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3)
이 스쳐지나가는 수준으로 짧은 만남에서, 플레이어는 제국의 황제라는 NPC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그 편린을 모두 맛볼 수 있게 된다.
귀찮은 일을 매우 싫어하고,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마물이나 악마를 극도로 혐오하며, 제국 최강급의 무력을 갖춘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방금의 네 행동에는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내 너를 친히 치하하겠노라.”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잔혹한 짓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것이 제국의 황제였다.
‘아슬아슬했네.’
축축한 손바닥을 바짓단에 문질러 닦았다. 아직도 손이 작게 떨려대고 있었다. 검집에 깊게 패인 상처를 보고있자니 방금 전에 죽을뻔 했다는 사실이 반쯤 실감이 났다.
솔직히, 나머지 절반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느낌이었다.
검은 제복 너머로, 입을 쩍 벌린 채 뜨악 하는 표정을 하고 조각상처럼 굳어있는 아우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킬리아가 나를 추궁할 때 나와 함께 당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아우로라나 무릎이 반쯤 꺾여버린 나와는 달리, 정작 이런 짓을 벌인 당사자인 카이킬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얼핏 기뻐보이기까지 했다.
“방금은 황궁의 기사들조차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야 반응할 수 있는 공격이었거늘, 그것을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상황에 막아낸 것이냐. 내, 너 같은 이를 일찍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
손에 들려 있던, 빛으로 이루어진 성검을 다시 빛으로 되돌린 황제가 특유의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날 노려보았다.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았는데 막았다, 라.
여기 도착해 말을 걸어오는 순간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으니 틀린 말이다. 무슨 짓을 벌일지가 뻔히 예측되는 상황인데 단 한시도 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브닼 4의 모든 보스들을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힐만한 난이도를 갖게 한 원인이, 바로 저 선후딜이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빠른 공격 때문이니까.
유저들 사이에서는 흔히 ‘인간 반응 속도의 한계를 시험하는 패턴’ 이라고 불렸다.
선딜이건 후딜이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모션마저 더럽게 작은데 사전 동작조차도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런 공격이 패턴 중간중간에 랜덤으로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방어 못 하면? 그대로 처맞고 연속 공격에 죽는다. 못 튕겨내면? 전투 피로가 터져서 죽는다. 멀찍이 떨어지면? 황제 특유의 힐장판 탓에 보스전이 초장기전으로 흘러간다.
그나마 제일 쉽게 상대하는 방법이 대방패나 특대방패를 들고, 방패에 강화 마법을 걸고, 뭔가 온다 싶으면 무조건 가드를 올리는 것 밖에 없었으니 말 다한거다.
‘진짜 저딴 걸 여기서 보스로 상대해야 된다면…… 시발,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황제가 갑자기 내게 이런 짓을 벌인 이유도 터무니없었다.
악마와 연관된 물건을 떨어뜨릴 정도면 틀림없이 무척이나 강한 마물일텐데, 그걸 단신으로 때려잡은 기사가 나타났다니 실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나?
‘게다가 안 막으면 죽잖아.’
바닐라에서는 저 공격에 반응 못하고 맞더라도 체력이 딱 1 남고 살아남는다. 설정상으로는 황제가 주인공을 죽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칼이 파고드는 거리를 조절해서 그렇다던가.
하지만 닼라 모드에서는 그냥 죽는다. 이 악물고 반응하거나, 그냥 죽고 이벤트를 끝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모님, 방금은 대체…….”
아우로라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악마가 깃든 책을 토해내었다는 마물을 홀로 처치하였다길래 그 실력을 시험해본 것이다. 막지 못했다면 의심이 더 깊어졌을테지만, 아무래도 본연의 실력은 확실한 인간인 듯 하니 넘어가겠노라. 무엇 하느냐, 가서 일으켜주지 않고.”
카이킬리아가 아우로라에게 손짓을 했다. 아우로라는 허둥지둥 내게 다가왔다.
“야, 괜찮아? 어디 다치거나 베인 곳은?”
“……없어요. 아직도 팔다리가 좀 후들거리기는 하지만. 그리고 저거 맞았으면 다치거나 베이는 게 아니라 죽었을겁니다.”
“대체 어떻게 막은거야? 난 뭐가 번쩍 하더니 고모님이 칼 들고 있고 너는 여기까지 튕겨나와 있는거밖에 못 봤는데.”
“저도 모르니까 묻지 마요.”
옆구리에 팔을 둘러 내 몸을 지탱해주려는 아우로라를 향해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혼자 일어섰다. 팔을 붙잡은 손아귀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같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카이킬리아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재능이 있구나. 그 재능을 갈고닦으면 아주 훌륭한 기사가 되겠어. 네 성장을 기대하고 있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얼핏 보기에는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속뜻의 무게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옆에서 날 슬쩍 부축해주던 아우로라가 흠칫 놀라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려 제국 무력의 정점에 달해있는 존재의 입에서 재능 있다는 칭찬과 성장을 기대하고 있겠다는 칭찬이 튀어나온거다. 절대로 허투루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추후에 플레이어가 어떤 행적을 펼치는지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짚어낸거기도 했고.
“아우로라.”
“네, 폐하.”
“이제 되었다. 안내하거라.”
“알겠습니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명령이었지만, 저게 어디로 안내하라는 말일지는 뻔했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 손을 놓았다.
“너도 따라오거라.”
“예, 폐하.”
카이킬리아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부권은 없었다.
“지금껏 쌓여온 울분이 차고 넘치겠지. 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노라.”
“아니, 저, 그것이…….”
아이리스가 심각하게 당황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려대며 말을 더듬었다.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서 있는 리제와 에리카, 클라우디아가 있었다.
넷 모두, 보기 드물게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영주를 샌드백으로 취급하고 있던 모습을 황제한테 들켰으니 그럴만 했다.
기사단장들은 황제가 지하실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영주를 신나게 두들겨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하실이 안 무너지고 멀쩡했으니 최소한의 힘조절을 할 이성은 남았다고 해야할까.
문제는, 온갖 방법으로 처맞는 영주의 모습을 황제가 고스란히 목격했다는 것이다.
‘황제 성격이라면 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반어법이 아니라 진짜 이해한다는 말일텐데.’
아이리스도, 리제도, 에리카도, 클라우디아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황제 폐하가 한 말이다. 그걸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연히 뭔가 속뜻이 더 있다고 받아들이겠지.
“…….”
내리 몇 시간을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실력자 넷에게 처맞았음에도, 바닥에서 힘없이 꿈틀대는 영주의 몰골은 내가 축복받은 단검으로 찌르고 방치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본능적으로 성검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을 감지했는지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카이킬리아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 저것이 한때 내 오라버니였던 악마인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아이리스가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차렷 자세를 취하며 답했다. 카이킬리아는 양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기사들을 지나쳐, 악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쓰읍, 표정이랑 분위기가 매칭이 하나도 안되네.’
표정만 본다면 분명 살벌하고 차가운 분위기여야 할 텐데, 옷차림 때문에 전혀 그렇게 느껴지질 않았다. 일단 양 옆에 부동자세로 선 기사들부터가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제복도 상의는 가슴골과 란제리 속옷이 훤히 드러나고, 치마는 엉덩이 밑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정도로 짧은데다 허벅지에는 가터벨트까지 맸다.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황제 컨셉의 코스프레녀라고 봐도 믿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여성 NPC들과 마찬가지로 딱 달라붙는 제복 치마에 감싸인 엉덩이가 한 발을 내딛을때마다 마치 이것 보라는 듯이 음란하게 씰룩대고 있었다.
저놈의 모션 좀 어떻게 안 되는건가.
“…….”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영주의 바로 앞까지 접근한 카이킬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아주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리 되었던 것이냐.”
‘……뭐지?’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기에, 나로서도 저 말의 진의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와서 이번 이벤트를 게임이랑 비교하기에는 중간 과정이 너무 많이 뒤틀렸다. 그나마 전체적인 흐름은 일치하니 결과까지 그럴 것이리라고 추측하는 수 밖에.
황제의 성격 자체도 원본 NPC와 너무 많이 달라져 있기도 하고. 기사단장 네 명이 전부 다 그랬듯이 말이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이 하찮은 것아.”
카이킬리아의 오른손에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곧 성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태양과도 맞먹을 신성력이 바로 근처에서 나타나자, 놈은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다. 성검은 너무나도 쉽게 영주의 몸뚱아리를 관통했고, 악마는 끼이이이이…… 하며 점차 작아지는 비명을 내뱉고선 힘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까지 저질러온 일에 비하면, 꽤나 허무한 최후였다.
카이킬리아는 몸에 꽂힌 성검을 그대로 놔둔 채 허리춤에서 파란 병을 꺼내 시체에 부었다. 그러자 바닥에 흘러내린 파란 액체가 자기 혼자 모여들더니 마법진을 그렸다.
완성된 마법진이 천장을 향해 작은 빛기둥을 쏘아올렸고, 영주의 몸이 어디론가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빛기둥이 사그라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광경을 덤덤히 바라보던 카이킬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용했던 책은 어디에 있느냐?”
“간이 창고를 지어 그곳에 엄중히 보관중입니다.”
“회수할테니 준비하여라.”
“예, 폐하.”
아우로라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아이리스 기사단장.”
“예! 폐하!”
“너만 이곳에 남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라.”
그 말에 아이리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나머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우리들은 아이리스와 카이킬리아를 지하실에 남겨둔 채 계단을 올라갔다.
이것 역시, 게임에서는 본 적 없는 전개였다.
둘만 남은 지하실에서, 특유의 무감정하고 싸늘한 황금빛의 금안이 아이리스를 응시했다. 아이리스는 여전히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서 있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는듯한 침묵이 사방에 깔렸다. 꼭 허공을 가득 메운 공기 그 자체에 무게감이 생긴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는 자꾸만 바닥으로 내려앉으려는 어깨를 억지로 세웠다.
“네게 명령을 내리겠다.”
“무엇이든 하명해주십시오!”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카이킬리아가, 황금색 동공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저 신입 기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내게 전부 털어놓거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