 말해! 라나 너 미쳤어?!”
“저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델타 님뿐입니다. 어차피 주인님과 델타 님은 볼 거 못볼 거 다 본 사이이지 않습니까.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창문에 조수까지 뿜으셔놓고는 이제 와서 부끄러운 척 하셔도ㅡ”
“와아악! 왁!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아우로라는 예전의 일이 언급되자 펄쩍 뛰었다. 그때는 쾌락에 젖어 다음에도 하자고 떠들어댔지만, 막상 제정신인 상태로 떠올리려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아우로라를 격침시킨 라나는 침대가 잘 보이는 구석 자리로 걸어가 모퉁이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붙고, 가슴께까지 바짝 붙은 무릎이 두 팔에 끌어안겼다.
우릴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기대감에 차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구경입니다.”
“어떤 구경?”
“꼭 제 입으로 말해야 아시겠습니까, 주인님? 손가락이 아니라 실물을 넣을 수 있는 기회ㅡ”
“너 자꾸 그럴래?!”
“농담입니다. 이쯤되면 굳이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델타 님께서 주인님을 위로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델타 님?”
당당하게 다음 행동을 요구하는 라나의 모습에, 아우로라와 내가 동시에 조용해졌다. 저게 복도에서 내게 칭얼대던 그 라나가 맞나 싶었다.
“시선 제공은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진행하시죠.”
“…….”
뭔가를 깊게 고민하는 기색이던 아우로라는, 얼마 못 가 뭔가를 라나처럼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꼬고 있던 다리가 은근슬쩍 풀어지고, 한쪽 어깨끈이 팔뚝까지 흘러내렸다.
“결국 그러실 거면 왜 부끄러워 하셨습니까, 황제 폐하?”
“모, 몰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