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12)
외전: 다른 세계 – 3
“게임? 그게 무엇이더냐?”
카이킬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세계에서 쓰던 표현들이 별 탈 없이 그대로 통하는 이클립스의 세계지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의 단어를 인식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 듣는 단어에 미네르바가 호기심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우로라도 금안을 반짝이며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의자를 뒤로 빼고 쿠션을 툭툭 두들겼다. 의자에 앉은 카이킬리아가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비싼 돈 주고 산 게이밍 의자라서 그런지 착석감이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와 제복의 면적 탓에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드러난 가슴골에서 애써 눈을 돌리며 의자 뒤에 섰다.
“읏…….”
카이킬리아를 감싸안듯 몸을 숙여 어깨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뺨이 슬쩍 스쳐지나가자 카이킬리아가 움찔거렸다.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제복 치마 속으로 향했다.
마우스를 움직여 바탕화면에 놓인 유일한 게임 아이콘을 클릭했다. 익숙한 모습의 로딩 화면과 함께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로고가 떠오르며 웅장한 음악이 들려왔다.
미네르바와 아우로라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미네르바는 궁금증이 생기면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고, 아우로라도 만만치 않게 호기심이 많았으니까.
‘나도 예전부터 궁금했고.’
과연 브닼 4 NPC들의 모티브가 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게임 속에 등장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다.
‘일단 좋은 반응은 아니겠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 지식을 베껴간 세계를 먹는 자가 브닼 4 NPC들의 모습을 끄집어내 싸우게 만들었다던가.
초회차 클리어 때는 옆에 찰싹 붙어있어야겠구나 싶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신기하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글자이거늘, 머뭇거리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카이킬리아가 모니터에 떠오른 ‘The Brightest Darkness IV’ 로고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중얼거렸다.
“언어로 불편함을 겪지 않게끔 여신님께서 안배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여기로 데려오면서, 이클립스는 오랜만에 여신이자 창조주로서의 위엄을 한껏 발휘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일말의 추측조차 나오지 않도록 전 세계 인구의 인식을 뒤바꾸고, 우리들의 의식주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니까.
그 온갖 노력에 언어의 장벽을 없애는 것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이클립스의 세계에 가서 언어 관련으로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간단한 조작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는…… 음. 그냥 죽어가면서 배우죠. 브닼 시리즈는 원래 그런 게임이니까요.”
“죽어가면서? 어떤 것을 죽이면 되겠느냐?”
황금빛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최근에 줄곧 무직 백조 생활을 이어가고 있긴 해도, 카이킬리아는 여전히 카이킬리아였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카이킬리아. 게임이라는 것 안에서 조종하는 캐릭터를 말하는 거죠. 누군가를 직접 죽이거나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흐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너의 말이니 따르도록 하겠다. 계속 하거라.”
New Game 버튼을 누르고, Esc를 연타해 컷신을 스킵했다. 캐릭터 생성 창이 나타나면서 익숙한 모습의 디폴트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감각만으로 기본 세팅을 끝냈다.
‘과거 행적은 기사, 초반에 주어지는 물품은 적당히 생명의 반지 정도면 되겠지. 성별은 당연히 여자가 나을 테고. 이름도 그냥 카이킬리아로 하자.’
브닼 시리즈는 대대로 커마 기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지라, 적당히 머리카락 색과 눈 색만을 바꾸고 디폴트 여성 캐릭터 그대로 시작하려던 나는 못 보던 선택창을 보고 마우스를 멈췄다.
‘이걸 클릭하세요. 당신의 여신이?’
뭔가 있어보이도록 한 줄에 넣는 설명을 최대한 줄이고, 마침표도 안 찍고, 무료로 제공되는 바탕체를 사용하던 브닼 시리즈의 전통적인 글씨와는 달리, 손글씨에 가까운 동글동글한 글자였다.
하라는 대로 그 선택창을 클릭하자, 짧은 로딩과 함께 캐릭터의 외형이 바뀌었다.
“이건…… 내가 아니더냐.”
카이킬리아와 똑같이 생긴 외형으로 말이다.
카이킬리아는 모니터 속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성이 나타나자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머리를 제외하면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체형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건 일종의 분신 같은 것이니, 아이야?”
어느새 양 옆으로 다가온 아우로라와 미네르바가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카이킬리아를 닮은 캐릭터가 제법 신기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분신이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합니다.”
캐릭터는 곧 유저의 분신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왜 고모님이랑 닮은 모습이야? 아니지,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이 생겼는데?”
“여신님이 이렇게 바꾸셨어. 아마 내가 카이킬리아한테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를 시켜볼 거라는 사실까지 전부 다 예지하셨던 것 같아.”
이클립스는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자기 세계를 가꾸기에도 바빠서 다른 세계에까지 창조신 노릇을 할 이유가 없을 뿐, 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물론 세계를 먹는 자가 날뛰었을 때는 못 했던 게 맞았다.
“이제 무얼 하면 되느냐, 델타?”
“‘시작하기’라고 된 부분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마우스를 이렇게 잡고, 검지로 약간만 힘을 줘서 짧게 누르는 행동을 클릭이라고 합니다.”
“이해하였다. 이렇게 말이더냐?”
허공에서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린 카이킬리아가 적응이 끝났는지 시작 버튼에 커서를 가져갔다. 쿵, 하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되고, 감옥 내부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을 닮은 캐릭터가 감옥 안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본 카이킬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작하자마자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영 탐탁치 않은 듯했다.
‘뭐야, 옷을 주고 시작하네?’
그것도 카이킬리아가 입은 것과 똑같이 생긴 제복이었다. 브닼 4는 여성 캐릭터라 해도 예외 없이 가슴 가리개와 치부 가리개만 덜렁 입혀서 내보냈었는데.
자기 피조물들의 모습을 본땄으니 이번만큼은 예외를 둔 것 같았다.
“델타. 이 여자는 왜 감옥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냐? 나의 모습을 한 죄수를 조종할 순 없는 노릇이니, 죄목을 들어야겠다.”
“진짜 죄수는 아닙니다. 일종의 누명을 썼다고 보면 돼요.”
“누명이라. 이 감옥을 빠져나간다면 그놈부터 벌해야겠구나.”
“나중에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일단 마우스를 돌려서 감도가 맞는지 확인하시고, 왼손의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W, A, S, D에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엄지손가락은 제일 길쭉한 버튼 위에 올려놓으시고요. 그걸 스페이스 바라고 부릅니다.”
카이킬리아가 신중하게 조작감을 확인하는 사이,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죄수들이 도망치는 타이밍에 딱 맞춰 조작 설정을 끝낸 카이킬리아가 또다시 의문을 품었다.
“이 감옥은 언제 나갈 수 있느냐?”
“곧 나갈 수 있습니다. 일단 창살 맞은편 벽에 붙어 계세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살 밖에서 인간 도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쇠창살을 가볍게 휘어버리며 맞은편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죄수의 새된 비명이 울려퍼졌다.
“저것은…….”
카이킬리아는 키보드 자판을 눌러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굳게 닫힌 쇠창살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맞은편 감옥의 죄수를 참혹하게 때려죽인 인간 도살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조작을 멈춘 카이킬리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능한 행동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저것을 죽일 수도 없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창살 맞은편 벽까지 물러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물러나? 그냥 저것이 창살을 찢는 동안 공격하면ㅡ 무슨?!”
내 말에 토를 달려던 카이킬리아는, 쇠창살을 구겨버리고 들어온 인간 도살자가 캐릭터를 낚아채자마자 당황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타했다.
하지만 그런 게 통할 리 없었다. 인간 도살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빠드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캐릭터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왈칵 피를 토한 캐릭터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고도 아직 살아 있었으나, 살아서 버둥거리는 상반신을 향해 거대한 둔기가 내리쳐졌다. 둔기에 맞은 머리가 수박 터지듯 터져나갔다.
화면이 피로 물들며 ’You died’ 글자가 떠올랐다.
“…….”
자신을 쏙 빼닮은 캐릭터가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카이킬리아는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얼굴로 멍하니 굳어 있었다.
미네르바는 그런 카이킬리아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방실방실 웃는 표정이었다. 아우로라가 저게 맞냐는 듯 조심스레 나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야? 아무리 맨손이라지만, 공격이든 뭐든 하면 될 것 아니냐. 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느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지금 당장은 도망치셔야 합니다. 저놈을 죽일 수 있는 건 더 나중의 일이에요.”
“……알았다. 너의 말에 따를 터이니, 그 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설명하거라. 창살 맞은편 벽에 붙어 있으라 하였느냐?”
충격이 제법 컸는지, 의외로 간단하게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거기 모여서 뭐 하고 있어, 델타?”
주방 구경을 끝낸 기사단장들이 다가왔다. 제일 먼저 리제가 고개를 들이밀었고, 그 다음은 의외로 아이리스였다. 아이리스는 감옥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델타, 여기는…….”
“쉿.”
나는 아이리스가 스포일러를 하기 전에 검지를 세워 입가로 가져갔다. 제스처의 의미를 알아챈 아이리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까지는 브닼 4에 대해서 비밀로 하고 싶었다.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챈 미네르바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도 같이 확인한 탓인지 웃으며 날 따라하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인간 도살자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감옥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고, 화면이 잠시 암전되었다가 캐릭터가 돌무더기에서 빠져나오는 컷신이 재생됐다.
“너의 말대로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컷신이 끝나자마자 감옥 바닥에 표시된 조작법들을 꼼꼼하게 읽어본 카이킬리아는, 계단 밑에서 나무 둔기를 얻고 위로 올라가 잡몹 개념의 죄수들을 모조리 처치했다.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어라?’
풀피 상태로 롱소드를 주워드는 카이킬리아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방금 전에 조작법을 외운다고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카이킬리아의 재능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갑옷 없이 롱소드만 들고 중간 보스를 맞이한 카이킬리아는, 역시 한 대도 맞지 않고 패링과 구르기로 아주 가볍게 중간 보스를 처리했다.
고작 설명 몇 번만 들었던 초보자라곤 믿기지 않는 성장 속도였다.
‘하긴. 이것도 신체 능력이랑 연관이 있긴 할 테니까.’
나처럼 패턴을 모조리 외웠다면야 상관 없지만, 처음 보는 패턴이라면 그 공격에 반응하는 건 오로지 스스로의 반사 신경에 달려 있었다.
카이킬리아가 실력을 아낌 없이 발휘할 수 있는 분야 말이다. 꼭 카이킬리아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내 주위 여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실력을 보여줄 테지.
현실에서도 공격을 ‘보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설마 마우스와 키보드로 못 피할까. 그것도 약간이나마 대응의 여지를 주기 위해 선딜과 후딜이 확실히 존재하는 패턴들인데.
“이것이 게임이라 하였던가. 별것 아니로구나.”
중간 보스까지 무피해로 때려잡은 카이킬리아는 내 놀란 표정을 등에 업고선 의기양양하게 인간 도살자와의 첫 만남을 시작했고.
“…….”
엇박 패턴에 거하게 낚여 You died를 띄운 뒤 침묵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