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16)
외전: 다른 세계 – 7
“……방금 뭐랬어.”
“아냐. 됐어. 보던 거 계속 봐. 어차피 이해 못 할 텐데 더 말해서 뭐해?”
“야! 말 다 했냐?”
곧바로 들어간 추가 공격에 명치가 오목해진 동생년과 한바탕 남매 싸움을 벌인 후, 리제와 나는 텅 빈 거실에 앉아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결국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동생년은 한참을 부들거리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방 아니면 밖이겠지만, 솔직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걔가 간 곳을 알아서 뭐하게.
리제는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을 너무 막 대한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걱정해왔지만, 내가 스마트폰을 켜 여태껏 나누었던 화려한 상호비방의 내역을 보여주자 단번에 조용해졌다.
에리카와 맨날 투닥거리긴 해도 그 모든 행동이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한 리제에게는 대체 뭔가 싶은 대화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와서 짐 좀 들어줄래?”
“네. 알겠어요. 동생도 나오라고 해요?”
“유진이 힘으로는 얼마 못 들 텐데…… 알아서 하렴.”
처음에는 나만 갔다 오려 했지만, 리제가 자기 혼자 앉아있을 순 없다며 나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야! 엄마가 짐 들러 나오래!”
2층으로 가는 계단 밑에서 외치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동생년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밖으로 나오면서도 씩씩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잠시 리제의 가슴에 줬다가 도로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자, 표정이 한층 더 크게 일그러졌다. 동생년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엄마! 오빠가 나보고 뭐랬는지 알아?!”
우리 둘 다 적어도 엄마나 아빠가 들을 때만큼은 그럭저럭 남매인 척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싸웠다가, 남매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명목 아래 한 달씩이나 팔자에도 없는 다정한 말과 행동을 해야 했던 경험이 있어서였다.
그런 짓을 두 번 하고싶지 않았기에 이루어진 암묵적 합의였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허튼 짓을 했다간 쌍방이 고통받을 테니 말이다.
현관을 열고 나갔다. 부모님은 차에서 종이 박스를 내리시는 중이었다. 동생년이 그 옆에 달라붙어 내가 뭘 했는지를 쫑알쫑알 일러바쳐댔지만, 두분 다 딱히 제대로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전부 본인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러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일러바치지 말고 굵직한 것만 알려드렸어야지. 하나하나 일일이 말했다간 갈수록 시큰둥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아들, 일찍 왔네……? 어머, 어머어머어머.”
내게 평소처럼 인사를 하려던 엄마는 이쪽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시고선 감탄사를 연발하며 다가왔다.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나버린 동생년이 날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불태우다가 이번에는 아빠한테 징징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도 이쪽을 보고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어머어머어머. 세상에, 세상에.”
“……?”
인사를 하려던 날 그대로 지나친 엄마가 내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리제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들보다 여자를 우선시하는 모습에, 리제가 당황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니, 한 달만에 본 아들한테 인사도 안 해줘요?”
“한 달만에 보는 아들이랑 21년만에 보는 아들의 여자친구가 있다면, 내가 둘 중에 누굴 보고 더 놀라겠니?”
“……저 이제 21살인데요?”
21년만에 보는 여자친구라고 하면 꼭 내 나이가 그것보다 한참은 더 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엄마는 내 불평을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리제를 돌아보았다.
“저는 강소영이라고 해요. 아가씨는 이름이 뭐예요?”
“리, 리제입니다. 어머님.”
“어머님이래! 여보, 들었어? 이 예쁜 아가씨가 나보고 어머님이래! 아차,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닌데. 자, 자. 어서 들어와요. 손님을 밖에 세워두면 안 되지.”
어머님이라는 말에 입이 귀에 걸려버린 엄마가 리제의 팔을 질질 끌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년이 자기 말은 아무도 안 들어준다고 투덜대며 그 뒤를 따랐다.
멍하니 굳어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상자를 내리는 아빠에게로 다가갔다. 그 옆에는 종이 박스가 3개나 쌓여 있었다.
내가 집에서 나올 때 세 번째 상자를 쥐고 계셨는데, 방금 막 내리신 걸 보면 아빠도 이제야 정신을 차리신 듯했다. 방금 엄마 호들갑이 좀 굉장하긴 했지.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네 엄마가 너 오랜만에 온다고 이것저것 많이 집어넣더라. 여기서 한 상자 더 늘어나려는 거 내가 말렸다. 애 배터져 죽일 일 있냐고.”
머릿속에 그림이 착착 그려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종이 박스 3개를 겹쳐 쌓고 통째로 들어올렸다. 그러고 나서야 살짝 놀란 기색이 담긴 아빠의 시선을 보고 아차 싶었다.
“요새 운동이라도 하고 있니.”
다행스럽게도 추궁해오진 않았다. 별것 아니라고 한 손으로 들기라도 했으면 진짜 큰일날 뻔 했다. 그건 운동을 했다는 변명으로도 수습 못 한다.
“네…… 뭐. 그렇죠.”
“그러냐. 보기 좋다. 계속 열심히 해라.”
여태 해온 게 운동이라면 운동이긴 하지. 여러 의미로 말이다.
나는 머쓱하게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을 열자마자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대부분은 엄마 목소리였다.
“확실한 거 맞죠, 여신님?”
현관에 멈춰서서 중얼거렸다. 얼굴 주변에 동그란 황금색 빛무리가 나타났다.
ㅡ네. 위화감을 수정하는 건 제가 할 테니, 당신은 절 믿고 기다리시기만 하면 돼요.
“믿으라고 하시니까 더 불안한데요. 그동안 여신님께서 저지른 실수가 어디 한둘이어야죠.”
당장 내 압도적인 정력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듣고 여신을 혼냈던 게 일주일도 안 됐다.
자신의 말이 대놓고 부정당하자, 시무룩해진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ㅡ이번에는 정말로 믿어주셔도 괜찮은데…… 히잉…….
“어디 두고보겠습니다. 일단 첫 단추는 훌륭하게 꿰셨으니까요.”
당장 방금 전에 ‘리제’라는 이름이 대놓고 튀어나왔음에도 누구 하나 의문을 갖지 않은 것 역시 이클립스 덕분이다. 그런 식으로 천천히 위화감을 제거해나갈 예정이었다.
종이 박스를 들고 거실에 도착했다. 엄마에게 붙들린 리제가 질문 공세를 받으며 쩔쩔 매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랑 어떻게 만났다고요?”
“처, 처음 보자마자 이 남자다 싶어서 제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그리고 사귀어보니 취향도 서로 잘 맞고 해서…….”
“초면에요?”
“네.”
“어머어머어머! 유진아, 들었지? 처음 보자마자 이 남자다 싶었는데 취향까지 잘 맞았대!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니!”
“……그 새끼를? 뭔가 약점이라도 잡히셨나?”
동생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는 호들갑을 떠시느라 못 들으신 듯 했지만, 나한테는 다 들렸다. 아마 리제도 들었겠지. 나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나는 동생년을 한 대 쥐어박고픈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주방 식탁 위에 박스들을 내려놓았다. 하나를 슬쩍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박스 안은 풀 한 포기 없이 모조리 고기 투성이였다.
고기 종류로 아무거나, 라고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그걸 적당히 분류해두고 거실로 돌아갔다. 잔뜩 흥분한 기색의 엄마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아들! 이런 예쁜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엄마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야 할 거 아니니! 여자친구랑 같이 있어주느라 집에 못 왔다고 하면 얼마든지 기다려줬는데!”
술도 안 먹었는데 저렇게 활기찬 분위기의 엄마는 처음이었다. ‘여자친구’라는 말에 리제의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엄마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신 듯했다.
오히려 옆에 있던 동생년이 그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지금의 리제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이니 말이다.
절대 약점을 잡힌 걸로는 보이지 않겠지.
“아가씨. 그러면 사귄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이런 자리에 온 거예요? 설마 오기 싫었는데 제 아들이 막무가내로 데려온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제가 오고 싶다고 했어요. 어머님을 꼭 뵙고 싶어서요.”
누가 보기에도 사랑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살짝 붉어진 얼굴과 예쁜 말이 합쳐지자, 몇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호감도는 벌써 최고치를 찍어버린 상태였다.
흥분이 도를 넘었는지 역으로 차분해진 엄마가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들. 여자친구 데리고 잠시 방에 올라가 있을래?”
“저, 저도 도울게요.”
“아가씨는 손님이잖아요. 제 아들이랑 같이 쉬고 있어요. 다 되면 불러줄게요.”
리제가 돕겠다며 같이 일어섰지만, 엄마는 그런 리제를 단호히 내쳤다. 대신 옆에서 슬금슬금 방으로 도망치려던 동생년의 뒷덜미를 콱 잡아챘다.
“유진! 너는 엄마 도와야지 어디 가려고!”
“아, 왜 나한테만 그래요! 오빠 시키면 되잖아! 명분도 좋네! 여친한테 요리 만들어줘야지!”
“얘가 정신이 있어 없어! 주원이가 엄마 도와주면 주원이 여자친구는 어떡하고? 억울하면 너도 남자친구 데려와! 얼굴 멀쩡한 애가 어떻게 스물이 되도록 남자 한 명 없니!”
나는 엄마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동생을 향해 최고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은 얼마 못 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우린 올라가자. 할 일이 있잖아?”
“……정말 올라가도 돼? 그래도 도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는 저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쉬라고 해놓고 안 도와줬다고 점수 깎고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예전부터 ‘돌려말하기’란 엄마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우리가 너무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겉으로 나오는 말이 곧 엄마의 본심이었다.
방금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쉬라고 했으면, 그냥 올라가서 편하게 쉬다가 요리가 끝났을 때 내려오면 된다. 괜히 속내를 짐작하니 어쩌니 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저…… 델타. 네 진짜 이름은 ‘주원’인 거지?”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날 계속 흘끗거리던 리제가 질문해왔다. 아까 엄마가 말하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응. 성씨는 백이고. 그래서 백주원이야. 너희한테 불리는 건 델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니까 굳이 안 바꿔도 돼.”
방금 떠오른 사실이지만, 생각해보니 이름대로 되긴 했다. 델타라는 단어가 이클립스 세계의 고어로 ‘변화’라는 뜻이랬는데 결국 변화를 가져왔으니까.
비록 광신도 집단이 되어버린 성국처럼 안 좋은 쪽의 변화가 있긴 해도.
“주원…… 주원…… 그렇구나…….”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이는 리제를 방에 들이고 문을 닫았다.
바로 문고리를 걸어잠갔다. 남녀 둘이서 문까지 잠가가며 뭘 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보일 모습을 들키는 것보단 훨씬 낫다.
그러자마자 바로 옆에 푸른 마나로 이루어진 원이 나타났다. 원의 내부를 통해 자취방의 풍경이 보였다. 테두리를 따라 내 방을 두리번거리는 머리들이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미네르바만 빼고 말이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겠니?”
“네. 그러시면 됩니다. 잘해줬어, 리제.”
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웃으며 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와 교대하듯 루나가 건너왔다. 플로레타는 그 뒤에 서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에반젤리나.”
“예. 세라피카 언니.”
교황 자매가 동시에 눈을 감았다. 스르륵, 플로레타의 몸이 뒤로 무너졌다. 스텔라와 셀레네가 그 몸을 사뿐히 받쳐 침대에 눕혔다.
루나의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눈이 천천히 떠졌다. 어느새 오른쪽 눈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던, 강림이었다.
미네르바가 지팡이를 살짝 휘둘렀다. 황금색으로 물들었던 머리카락이 다시 한번 검게 바뀌고, 눈동자까지 칠흑색으로 변했다.
그 몸에도 어느새 리제가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흰색 폴라티에 스키니진이 입혀졌다.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하게 된 교황이 살포시 웃었다.
“가시죠. 주원 씨.”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