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09)
외전: 메이드 라나 – 2
“두 분께서 정사를 마치셨습니다. 시작하세요.”
“명령 받들겠습니다, 라나 님.”
스물 다섯 명의 메이드가 아우로라의 침실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메이드 군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맡은 구역으로 이동해 각자의 할 일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창문을 열어젖혀 방 안에 잔뜩 쌓인 열기와 온갖 잡다한 것들이 뒤섞인 퀴퀴한 냄새를 빼내고, 지팡이를 이용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카펫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침대에 움찔대며 널브러져 있는 아우로라를 4명이서 조심스럽게 껴안아올려 욕실로 데려간 다음, 푹 젖은 이불과 침대보를 돌돌 말아 챙겨고선 방 밖으로 사라졌다.
비릿한 냄새와 꿉꿉한 체액의 냄새가 사라진 자리를 상쾌한 밤공기가 채웠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옅게 맺힌 땀을 훑었다.
아우로라 덕분에 온갖 액체로 푹 절여진 내 제복을 메이드 몇 명이 나누어 가져간 뒤, 다른 한 명이 가져간 것과 똑같이 생긴 칠흑색 제복을 내밀었다.
“새로운 옷입니다. 옷시중을 들어드리길 원하십니까?”
“아니, 괜찮아.”
“예.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제복을 건네며 옷시중도 제안해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옷 입는 것까지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옷을 갈아입고 문 근처에서 메이드 군단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라나를 향해 걸어갔다. 방 곳곳을 바쁘게 오가던 메이드들이 날 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가리는 척 손가락 사이로 아우로라와 나를 훔쳐보면서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던 라나는, 어느새 평소의 그 완전무결하고 무뚝뚝한 메이드로 돌아와 있었다.
침구류의 세탁과 아우로라의 목욕을 위해 사라진 숫자를 제외하고도 스물 가까이 되는 메이드가 라나의 명령대로 일사불란하게 척척 움직이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말이 끊긴 틈을 타 질문했다.
“그래서, 슬슬 소감이라도 한번 얘기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떤 소감 말씀이십니까?”
“여태까지 실컷 봐놓고 모른척하기야?”
“저처럼 가녀린 여자에게 그렇고 그런 소감을 이야기하라니, 악취미를 지니고 계십니다, 델타 님.”
“지켜보고 있을 테니 시작하라고 먼저 등 떠민 사람이 누구였더라?”
내가 히죽거리자 라나는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와서 부끄러운 척 해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아까까지 손가락 사이로 잘만 구경해놓고선 뭘ㅡ”
“밤시중을 구경만 하였다고 하셨습니까?”
누군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메이드복으로 목 밑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무섭도록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흑발 흑안의 미녀였다. 라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몸을 움찔거렸다.
“대화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국서님. 나중에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메이드는 날 향해 허리를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굽혀보이더니 고개를 들고선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라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라나 님. 15시간이 넘도록 폐하와 국서님의 밤시중을 들었다고 하여 오랜만에 칭찬이라도 하여주려고 했습니다만, 밤시중을 든 것이 아니라 구경만 하고 계셨다는 것이 진정 사실이십니까? 어떻게 두 분의 정사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정녕 메이드로서의 본분을 모두 잊어버리신 것입니까?”
라나가 쩔쩔 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흑발 흑안의 여자가 황궁에서 일해온 세월이 라나의 나이보다 많다던 그 메이드인 듯했다.
“구경이라니요, 구경이라니요! 이런 맙소사. 폐하와 국서께 대체 그 무슨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까! 두 분께서 오롯이 정사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라나 님께서 도맡아 하셨어야지요! 설마 폐하의 침실이 이렇게 된 것도, 두 분께서 나누신 정열적인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메이드로서 해야 할 일을 후안무치하게 방치하신 결과였다는 말입니까?”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다른 메이드들은 이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청소를 이어갈 뿐이었다. 라나를 훈계하던 메이드가 짜증스레 콧김을 내뿜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이야말로 꼭 라나 님의 버릇을ㅡ”
“그만.”
팔을 걸어붙이려던 흑발 흑안의 메이드는 내 말을 듣자마자 전원 꺼진 로봇처럼 입을 다물었다. 라나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내 뒤로 숨어버렸다.
메이드는 내 뒤에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어 눈치를 살펴대는 라나를 보고 눈가를 씰룩였지만, 내가 거기까지 해 두라고 명령을 내린지라 차마 호통을 칠 수 없는 듯했다.
“거기까지 해 둬. 적어도 우릴 지켜보기만 하던 일은 라나 잘못이 아니니까.”
“……국서시여. 저희 메이드에게는 주인의 밤시중을 받들어야 할 영광스러운 의무가 있습니다. 그 영광을 자기 멋대로 내팽개치고서, 두 분의 정사를 구경만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례입니다. 국서께서 말씀만 내려주신다면 저희 중에 누구라도 사흘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기쁘게 그 의무를 받들 수 있ㅡ”
“내가 원해서 지켜보게 한 건데도?”
밤시중이 메이드의 영광스러운 의무라는,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으려던 흑발 흑안의 메이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 세계에 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 무슨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괴담이 나왔다. 슬슬 앞으로 뭐가 더 튀어나올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국서께서, 그러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아우로라는 라나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거든.”
“…….”
황제의 충격적인 성벽이 까발려지자, 무표정과 분노만을 오가던 메이드의 얼굴에 변화가 생겨났다. 칠흑색의 눈동자가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래졌다.
아우로라는 졸지에 남한테 보여지면서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돼버렸지만, 엄연히 사실이었다.
라나가 우리 관계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주니 단순히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자서 끊임없이 가버렸으니까.
여기 있는 메이드들이 자기가 모시는 황제의 성벽을 어디 떠벌리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정말, 이신지요?”
“왜,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감히 국서를 의심하겠습니까!”
메이드가 화들짝 놀라 다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 틈을 타 라나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내 손짓을 알아들은 라나가 재빨리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 황제 폐하의 더 많은 쾌락을 위하여 국서께서 내게 명하신 행동이었다. 알아들었으면 하던 청소나 마저 하도록.”
고개를 든 메이드는, 라나의 명령대로 청소를 하러 가는 대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국서시여, 저는 너무나도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의 말을 멋대로 끊고,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잘못된 분노를 터뜨린 저를 부디 용서하지 마십시오. 국서께서 어떤 벌을 내리시든, 모두 감내하겠습니다.”
“충분히 오해할만한 일이었으니 됐어. 일어서서 하던 청소부터 마저 해.”
“무한한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 얼굴이 내 발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신발에 입을 맞추려다 실패하고 바닥에 코를 박은 메이드가 얌전히 내려놓았던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카펫 위에 그려진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뿜었다.
카펫이 원래의 깨끗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잠시 나 좀 보자, 라나.”
“네, 국서님.”
라나는 냉큼 나를 따라나섰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장소에서 멈춰섰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라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델타 님. 방금은 진짜 잔소리가 쏟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감사 인사는 안 해도 돼. 밤시중이라니, 그런 이상한 걸 안 했다고 네가 혼나는 모습은 못 보니까.”
하지만, 라나는 어째 내 말을 듣고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저…… 델타 님. 일단 그게 메이드로서 당연한 의무이긴 하고, 이상한 건 절대로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내심 지켜보면서도 메이드로서의 의무를 잊은 건 아니었으니 혹시 델타 님께서 명령해서 밤시중을 모실 각오를 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해야한달까요…….”
“…….”
라나는 그런 게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길 보호해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못내 미안한지 자꾸 몸을 꼼지락거려댔다.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말소리는 덤이었다.
생각해보니 라나도 여기 사람이었구나. 그러면 당연히 저 ‘의무’를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겠지. 결과 자체는 좋았지만, 어째 과정을 잘못 파악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의무가 있는지도 몰랐고, 앞으로 시킬 생각도 없어. 그것만 알아둬.”
라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우로라와 내가 몸을 섞는 모습을 쳐다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찝찝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우로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델타 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라나는 순간적으로 내 하반신에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곧장 눈을 돌렸다. 무척 빠르게 이루어진 동작이었지만, 그 시선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왜?”
“드, 들켰습니까?”
“당연히 들켰지. 설마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어?”
라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 뺨이 살짝 붉어졌다.
“크, 큰 이유는 아닙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에 잠시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정을 통하시고도 마지막까지 쌩쌩하게…… 죄송합니다, 델타 님. 이건 민감한 주제인데, 너무 제 멋대로 떠들어버렸습니다.”
“뭐, 나도 해봤던 생각이긴 해. 나도 예전에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하고 잔뜩 고민 해봤었는데, 신경 끄는 쪽이 마음 편하더라.”
처음에는 스태미너 때문인 줄 알았지만, 이곳이 게임 속 세계가 아니라는 걸 듣게 된 뒤로는 적용하기가 살짝 애매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가능성 자체는 제일 높은 추측이었다.
“궁금해? 키히힛.”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닉스가 음침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뜬금없는 등장에, 라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닉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관찰의 결과야. 히힛.”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도 하네. 그렇지?”
“…….”
닉스는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냅다 인격을 바꿔버렸다. 약간 더 어리숙해진 칠흑색 눈동자가 끔뻑거렸다.
언제 봐도 참 편리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외전: 여신
닉스가 향한 장소는 속죄의 여신상 앞이었다. 이 세계의 여신이 터무니 없는 복장을 입고 있는 자의식 과잉 노출증 나르시스트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곳 말이다.
진실에 대해 듣겠답시고 브닼 4에 나왔던 속죄의 여신상을 찾으러 갈 때만 해도 설마 여자들 옷차림이 그런 이유가 여신 때문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단순히 모드 때문인 줄로만 알았지.
내가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조금 애매하지만 어쨌든 과거의 일이긴 한 기억을 새록새록 되새기는 사이, 여신상 앞에 도착한 닉스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헤헤. 도착했어요.”
“여긴 왜?”
“여신님한테 직접 여쭤보는 편이 제일 간편하잖아요. 틀린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오해를 살 일도 없고요. 당신의 몸을 만들어주신 분이 여신님이신데 달리 누가 정답을 알고 있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내 원래 몸은 진혼으로 자살했을 때 완전히 산산조각났고, 영혼만 수거해서 이클립스가 새로 만들어준 몸에 넣은 결과물이 지금의 나니까.
외모 자체야 최대한 생전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해도, 내 몸을 만들면서 어떤 걸 했는지 그 세부사항은 여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한데, 이클립스한테 물어볼 거였으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어? 내 방에서 대충 기도했어도 내려오셨을걸?”
“헤헤, 그건…….”
닉스는 음침하게 웃으며 가슴 앞에서 검지를 꼼지락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그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제, 제가 이 근처에 오두막 하나를 지어놨는데요…… 진짜 정성들여서 잘 지어놨는데…… 끄, 끝나고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어떨까, 하고…… 헤헤헤.”
그러면서 내 특정 부위를 흘끔거리기까지 했으니, 속내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닉스는 부끄러움과 뻔뻔함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으음?”
이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음침녀 닉스가 아니라 영혼 수호녀 플로르로 돌아온 닉스는 약간 맑아진 칠흑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날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약간 한심하다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제가 볼 땐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만, 결국 못 버티고 절 내보냈네요. 하여튼, 제 다른 인격이지만 소심하고 음침하고 변태같은 건 알아줘야 합니다.”
“닉스도 너고 플로르도 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 너랑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세계를 먹는 자가 처치된 이후, 내 기억과 능력을 봉인하느라 몸에 걸려 있던 부담이 모두 풀렸음에도 닉스는 분리된 인격을 합치지 않았다.
본인 말로는 인격이 나뉘어졌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특징이 되었기에, 그 특징을 잃어버리기 싫어서라나.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어째 다른 이유도 조금이지만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영혼 수호녀로서 당신의 여정을 지켜보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절대 제 다른 인격들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닉스가 자신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폭유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래? 질문 끝내고 오두막에서 잠시 쉬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닉스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바로 돌아가야지.”
내 말을 들은 칠흑색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감정 변화가 바로 드러나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떤 인격이든 결국 근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본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으나, 플로르도 다른 두 닉스처럼 셋으로 나뉜 인격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닉스가 다급히 말을 덧댔다.
“농담이었습니다. 제 다른 인격의 의견도 결국은 제 의견과 마찬가지니까요. 얼마든지 방문하셔도 됩니다. 자, 어서 끝내고 같이 쉬러 가시죠.”
애써 변명을 늘어놓는 닉스를 향해 웃어준 내가 조각상으로 다가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구차한 변명이었는지, 칠흑색 눈동자가 슬그머니 내리깔렸다.
“저도 여신님과 소통이 필요할 때 이 장소를 종종 사용하곤 했습니다. 주로 당신에 관한 정보였죠.”
예전의 성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무척 떨떠름하게 느껴질 이야기였다. 신성력도 없고, 신앙도 없는 여자 주제에 자신들의 신과 마음대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닌가.
신과 제일 가까이 닿아있다는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조차 계시라는 제한적인 수단으로밖에 소통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거다.
닉스의 특수한 배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물론 지금의 성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은총을 받기 전의 라파엘라 성국과 받은 후의 라파엘라 성국은 아예 다른 나라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ㅡ”
“부르셨나요, 당신?”
내가 이름의 두 번째 글자를 발음하기도 전에, 조각상에서 황금색과 은색이 뒤섞인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빛무리 내부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이클립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이러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등장인지라, 혹시 둘이 짜고 쳤나 싶어 닉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닉스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클립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앞까지 다가와 손을 꼬옥 붙잡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클립스? 어떻ㅡ”
“헤으윽?!”
ㅡ움찔! 움찔!
무심코 이름을 부르자마자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붙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반대로 다리에는 힘이 풀려버렸는지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았다.
바닥과 맞닿은 채 움찔움찔 경련하는 엉덩이 밑으로 투명한 물웅덩이가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수십 종류의 과일을 한데 섞어놓은 듯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과일향이 느껴졌다.
허리를 앞으로 꺾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한참이나 파르르 떨던 이클립스가 머리를 들었다. 완전히 풀려버린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헤 벌어진 입 사이로 앙증맞은 선홍색 혀가 반쯤 튀어나왔으며, 입가에는 칠칠맞게 타액이 흘러내렸다.
“오, 오자마자 이름을 부르시다니…… 너무 과격해요, 당신…… 하, 하지만, 그래서 기뻐요…….”
애교를 듬뿍 담은 목소리로 옅은 절정에 신음하며 칭얼대는 이클립스를, 놀란 토끼눈을 한 닉스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좀 진정되셨습니까?”
거의 5분 가까이 흐르고 나서야 절정의 여운에서 풀려난 이클립스가 아랫배 앞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섰다. 공기중에는 아직도 과일향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네. 추태를 보여드렸네요. 죄송합니다, 당신.”
“제대로 주의하지 않은 제 잘못도 있긴 하니까요. 그냥 방금 일은 더 언급하지 말죠.”
머리로는 이클립스라고 생각하더라도 말할 때는 여신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카이킬리아에게 ‘상’을 주면서 벌어졌던 일 때문에 호칭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뭔가 카이킬리아도 저게 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길래 한 번 시켜봤는데, 연습이랄 것도 없이 첫 번째에 반쯤 성공하고 두 번째에 완벽히 성공했으니까.
‘이클립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이킬리아’라는 명제가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혀버렸다. 여러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전 황제 폐하였다.
“알겠습니다. 더 말하지 않을게요. 어떤 용무로 저를 부르셨나요?”
“그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뭘 하고 계셨길래 제가 입을 열자마자 나타나셨습니까?”
흠칫 몸을 떤 이클립스가 아랫배 앞에 다소곳이 모아져 있던 손가락을 꼼질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세상의 창조주이며, 만물을 보살피는 여신인 동시에, 곧 천지를 비추는 태양이자 달입니다. 태양빛과 달빛이 세상에 퍼져있는 한 제가 굽어살피지 못할 장소는ㅡ”
“결국 저를 지켜봤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돌려 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조금 전에 똑같은 짓으로 덜미를 잡혔던 닉스가 이클립스와 동시에 움찔거렸다.
‘뭐, 이클립스한테는 예전부터 해오던 행동이긴 하겠지.’
세계를 먹는 자의 탄생과 성장을 모조리 방치할 정도로 자신의 피조물들을 관찰하고 보살피는 일에 몰두하던 여신이 아니던가.
그 관찰과 보살핌의 대상에 나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특별한 감정을 담아서 말이다. 그러니 대충 납득하고 넘기기로 했다.
‘이클립스는 그렇다 치는데, 닉스는…….’
계속 느껴온 거지만, 세계를 먹는 자가 죽은 뒤부터 슬슬 여자들의 리미터가 풀려가는 것 같았다.
최근만 해도 대놓고 유혹하는 빈도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말이다. 예전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꾹꾹 눌러 참았다면, 지금은 원하는 대로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느낌.
‘아마 내가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찾으려 하셨던 이유도 모두 알고 있어요.”
“알고 계시다면 잘 됐네요. 왜 그런지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그건…….”
내 재촉에도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이클립스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제, 실수 때문입니다…….”
“……실수요?”
“예.”
아니, 대체 어떤 실수를 했길래.
나는 계속하라고 눈짓을 주었다. 이클립스가 뺨을 잔뜩 붉혔다. 정말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실수인 모양이었다.
“당신의 육신을 재구축할 때,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평범한 인간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에는 당신의, 그…… 성적 능력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요?”
“다른 것들은 모두 적정 선에서 끝났으나, 성적 능력만큼은 조금 욕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넣고, 욕심이 가시지 않아 조금 더 넣고, 아직 모자란 것 같아 조금 더 넣다가…… 마지막에, 실수로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육신을 새로 만들기에는 세계를 먹는 자가 날뛰니 시간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당신의 영혼을, 안치시켰습니다…….”
“…….”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유였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이클립스는 꾸물꾸물 말을 이어갔다.
“원래는 쉬지 않고 1천여 회 정도를 기준으로 둘 생각이었습니다만…… 그, 지금의 당신이라면 아마, 1만 번 이상도 거뜬하지 않을까, 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시선이 점차 차가워지는 걸 느꼈는지, 그와 비례해 이클립스도 점차 쪼그라들어갔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세계를 먹는 자가 들이닥치는 와중에 제 정력이 욕심이 나셔서 그것만 강화하고 계셨다 이 뜻십니까?”
“……예.”
“그런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하셨고요?”
“…….”
이 허접 여신님에게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하나. 나는 급격히 아파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