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19)
외전: 다른 세계 – 10
사실 일반적인 대한민국의 상식에 비추어본다면 부모님의 말은 실례에 가까웠다.
나는 아직 21살밖에 안 된 데다, 여자친구도 나랑 동갑이라고 소개했으니 마찬가지로 21살이다. 게다가 설정상으로 사귄 지는 아직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20대 초반 커플에게 대뜸 결혼할 생각이 있냐는 말부터 꺼낸 셈이다.
정말 어지간히 서로의 관계에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기가 불가능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어계신 것도, 혹시 내 여자친구가 불편해하거나 말을 돌릴까 봐 그런 것이겠지.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아들과의 관계가 파탄날지도 모르고.
‘아마 거절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신 질문이겠지만.’
물론 엄마도 아무런 근거 없이 저런 질문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 우리들을 관찰하고 나름의 확신을 가지셨을 확률이 높았다.
“네. 있어요.”
“델…… 주원아?!”
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자 아이리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하마터면 저쪽 세계의 내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부모님은 말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혀가 꼬인 것처럼 들리니까.
나로서는 당연히 이래야 하는 일이었다. 망설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 자취방에서도 마법으로 이곳을 지켜보는 중일 테고.
이런 내 대답이 마음에 드신 듯,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 그러면 아가씨는 어때요?”
은근한 기대를 담은 시선이 아이리스에게로 향했다. 아이리스는 뺨을 화악 붉히고선 잠시 어버버 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저,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머, 어머, 어머…….”
엄마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옆에 앉은 아빠의 허벅지를 퍽퍽 내리쳤다. 대체 얼마나 세게 치는 건지 짝짝대는 소리가 제법 세차게 들려왔다.
졸지에 허벅지를 십수 대나 얻어맞은 아빠는 크흠, 하는 헛기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주원아. 잠시 나 좀 보자.”
“네.”
무척 감동받은 눈을 한 엄마가 아이리스의 옆으로 다가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아빠의 뒤를 따라 나섰다.
동생은 몇 시간 전부터 어디로 갔나 안 보였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주원아.”
“네.”
방 안에서 했던 대화의 서두가 똑같이 반복됐다.
“너보다 훨씬 늙은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아가씨다. 절대 남부럽지 않게 키워낸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잠깐이지만 어쩌면 우리 아들에게도 아까운 여자가 아닌가 싶더라.”
“…….”
“마음 확인했으니, 결혼 일정은 둘이서 충분히 상의해서 정해라. 저쪽 집안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만, 우리는 성인 남녀가 결혼한다는데 간섭할 생각 없다. 대신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그러고보니 그 애들한테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나. 저 말을 들으니 문득 떠올랐다. 여태껏 언급한 적도 없고, 만났던 적도 없어서 까맣게 잊고 살았다.
카이킬리아와 아우로라, 그리고 미네르바와 닉스야 특이 케이스니 제외하더라도, 나머지는?
‘……그래도 별 탈 없이 끝나긴 할 테니 다행인가.’
이클립스의 세계는 어차피 일부다처가 허락되어 있으니까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면 끝일 거다. 지금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말이다.
“네. 알았어요.”
“그래. 이만 들어가자. 너희 엄마도 지금쯤이면 그 아가씨랑 이야기 끝났을 거다.”
아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먼저 들어가셨고, 나는 현관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이클립스를 불렀다.
“여신님.”
ㅡ네. 당신.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ㅡ거의 다 끝났어요.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변을 최대한 천천히 진행하는 동시에 아주 국소적인 부분만을 건드렸고요. 이 세계가 제 힘에 침식당하거나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ㅡ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텐데. 추궁할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나한테 피해가 올 수도 있는 일이라면 진작 말했겠지.
거실로 돌아오자, 어느새 앨범을 꺼내온 엄마가 아이리스를 옆에 끼고 이야기꽃을 피우시는 중이었다. 아이리스는 내 과거 사진에 헤벌레 하는 중이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옛날부터 아주 그냥 게임에 미쳐선, 밥 먹으라고 해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여기, 그래놓고 시험 점수 잘 나왔다고 어깨 올라간 것 좀 보렴. 이러니까 우리도 뭐라 할 수가 없잖니.”
아니, 그런 걸 왜.
장장 4시간에 걸친 흑역사 방출을 끝낸 뒤, 우리는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특히 엄마는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계셨다.
떠나면서 동생에게 풍유환을 선물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잔뜩 우울한 상태로 방에 틀어박혀 있던 동생은, 풍유환의 효과가 발동되자마자 펄쩍펄쩍 뛰면서 날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한테 한 대 얻어맞았다. 어딜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진짜 재밌는 건 다음날이지.’
24시간 뒤에 폭풍처럼 걸려올 전화와 문자 세례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웃음이 차올랐다. 내 웃음을 본 아이리스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평을 내렸다.
나도 악마는 아니다. 언젠가는 영구지속 효과를 지닌 풍유환을 줄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다들 수고했ㅡ”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펼쳐진 풍경에, 할 말을 잃어버린 내가 우뚝 멈췄다.
내 앨범에서 추출한 것처럼 보이는 과거 사진들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앨범 사진보다 훨씬 더 고화질로 말이다.
나는 범인을 쳐다보았다.
“이거 뭡니까, 미네르바 님?”
“아이가 말한 사진이라는 개념이란다. 마나를 통해 재현해보았지.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종이 한 장에 담아둘 수 있다니, 여태껏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싶더구나.”
“당장 갖다버리시죠.”
“알았단다.”
사진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분해한 미네르바와, 사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누구 하나 아쉬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얘들, 이미 챙길 건 다 챙겨놨다고.
그것까지 몽땅 다 내놓으라 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에서 대놓고 꺼내들지는 않을 테니, 눈에 안 띄는 곳이기만 하다면 내 사진으로 뭘 하든 상관 없다.
슬금슬금 문을 닫고 방 안에 틀어박혀버린 성국 측 4명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델타 씨 집에서 보낸 시간은 어땠습니까, 아이리스?”
“……엄청, 좋았다.”
“압니다. 척 보기에도 그래보이셨으니까요. 예의상 물어본 겁니다.”
에리카가 자기 언니를 닮은 미소로 히죽히죽 웃으며 아이리스를 툭툭 건드렸다. 아이리스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리카 너도 너무 상심하진 말고. 기회라면 나중에 차고 넘치도록 올 테니까.”
“딱히 상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리스가 벌벌 떨던 걸 보면 오히려 두 번째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벌벌 떤 적은 없다!”
“정말로요? 미네르바 님한테 부탁해서 확인해볼까요?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인가 하는 것도 재생할 수 있으시던데.”
“그건…….”
기사단장들이 서로 투닥대는 동시에 미네르바의 말도 안 되는 사기성이 드러나는 동안, 소리없이 다가온 닉스가 내 옆에 섰다.
원래는 아우로라 다음이어야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 때문에 뒤로 밀려나버렸다.
“건너뛰어서 미안해, 닉스. 다음 번 방문 때는 네가 첫 번째일 거야.”
“헤헤, 어쩔 수 없잖아요. 저 때문에 이 세상이 꼬이면 안 되는걸요.”
닉스와 아이리스의 순서가 바뀐 이유는 다름아닌 키 때문이었다. 닉스의 키가 워낙에 작은지라 새로운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신한테 경고를 받은 것이다.
여신도 힘을 대폭 제한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별 수 없었다. 이클립스가 이 세상에 깊게 관여할수록 여신의 세계와 동화될 확률이 높다고 했으니까.
그 동화된 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면 그 힘으로 인해 또 동화율이 올라가버리니, 아예 처음부터 힘을 제한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이클립스도 모를만하긴 했지. 자기 세상 말고는 한번도 안 건드려 봤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 엄청난 사실이 이제서야 밝혀진 건, 여태까지는 이클립스가 여기 간섭할 일 자체가 없어서였다. 영혼 수집해서 내던진 일은 외부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단지 세상에 간섭하는 것만으로도 차원이 합쳐질 가능성이 생겨나다니, 역시 여신은 여신인가 싶었다.
“그, 그래도 전 이런 몸 고른 거 후회 안 해요. 헤헤. 당신이 들고 움직이기 쉽잖아요.”
“그거야 뭐…… 잠깐.”
처음에는 안아들기 쉽단 말로 이해하려다 잠시 멈칫한 내가 닉스를 내려다보았다. 닉스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거 무조건 그 뜻이다.
헤실헤실 웃는 닉스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려주고 기사단장들을 찾아갔다. 어느새 아이리스도 기사단의 정복으로 돌아와 있었다. 흰 민소매와 돌핀팬츠,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없는 속옷.
동료 3명에게 둘러싸여 온갖 놀림을 받던 아이리스는 나를 보자마자 내 소매를 꾸욱 붙잡으며 뒤로 숨었다.
“아, 맞다. 아이리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가.”
“동생 방에 들어가보니까 걔가 대놓고 나 우울해요 이러고 있던데, 뭐 짚이는 거 있어?”
“음…… 하나 있다.”
“그래? 뭔데?”
백유진 걔가 우울해했다는 말에, 내 동생이 싫었으면 싫었지 절대 좋은 감정은 없을 3명도 귀를 쫑긋 세웠다.
“대화를 하다가 브래지어 이야기가 나왔다. 네 동생은 가슴이 처지는 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차야 한다고 대답했지. 그래서 내가 착용 목적이 그런 이유에서라면 너는 왜 착용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는데, 그걸로 대화가 끝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격을 맞았구나, 동생아.
“너는 동생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만…… 혹시 말해줬어야 하는 건가?”
나는 약간 불안하게 묻는 아이리스를 앞으로 끌어당겨, 그 몸을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아이리스는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델타.”
“기특해서.”
나는 속으로 진짜 풍유환의 제공 날짜를 대폭 상향조정했다. 그런 일까지 당했다면 기꺼이 날짜를 앞당겨 줘야지.
외전: 일상
이쪽 세계에 들른 지도 어느덧 2주일이 흘렀다. 그 동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러라고 권유했다. 뭘 하든 좋으니 휴가를 왔다 생각하고 이 세계의 생활을 마음껏 체험해보라고 말이다. 필요한 것, 혹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여신과 내가 전부 부담하고.
처음에는 나랑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자는 제안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우선 카이킬리아와 아우로라는 브닼 4에 푹 빠지다시피 했다. 몇 시간마다, 혹은 억까를 당해서 죽었을 때 날 찾아와서 끈적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으로 보냈다.
의외의 사실이 있다면 아우로라의 진행 속도가 카이킬리아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고모님. 그렇게 고모님의 생각대로만 바라보지 마시고, 게임 캐릭터가 할 수 있는 행동 안에서 움직임을 계획하셔야 해요. 게임 캐릭터는 고모님처럼 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다니까요? 구르는 도중에 키보드 두드리셔봤자 동작 캔슬 못 한다고요.”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건 여신이 나를 본따 강림시킨 캐릭터이지 않느냐. 그런데 왜 나와 똑같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야! 어떤 공격이든 한 대만 맞아도 죽다니, 나는 이렇게 나약하지 않노라!”
“고모님의 외형만 닮았지 아예 다른 존재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힘드시면 그냥 델타 말대로 다키스트 라이트 모드 없이 하시지…….”
첫 번째로, 카이킬리아가 계속해서 ‘본인의 감각처럼’ 브닼 4를 플레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 무력의 정점을 꼽으라면 미네르바와 함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카이킬리아다. 그런 사람의 본인의 감각대로 움직여대니 게임이 제대로 풀릴 리가 없었다.
모니터 밖에 앉아있는 사람의 스펙이 너무 뛰어나서 생기는 일이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아무리 날고긴다 한들, 카이킬리아의 스펙에는 절대 미치지 못하니까.
‘카이킬리아 스펙을 100% 구현하면 닼라 모드고 뭐고 어지간한 놈들은 한방컷이겠지.’
그래도 대처법은 나름 빠르게 찾는 편인데, 자기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을 캐릭터가 못 피해서 You died를 띄웠다며 억울하다고 나한테 달려와 위로받는 시간이 제법 많았다.
이런 카이킬리아에 비해 아우로라는 본인의 무력이랄 것이 아예 없었던지라 적응이 훨씬 빨랐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델타. 이거 생각보다 할만한데?”
“……진짜로?”
“응. 내가 살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둘러보는 것도 무척 재밌더라. 나는 저택에만 갇혀 살아서 밖으로는 거의 못 나가봤잖아.”
두 번째 이유는, 아우로라가 심상치 않은 재능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의 습득과 적응 속도 자체만 놓고 보면 나보다도 훨씬 빨랐다. 나는 10년 내내 브닼 4만 플레이해와서 지금처럼 된 거지, 아우로라같은 케이스는 아니었다.
리바누스의 혈통 탓인지 무지막지하게 발휘되는 재능에 더해 본인의 의욕까지 합쳐지니 닼라 모드가 깔려있는데도 진도가 쭉쭉 빠졌다. 저게 대체 뭔가 싶었다.
덕분에 자존심 강한 카이킬리아는 아우로라가 하는데 자기가 못할 이유가 뭐겠냐며 닼라 모드를 적용받고 새로 시작했다가 아주 개박살이 나는 중이었다.
“이것도 안 되는구나.”
그리고 같이 브닼 4를 시작했던 미네르바는 게임을 직접 하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내부의 데이터만 빼올 생각이 만반이었다.
애초에 브닼 4를 해보겠다고 한 이유부터가 고대의 스크롤을 비롯한 세계의 비밀을 찾으려고 였으니까. 처음에 몇 번 죽다가 10분도 안 돼서 질렸다고 포기한 뒤로는 계속 저런 꼴이었다.
ㅡ파지지직!
“어머.”
이 세계의 물건이 마나와 마법을 버티도록 만들어졌을 리 없기에, 미네르바는 고작 2주 동안 컴퓨터를 100번도 넘게 부숴먹었다.
은백색 동공이 날 향했다. 나는 익숙하게 복원의 권능을 사용했다. 내부 회로가 죄다 타버려서 검은 연기를 풍기던 본체가 순식간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야.”
“네, 미네르바 님.”
“아이야, 아이야, 아이야.”
다시 컴퓨터를 건드리는 대신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온 미네르바가 날 침대에 앉히더니, 공주님 안기를 받듯이 허벅지 위에 옆으로 올라타 내 목을 끌어안았다.
물컹, 자연스레 내 얼굴이 가슴 근처에 위치했다. 미네르바는 왼팔로 내 머리를 꼬옥 끌어안아 자기 가슴에 눌렀다. 머리가 가슴골에 푹 파묻혔다. 비강으로 우유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아이가 날 도와주면 안 되겠니?”
“또 그 소리십니까. 고대의 스크롤이 잠든 위치라면 얼마든지 알려드리겠지만,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려달라는 건 저도 귀찮아서 못합니다.”
그 비밀의 범위가 얼마나 넓을 줄 알고.
“이렇게 부탁하겠단다. 응?”
미네르바의 목소리는 거의 아양에 가까웠다. 조급한 감정이 있긴 해도 나름 기품있으면서 정중한 말투로 부탁하던 미네르바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모르겠다.
“보상이 부족해서 그러니?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말만 하려무나. 아이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겠단다. 어떤 것이든, 전부.”
조곤조곤한 속삭임과 함께,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을 쥐고 잡아당겼다. 손가락 끝이 반쯤 열린 목욕가운을 지탱하는 끈에 닿았다. 마치 이대로 풀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머리를 끌어안은 미네르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 양 옆을 풍만한 가슴이 감쌌다. 우유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미네르바가 원하는대로 가운의 끈을 풀어헤치는 대신, 그 몸을 번쩍 들어올려 침대에 내려놓았다. 굉장히 요염한 자세로 앉은 미네르바가 뺨을 잔뜩 부풀렸다.
저건 또 누굴 보고 배운 거지.
“미네르바 님이 직접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를 플레이하셔서 알아내시면 된다고요.”
“하지만 재미가 없는걸.”
미네르바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째 투정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유치해지는 느낌이었다.
“저한테는 마법 공부가 그런 느낌입니다.”
“어째서? 게임보다는 공부가 훨씬 더 재미있지 않니?”
역시 그 미쳐버린 마법사들의 수장다운 대답이었다.
ㅡ찰칵!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고 미네르바가 다시금 아양을 떨기 시작할 무렵, 등 뒤에서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기념비적인 오늘의 200번째 셔터음이었다.
나는 일단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입술을 삐죽거리는 미네르바를 남겨두고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짙게 웨이브 진 금발 머리가 보였다. 곧바로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지요, 델타 님.”
“저희에게 말씀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방 안에는 태연하게 앉아서 날 맞이하는 네 사람이 있었다.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 이렇게 성국 측 네 사람 말이다.
“있지.”
“앗!”
“아아앗!”
교황들이 가슴골에 숨겨둔 스마트폰을 마법으로 빼앗아왔다. 플로레타와 루나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선 플로레타의 것부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내가 찍힌 사진을 배경으로 한 잠금화면이 드러났다. 루나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하나씩 선물해준 뒤로, 다들 하나같이 내 사진이나 같이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쓰고 있었으니까.
진짜는 이 다음이다. 나는 잠금을 풀고 망설임 없이 갤러리로 들어갔다. 플로레타가 1만 7389개, 루나가 1만 7421개. 둘이 합쳐서 약 3만 5천개에 달하는 사진 목록이 주르륵 불러와졌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부 다 나를 찍은 사진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델타 님. 그 죄는 저희들의 몸으로 갚겠습니다.”
“예. 성자님의 옥체를 멋대로 촬영한 저희에게 부디 마음껏 벌을 내려주시지요.”
플로레타와 루나가 벌을 받겠다며 몸에 걸친 시스루를 들어올렸다. 이클립스와 똑같지만 더 음란한 복장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언제나 의복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는 이클립스의 가리개에 반해, 교황들의 가리개는 가슴골에 끼이거나 겨드랑이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교황들이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스텔라와 셀레네를 끌어안았다.
“이 아이들 역시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델타 님.”
“그러니 저희들과 같이 벌을 내려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플로레타와 스텔라의 가슴이 물컹거리며 모양을 바꾸고, 루나와 셀레네의 허벅지 안쪽이 서로 맞닿았다. 그러면서도 네 쌍의 눈동자는 오롯이 나만을 향해 있었다.
“죄송해요. 성자님. 이 죄는 저희들의 몸으로 갚을게요.”
“그렇습니다. 부디, 마음껏 단죄하여주시길.”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내가 별 말이 없으면 내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어서 좋고, 지금처럼 나한테 들키면 벌을 받겠다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어서 좋다. 어느 쪽을 고르든 이득인 선택지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뭐, 저것도 나름대로 이 세계를 즐기는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다. 단지 지극히 내게 편중되어 있을 뿐.
교황들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폰을 돌려받았다가 다시 의욕에 불타서 나를 찍어댔다.
“델타! 너도 같이 먹을래?”
거실에 풍기는 음식 냄새를 따라가자, 온갖 음식을 시켜먹으며 맛을 평가하고 있던 기사단장들이 맞이해주었다.
내 세계의 음식 맛은 어떨지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라던데, 아마 제일 진정한 의미로 이 세계에서의 휴가를 만끽하는 중이 아닐까 싶었다.
해외 여행을 할 때도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는 코스가 반드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난 됐ㅡ 웁.”
“그러지 말고! 줄 때 먹어야지!”
됐다고 거절하려는 찰나, 리제가 내 입에 양념순살 한 조각을 대뜸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짓을 하자 에리카와 아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이것도 드세요, 델타 씨.”
“여, 여기. 이것도 먹어라.”
내가 순식간에 입 안 가득 들어찬 순살 조각을 씹는 동안, 할일을 마친 여섯 개의 눈동자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을 향했다.
손에 40도짜리 보드카 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던 클라우디아가 뻘쭘하게 입술을 뗐다. 그 옆에는 이미 텅 빈 보드카 병이 5개도 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거, 나도 하나쯤은 먹여줘야 하는 분위기 같은데. 그렇지, 델타?”
클라우디아는 젓가락으로 치킨 한 조각을 집어들고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톡, 젓가락 끝이 입술에 닿았다.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려 그걸 삼켰다.
젓가락은 금방 빠져나갔다. 클라우디아는 약간 어색한 눈빛으로 젓가락 끝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젓가락을 입에 넣고 남아있는 양념을 쪽 빨아먹었다.
“이번 음식은 어때?”
“음…… 며칠 전에 먹었던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동의한다. 내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군.”
“그래? 난 괜찮은데.”
“언니는 항상 그렇잖아요. 클라우디아 씨, 그쪽은 어떻습니까?”
손에 쥔 젓가락 끝을 딱딱거리던 클라우디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어?! 그, 아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사단장들이 진지하게 치킨의 맛을 평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특히 아이리스와 에리카는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먹어놓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나는 돌핀팬츠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와 몸에 딱 달라붙은 민소매 너머의 복부를 잠시 훑어보았다. 여전히 완벽에 가까운 몸매였다. 살은 하나도 찌지 않았다.
‘이클립스가 그렇게 창조했다니 뭐…….’
혹시라도 살이 쪄서 미(美)가 흐트러지면 안 되니, 언제나 최고로 보기 좋은 체중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던가. 하여튼 피조물 사랑은 알아줘야 하는 여신이었다.
다들 나름대로 이 세계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카이킬리아와 아우로라도, 기사단장들도, 교황 자매와 스텔라, 셀레네도.
미네르바는 만끽한다기엔 살짝 애매하긴 하지만, 기사단장에게 들러 뭔가를 얻어먹거나, 카이킬리아와 아우로라를 지켜보거나, 교황들과 컬렉션을 공유하고 있으니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이 세계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흐에흐흐흐히…… 히익?!”
“넌 뭐해, 닉스?”
내 방 침대의 이불을 힘껏 젖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 자락을 꼬아 고간에 문지르며 행복한 얼굴로 침을 줄줄 흘리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닉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쉬, 쉬고 있는데요, 헤헤. 뭐든 좋으니까 이 세계에서 실컷 쉬라면서요.”
“내 침대에 처박혀서 하루종일 손장난만 하라고는 안 했잖아.”
“히, 히익!”
닉스의 일과는 간단했다. 내가 일어나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침대에서 하루종일 꼼지락대면서 겸사겸사 손장난도 좀 치다가, 내가 자러 오면 비켜준다. 끝.
그 간단하고도 깔끔하기 짝이 없는 일과 덕분에, 나는 자기 직전에 과일향 향수를 통째로 엎어버린 것만 같은 침대를 정화하는 작업을 매일매일 거쳐야 했다.
심지어 내 침대의 사용권을 두고 교황 자매랑 다투기도 한다던데, 어이가 없었다.
마법으로 닉스를 들어올렸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닉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오늘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는지 향이 조금 덜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지만.
“저…… 헤헤. 같이 하실래요? 서로 해주는 편이 더 기분 좋아질 수 있는데.”
“아니.”
“히이잉…….”
시무룩해진 닉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설마 진짜로 기대하고 한 질문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