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13)
외전: 다른 세계 – 4
피로 물든 화면에 떠올랐던 You died 문구가 사라진 이후, 캐릭터가 추락한 자리에서 일어서며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방에는 여전히 침묵이 감돌았다.
자신을 똑 닮은 분신이 참혹하게 죽어버린 카이킬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그런지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미네르바와 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는 단순히 카이킬리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나는 저게 분신이 아니라 단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어째서냐.”
부활한 캐릭터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킬리아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에 담긴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어째서 피하지 못했던 것이야? 나는 분명 마지막의 공격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네가 말한 대로 스페이스바라는 것을 눌러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느냐! 나라면 필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씩씩거리며 내게 따져오는 카이킬리아의 모습은 마치 부모님께 사탕을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진심을 담은 분노가 아니라 억울함을 못 이겨 따진다는 느낌이었다.
미네르바 역시 비슷하게 느꼈는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며 혼자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물론 카이킬리아 당신이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게임 속 캐릭터는 그만큼 움직임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한 동작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다음 동작을 할 수 없거든요.”
만약 현실의 카이킬리아였다면 저렇게 엇박 공격이 들어오는 즉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고, 한 동작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다음 공격을 할 수 없다. 설령 엇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들 거기에 낚여 굴러버린 이상 일단 맞아야 했다.
카이킬리아가 뾰루퉁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의 말인 즉, 내가 저 분신의 움직임에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더냐?”
“그렇습니다. 스스로의 경험과 전투 감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 캐릭터의 움직임에 맞추어 행동해야 하는 거죠.”
설마 브닼 4의 뉴비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게임 속 캐릭터의 스펙보다 현실 몸의 스펙이 훨씬 더 뛰어나서 적응을 못 하다니 말이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오래 산 게 맞나?’
뭐, 게임 수명이 10년이면 오래 살긴 했지.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던 카이킬리아는 다시 키보드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황금빛 금안엔 다음번만큼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딱히 큰 도움은 안 되는 의지였다.
“공격을 몇 번 피한 것밖에 없지 않느냐!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이야!”
패턴을 피한다고 연속해서 굴렀다가 스태미너가 다 떨어져서 죽고.
“분명히 그 스페이스바라는 것을 눌렀단 말이다! 그런데 왜 피하질 않아!”
전투 피로가 꽉 찬 것을 깜빡 하고 구르기를 눌렀다가 구르기가 안 나가서 죽고.
“방금 건 분명 튕겨내었을 터인데 어째서!”
전투 피로 게이지가 꽉 찬 상태에서 연타 공격 튕겨내기를 삐끗했다가 전투 피로가 터져서 후속타에 맞고 죽었다.
추락한 자리에서 다섯 번째 부활을 이뤄낸 카이킬리아는, 살짝 독기까지 품은 얼굴로 캐릭터를 조종했다.
“프흡…… 끕…….”
미네르바는 카이킬리아가 억울한 비명을 지를 때마다 입을 틀어막은 손 밖으로 꽉 막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아예 벽을 짚고 끅끅대는 중이었다.
당사자가 인간 도살자를 때려잡기 바빠서 저 꼴을 못본 게 다행이었다.
아우로라와 기사단장들도 카이킬리아가 억울해하는 모습을 뒤에서 구경하기 바빴다. 저렇게 긍정적인 쪽으로 격렬한 감정을 토해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까.
‘본인한테야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겠지만.’
여기가 시끌시끌하자 다른 방에 있던 교황들과 스텔라, 셀레네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뒤, 옆으로 슬쩍 빠져 벽에 기대어 끅끅거리고 있는 미네르바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세게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목욕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뭐가 그리 재밌으십니까?”
“그야 당연히 저 아이가 화를 내는 모습이지 않겠니. 저렇게 투정부리듯 분노를 드러내는 모습 자체를 처음 보는데, 어떻게 재미있지 않을 수 있을까?”
표면상으로는 화를 내고 있지만, 카이킬리아가 정말 진지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욕을 하면서도 일단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점이 그 증거였다. 만약 진심으로 화를 냈다면 저렇게 브닼 4를 계속 붙잡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도 닼라 모드 하다가 진지하게 화난 적이 있어서 잘 안다.
그래봤자 하루를 못 가고 다시 켰지만.
“아이에게는 정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저 아이가 죽기 전에, 이리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으니.”
미네르바가 내 손을 잡아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제 오빠를 유일하게 악마와 연관되지 않았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살려줄 정도로 고립되어 있던 아이란다. 그랬던 아이가 스스로의 감정을 저토록 다채롭게 드러내고 있다면, 그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지는 명백하지 않겠니?”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은백색 동공은, 또다른 엇박 패턴에 낚여 You died를 띄운 카이킬리아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 역시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를 지웠다.
‘그냥 카이킬리아가 화내는 모습이 재밌어서 웃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나.
방금의 웃음에는 미네르바 나름의 기쁨도 제법 섞여들어가 있던 셈이다.
첫 만남에서의 카이킬리아는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긴 했다. 자기 호기심 충족시키겠다면서 사람 목에 대고 칼을 휘두르는 짓을 태연히 해버릴만큼.
옛날의 카이킬리아와 지금의 카이킬리아를 비교해보면, 온화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 자체가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뀐 방향은 당연히 긍정적인 쪽이고.
“아, 방금 건 아깝게 됐네요. 몇 대만 더 때리면 잡았을 것 같은데.”
아우로라의 목소리를 듣고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마우스를 잡은 카이킬리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에, 인간 도살자의 남은 HP를 확인했다.
마침 사망 모션이 제일 긴 데스신이었던지라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마래로 피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들고 있는 무기가 롱소드였으니까…… 2대면 잡았겠네.’
남은 HP의 두께를 보니 그랬다.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한 사실이지만, 내 추측이니 정확할 거다.
“욕심 내면 안됩니다, 카이킬리아. 공격보다는 방어를 우선으로 하기. 이 게임에서 첫 번째로 통하는 교훈이니 마음 깊이 새겨두서야 합니다.”
두 대만 더 때리면, 혹은 한 대만 더 때리면 잡을 수 있겠다고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그 남은 한 대를 못 때려서 처음부터 다시 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브닼 시리즈는 대대로 공격보다 방어가 우선인 게임이니까. 흔히 말하는 육참골단을 생각했다간 살을 줬는데 내 뼈만 일방적으로 부서지는 수가 있다.
“갑옷은 왜 안 입으셨습니까? 갑옷을 착용하셨으면 방금 한 대는 버티셨을 텐데요.”
닼라 모드가 깔리지 않은 바닐라 브닼 4였기에, 기사 태생이 제공하는 중갑만 제대로 입어도 인간 도살자의 공격을 제법 버틴다.
하지만 카이킬리아는 갑옷 없이 롱소드만 달랑 착용한 채 본인의 제복 그대로 인간 도살자에게 덤벼들었다. 맨몸이라서 더 빨리 죽은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떠한 연유로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냐니, 그거야 뻔한 일이지 않느냐.”
다시 추락 지점으로 돌아온 카이킬리아는 익숙하게 잡몹들을 처치하며 나아갔다.
“여신이 직접 나의 분신을 만들어주었는데, 나의 모습 그대로 깨지 않고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아무래도 게임 속 캐릭터에 제법 깊게 몰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굉장한 집중력을 보이며 인간 도살자를 한땀한땀 때려잡는 카이킬리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비록 이번이 6번째 도전이긴 하지만, 브닼 시리즈는커녕 게임이란 것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이 고작 6번째만에 인간 도살자를 잡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다.
고인물들이야 버려진 자 고르고 탭댄스를 추면서도 잡긴 하지만, 인간 도살자는 어디까지나 도망치라고 만들어진 보스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닌가?’
카이킬리아의 신체 능력을 생각해보면, 5번이나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대적으로 못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그래도 일단 재미는 붙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재미 없다고 포기했더라면 다른 걸 뭘 시켜줘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말이다. 브닼 4 말고 시켜줄 게임이라면 브닼 3밖에 없다.
“되었다!”
카이킬리아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하늘을 쳐다보며 커다란 괴성을 지른 인간 도살자가 뒤로 쿵, 넘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광장이 아니라 복도에서 잡으면 해골 폭탄 패턴을 사용하지 않으니까. 물론 바닐라 한정으로.
인간 도살자를 때려잡은 카이킬리아가 초롱초롱해진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짝짝, 작게 박수를 쳐줬다.
“축하드립니다, 카이킬리아. 엄청 잘하셨어요. 아, 이제 드랍템을 떨굴 테니 가까이 다가가서 습득하면 됩니다.”
큰 반응을 보이진 않은 카이킬리아였지만, 칭찬을 듣고 의기양양해진 입꼬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걸 본 미네르바도 방긋 웃었다.
인간 도살자의 시체로 다가간 캐릭터가 흰색 구체 앞에서 E를 누르자, 작은 툴팁창이 떠오르며 익숙한 모습의 시뻘건 색 검과 ‘피 묻은 검’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무척이나 익숙한, 분명히 어디선가 봤던 외형에 혼란스러워 하기도 잠시, 어디선가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튀어나왔다.
“저것은…….”
인간 도살자를 보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리스가 침음을 흘렸다. 익숙한 감옥, 익숙한 적, 익숙한 등장, 그리고 익숙한 은빛 갑옷.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도 있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내게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말을 하기 시작한 은빛 기사의 모습에, 아이리스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툴팁을 읽던 카이킬리아도 작게 중얼거렸다.
“……이 검, 기억하고 있노라. 델타 네가 쓰던 무기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내가 태연히 긍정하자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어차피 인간 도살자를 잡고 아이리스를 본따 만든 NPC가 나온 시점부터 숨길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이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알려드려야겠죠.”
“다들 자신과 똑같은 기술을 사용했다던 그 놈들 기억하십니까? 그것들이 이 게임에서 등장하는 놈들이었습니다. 세계를 먹는 자가 제 지식을 모두 흡수했으니까요.”
설명이 끝날 때 쯤에는, 흥미진진한 눈을 하고 있던 미네르바마저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게임 자체가 자신들의 세상을 본따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목적이 오로지 날 위해서였다니 더더욱.
‘내 옛날 행적도 게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분간 숨기는게 맞겠지.’
저쪽에서 먼저 눈치를 채고 물어오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진혼을 위해 내 기억을 받아들였던 입장에서 브닼 1부터 3까지는 트라우마 피드백 장치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아이가 고대의 스크롤이 어디 있는지를 모두 알고 있던 것도?”
“네. 이 게임 덕분입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면 여신님의 세계 그 자체나 다름없으니까요.”
고대의 스크롤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 덕분이라는 말에, 미네르바가 눈을 빛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표정으로 훤히 보였다.
“충분히 이해하였다. 이것이 내가 한때 다스리던 제국을 고스란히 재현하였다면, 더더욱 하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마침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다.”
“해보고 싶은 것이요? 뭡니까?”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거라. 목표를 이룩한다면, 그때 너에게 제일 먼저 말하여주겠다.”
카이킬리아는 그러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쥐고 대화문을 읽어들이는데 집중했다. 목표라는 게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건가 싶었다.
“저…… 델타. 혹시 나도 해 봐도 돼?”
“아우로라 너도?”
아우로라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살던 세계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하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해보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혹시 더 할 사람이 있나 싶어 둘러보았지만, 카이킬리아와 미네르바, 아우로라 외에는 직접 해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신기하다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정도.
닉스는 우리가 떠들든 말든 이불을 돌돌 만 채 헤실헤실 웃고 있었고.
‘……이참에 싹 바꿀까?’
나는 급격하게 수요가 늘어난 컴퓨터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아직 하이엔드에서 한 끗발 정도밖에 딸리지 않는 물건이긴 하지만, 남자라면 언제나 컴퓨터에 욕심을 내는 법이다.
내가 하이엔드급 부품으로 도배된 컴퓨터를 생각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 사이, 주머니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폰을 꺼내 확인했다.
톡의 발신인에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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