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33)
외전: 최초의 교황 – 3
자신을 레판테카 마리킬레어라고 소개한 최초의 교황이 이클립스에게 정욕을 불태우든 말든, 나는 그걸 허락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클립스가 싫어하니까. 지금도 옆에 찰싹 달라붙어선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허락해줄 생각은 절대로 없지만, 놀려주는 용도로는 한 번쯤 써먹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이랍시고 자기 욕망을 채워댄 것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어디 한번 설명해봐.”
내가 호기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지, 둘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으로. 누가 어느 쪽인지야 뻔했다.
“네. 일단 제일 먼저 옷을…….”
레판테카는 훨씬 더 밝아지고 높아진 목소리로 계획을 늘어놓았다.
성국 지하에 처박혀 있으면서 이클립스를 가지고 놀 방법만 주구장창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무척 세세하고 치밀했다.
사람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싶은 계획도 있었다. 그걸 듣는 이클립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척 노골적이면서도 음란하기까지 한 여성끼리의 교접 방법이 줄줄 나열되자, 이클립스는 내게 한층 더 찰싹 달라붙어 도리질을 쳤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당신께서도 틀림없이 즐겁게 관람할 수 있으실 거예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이클립스를 꼭 빼닮은 금색과 은색의 오드아이에는 더 이상 날 향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담겨있지 않았다. 오직 이클립스를 향한 성욕만이 존재했다. 그것도 몹시 추잡하고 더러운.
뭐, 어차피 레판테카가 저러든 말든 목적을 달성할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이클립스를 놀려먹기 위해 호기심이 생긴 척했던 거였으니까.
“……거절하실 거죠, 당신? 그렇죠?”
“여신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거절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 다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오드아이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선에 담긴 불안이 점점 더 커져갔다.
왜 가만히 있는지를 묻고 싶은데, 그랬다간 죽어도 듣기 싫었던 대답을 듣게 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작은 토끼처럼 불안에 떠는 이클립스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만하면 소소한 복수로는 굉장히 성공적인 결과였다.
“맞아요. 거절할 겁니다.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어요.”
“……정말로요?”
“그냥 장난 좀 쳐봤습니다. 여신님도 저한테 계획이랍시고 엉덩이를 들이미셨잖아요. 그 복수라고 생각하시죠.”
눈가에 살짝 맺히기 시작했던 눈물 방울이 사라졌다.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이클립스와 레판테카의 희비가 다시 엇갈렸다. 기대는 당혹이 되었고, 불안은 기쁨이 되었다.
레판테카가 다급하게 외쳤다.
“혹시 원하시는 자세나 체위가 있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ㅡ”
“미안. 내가 그런 걸 지켜보기만 하는 성격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저런 종류의 유혹이라면 이미 플로레타랑 루나한테 실컷 당해봤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수위 역시 나날이 높아지는 중이었다.
그 둘의 목적은 오로지 내 난입뿐인지라 ‘이래도 우리 사이에 안 끼어드실 거예요? 이래도?’에 가깝긴 하지만.
심지어 최근에는 미네르바까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분신들을 소환할 때마다 자꾸 기분 좋은 거 하자면서 날 불러달라고 칭얼대서 어쩔 수가 없다나.
그냥 분신을 거두어들이면 되는데 굳이 내 방까지 대동하고 찾아오는 시점에서 속셈이 뻔한 변명밖에 안 됐다.
“여자끼리만 교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당신을 사이에 두고ㅡ”
“필요 없어. 넌 이미 중대한 실수를 두 개나 저질렀거든.”
이클립스를 살짝 밀어내고 날개 잃은 악몽을 쥐었다. 이클립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첫 번째로, 난 세계의 악이 아니야. 때려잡은 사람이지. 내가 그놈을 얼마나 고생해가면서 잡았는데 그걸 착각을 해?”
“……!”
레판테카가 입을 떡 벌렸다. 난 아무말도 안 했는데 이클립스의 언행을 보고 자기 혼자서 착각한 거니 구실을 갖다붙일 건덕지도 없다.
“두 번째. 여신님은 내 노예가 아니라 그냥 이클립스ㅡ”
까지 말한 나는, 실수를 알아차리고 다급히 말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햐으응?!”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클립스가 야릇한 신음을 토해내며 허리를 꺾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몸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엉덩이와 허벅지 밑으로 점성을 가진 투명한 액체가 마치 물웅덩이처럼 번져나갔다. 순식간에 절정을 느껴버린 이클립스는 쾌락에 취한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씁.’
실수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똑같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하고 있는 레판테카를 향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여신님은 그냥 여신님이지 내 노예가 아니야. 그게 네 두 번째 실수다.”
“노예가 아니라고요?!”
몸을 부들부들 떨던 레판테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억울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실 거고요? 제발 쓰다듬어달라고 애원하면서 배까지 보여주고, 쓰다듬어지면서 기뻐하고, 엉덩이를 맞으면서 좋아하고, 지금은 이름만 불러도 성대하게 가버리고 있잖아요! 저러고 있는데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고요? 저렇게까지 복종하는데 그게 노예가 아니면 대체 뭔데요?!”
“그건…….”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클립스가 보여줬던 행동들은 여신이 아니라 이미 조교 완료된 노예라고 여겨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지금도 이름이 불리자마자 저런 꼴로 움찔대고 있는데, 누가 우리 관계를 대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백이면 백 주인님과 노예 관계로 생각하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대답 대신 날개 잃은 악몽을 겨누었다.
“그럼 어디 원하는 대로 해 봐.”
“네?”
“기회를 준다고. 어떤 공격이든 날 한 대라도 맞히면 돼. 어떤 공격이든 날 한 대라도 맞히면 여신님은 네 거야. 어때, 쉽지?”
무척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날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공격이든 딱 한 대만 적중하면 이클립스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억울함에 치를 떨던 레판테카가 재빨리 계산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나름 할만 하다고 여겼는지 조심스레 되물었다.
“정말이신가요? 어떤 공격이든 상관 없이, 딱 한 대?”
“난 거짓말 안 해. 여신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움찔, 그 말에 아직도 절정의 여운에 잠겨 있던 이클립스가 다시 한번 몸을 떨었으나, 이번엔 가버리지는 않았다.
대체 뭘로 연습했길래 절정 트리거가 사방팔방에 깔려있는 건데.
레판테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심연이 꾸물거리기 시작하고, 그 오른손에 다시 커다란 낫이 들렸다. 나는 이클립스에게 눈짓을 해 조금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이클립스는 과일향이 물씬 풍기는 웅덩이를 남긴 채 멀어져갔다. 레판테카가 음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 어디 전력으로 덤벼봐. 날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그 망상을 현실로 실현할 수 있을 테니까.”
레판테카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늘처럼 작고 날카롭게 바꾼 심연을 무수히 발사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신성 촉매를 휘저어 몸 근처에 황금빛 장벽을 둘렀다.
터터터텅ㅡ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바늘이 황금빛 장벽을 들이받았지만, 그 무엇 하나 빛무리를 뚫지 못했다.
“내가 설마 그런 술수도 예상 못 했겠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잠시 주춤거리던 레판테카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결과적으로, 나는 한 대도 맞지 않고 레판테카를 압살했다.
레판테카는 상처를 회복시키느라 근처 공간을 뒤덮은 심연이 모두 흡수될 때까지 베이고, 썰리고,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반쯤 걸레짝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몸은 상처로 가득했고, 남아있는 옷의 면적은 처음과 비교해 한 줌도 채 되지 않았다. 중요 부위가 드러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날개 잃은 악몽을 뿌듯하게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만하면 브닼 5의 보스에 사용될 패턴 참고 자료로는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꽤 인상적이었어. 칭찬해줄게.”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레판테카를 향해 가볍게 박수를 쳐주었다. 중간에 하마터면 공격을 허용할 뻔 했다. 저 말도 안 되는 크기의 가슴 때문이었다.
설마 가슴으로 날 후려치려 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만약 유두가 조금만 더 컸거나 길었다면 닿았을 거다.
나름 창의적이었는데, 브닼 5에 패턴으로 넣을만한 공격은 아니라서 아쉽게 됐다.
“…….”
레판테카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렸는지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흡을 따라 옅게 움직이는 커다란 가슴만이 제 주인의 생존 여부를 말해줄 뿐이었다.
딱히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힘을 얻자마자 이클립스를 강간하려 시도했던 데다, 어쩌면 인간을 배신하고 세계를 먹는 자에게 붙었을 가능성마저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에게 건네줄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슬슬 끝내면 되겠죠?”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이클립스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섰다. 레판테카의 처리는 여신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보다는 이클립스와의 악연에 가까우니까.
“네.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돼요, 당신. 금방 끝나니까요.”
이클립스가 레판테카에게 다가갔다.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던 여신이 바로 눈앞에 있자 레판테카가 팔을 뻗었으나, 이클립스는 일말의 자비조차 없이 뻗어진 팔을 잘라버렸다.
잘린 팔꿈치 아랫부분이 옆으로 굴러갔다. 세계를 먹는 자가 아닌,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게 저렇듯 단호하게 구는 이클립스는 처음 봤다.
날 향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이클립스가 주위에 은빛의 장막을 치더니 아래를 쳐다보면서 입술을 뻥긋거렸다. 아마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저 은빛 장막이 방음 결계였던 모양이었다.
“……!”
갑자기 레판테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잔뜩 다치고 부러진 몸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더 이상 미련은 없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레판테카가 작은 빛 알갱이로 변해 흩어졌다. 은빛 장막이 사그라들었다. 이클립스는 무척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뭘 하신 겁니까?”
“당신과 제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해줬어요. 아주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그리고 다시는 환생하지 못하도록 해뒀죠. 레판테카 마리킬레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렸다고 보시면 돼요.”
“……아주 약간의 거짓이요?”
나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이클립스를 바라보았다. 이클립스는 시선을 피했다.
저거 분명 거짓을 약간만 섞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외전: 딸?
눈을 뜨니 모르는 천장이 있었다.
황궁도, 미네르바의 마탑도, 태양의 대성당도, 달의 대성당도, 아우로라의 저택도, 칠흑 성야 기사단의 성도, 닉스의 오두막도, 이클립스의 세계도, 내 자취방도, 부모님 집의 방도 아닌, 전혀 모르는 천장.
여기가 어딘가 싶어 잠에 취한 머리를 깨우기도 잠시,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들려선 안 될 소리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각자의 방법으로 묶인 손목과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났고, 한쪽 발목을 잡아챈 족쇄는 침대의 다리 중 하나와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뭐야?’
반사적으로 힘을 줘서 끊으려 해봤지만 둘 모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클라우디아가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대검도 한 손으로 잡아챌 수 있을 정도다. 이따위 조잡한 사슬로 묶어둘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여전히 빈약하기 짝이 없는 수갑 따위에 옴싹달싹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마나와 신앙조차 발휘하지 못했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아빠?”
아빠?
무척 생소하게 들리는 호칭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방에 나 말고 아빠라고 불릴만한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가 싶어서였다.
“아이참, 어딜 보는 거야, 아빠. 이쪽이야, 이쪽.”
그제서야 저 아빠라는 호칭이 나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알 수 있었다.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부모가 되기 위한 예비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것은 맞지만, 자식을 가졌던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날 아빠라고 부르는 저 목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아빠? 드디어 날 봐줬네.”
그 자리에는 창틀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꼰 채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천천히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가는 흑발 흑안의 여자가 있었다.
등 뒤로 늘어진 길다란 생머리는 바닥까지 내려왔다. 흰색 와이셔츠는 가슴 부분만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으며, 가슴골에는 넥타이가 끼워졌다.
허리에 찬 벨트가 가뜩이나 얇아보이는 허리를 한층 더 잘록하게 만들고,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 치마는 엉덩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온 검은색 스타킹 탓에 끄트머리의 허벅지살이 살짝 통통하게 튀어나왔다. 스타킹으로 감싸인 발가락은 리듬을 타듯 꼼지락거려댔다.
‘……이클립스?’
전체적으로 이클립스를 몹시 빼닮은 인상의 여자였다. 순간 진짜로 이클립스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만큼.
심지어 분위기마저 여신과 흡사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외모와, 음심보다 경외가 먼저 치솟는 아름다움까지 그 모두가 말이다.
“누구야?”
“내가 누구냐니, 아직 잠이 덜 깼어, 아빠? 흐음, 아니다. 아빠가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알았다. 장난치는 거구나?”
꺄르륵. 흑발 흑안의 여자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웃었다. 목소리에 담긴 미색마저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점까지 이클립스와 비슷했다.
“미안해, 아빠. 평소였으면 받아줬을 텐데,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나까지 장난스러워질 순 없어서. 나잖아, 나. 아빠 딸 이클립스. 정확히는,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 이클립스.”
“헛소리. 넌 이클립스가 아니야.”
나는 딱 잘라 부정했다. 눈 색을 제외하면 정말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닮긴 했지만, 그래도 저 여자는 이클립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네가 내 딸이라고? 그러면 엄마는 누군데?”
“엄마가 누구냐니? 이클립스잖아. 아빠 오늘따라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약이 너무 세게 들어갔나?”
여자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는 색기를 풀풀 흘려대더니 지금은 또 다섯 살짜리 꼬맹이처럼 순수하게 느껴졌다.
‘이게 뭔…….’
저 말을 듣자 가뜩이나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아파오기까지 하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이클립스인데 엄마도 이클립스라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신이 둘로 나뉘기라도 했나?
“언제는 내 딸 이클립스라면서 지금은 또 네 엄마가 이클립스라니,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내가 혹시 여신이랑 몸을 섞은 적이 있던가 하고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그랬던 적은 없었다. 확실했다.
여신이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이클립스의 순서는 맨 뒤에 놓기로 했었고, 본인이 그걸 허락했으니까. 앞 순서가 아직 남아있는 한 저 말대로 이루어졌을 리는 없다.
“아차차, 아빠는 지금 막 깨어났지? 내가 설명을 안해줬었구나. 응응,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바보 이클립스. 아빠한테 제일 먼저 설명부터 해드렸어야지.”
흑발 흑안의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머리를 과장되게 꽁! 하고 때렸다.
잘 쳐봐야 어설픈 B급 영화 수준의 연기였으나, 배우 본인의 미모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연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잘 들어줘, 아빠. 지금부터는 내가 이클립스야. 엄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든.”
“……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조차 막막한 설명이었지만,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체를 살피기 전에 우선 눈앞의 퍼즐부터 맞춰야 할 것 같았다.
저 여자의 주장은 크게 나눠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자기가 이클립스와 내 딸이라는 것, 두 번째는 이제 자기가 이클립스라는 것, 세 번째는 엄마인 이클립스는 이제 없다는 것.
뭘 어떻게 조립하든 모순덩어리인 문장밖에는 안 됐다.
“왜냐하면, 아빠의 옆에 어울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히히.”
ㅡ철컹!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척 보기에도 조잡해보이는 수갑과 족쇄는 도통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으음,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 역시 약을 너무 센 걸로 사용했나봐.”
“약?”
내가 되물었지만, 여자는 아랑곳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간단한 이야기야, 아빠. 난 아빠를 사랑해. 엄마보다 훨씬 더.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스스로를 내 딸이라고 주장하는 흑발 흑안의 여자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 있는데 입꼬리가 전혀 올라가지 않았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이 나를 훑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배꼽 근처에 있는 마지막 단추에 닿았다.
“내가 엄마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해 줄 자신이 있는데 왜 보고만 있어야 해? 나도 아빠한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지고 싶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은데 왜 딸이라는 이유로 보고만 있어야 해? 나랑은 가끔 뽀뽀나 해주는 게 다면서 엄마랑은 밤새 침대에서 뒹구는 꼴을 왜 보고만 있어야 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분노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무릎에 올린 손을 부들부들 떨던 여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러다가, 결국 깨닫게 된 거야. 내가 더 이상 아빠의 딸이 아니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더는 열린 문 틈으로 엄마를 지켜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지만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완전히 미쳤어.”
어떻게 되어먹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여자가 미친년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어쩌면 자기 여신을 강간하려 들었던 그 최초의 교황보다 훨씬 더.
하지만 흑발 흑안의 여자는 이런 내 말을 간단히 부정했다.
“난 지극히 정상이야, 아빠. 제정신이고 아니고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잣대로 구분짓는 기준에 불과한걸. 그런 하등한 기준으로 아빠와 나를 판단하기엔 우리가 너무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 안 들어?”
“우월해? 뭐가?”
“그야, 우리는 신이잖아.”
톡, 마침내 최후까지 버티고 있던 단추마저 그 힘을 잃어버렸다. 터질 듯 팽팽해져 있던 와이셔츠가 옷자락이 양 옆으로 퍼져나가며 조금 느슨하게 변했다.
“우리가 왜 인간 따위가 세운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하는데? 신이 인간의 금기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어? 신이 인간의 제약에 얽매여야 할 이유가 있어? 신이 인간의 도덕 관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어? 아니야, 아빠. 우리는 인간 따위보다 훨씬 더 우월한 존재잖아. 그따위 필멸자들의 개념은 얼마든지 무시해도 돼. 우리가 인간의 잣대로 판단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우리의 잣대로 판단되어야지. 우리가 옳다면 옳은 거고, 그르다면 그른 거니까.”
창틀에서 내려온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와이셔츠를 아슬아슬하게 흩날렸다.
“나도 알고 있어, 아빠. 아빠는 꽤 오랫동안 인간으로 살아왔으니까 내 말이 이해가 안 갈만도 하겠지. 엄마는 그런 아빠를 존중해줬고.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아빠. 아빠는 눈을 떠야 해. 아빠가 누구인지를 자각해야 한다구. 생각해봐, 응? 인간이 근친혼을 금지하는 이유가 뭔데? 유전병? 설마 우리한테 유전병 따위가 존재할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빠? 아니면 불문율과 도덕심에 기반한 금기? 하, 신에게 자기네들 금기를 요구하는 인간이 있다면 따라줄 게 아니라 천벌을 내려서 싸그리 다 죽여버리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우리가 천벌을 내리면 걔들이 뭐 어떡할 건데?”
여자의 몸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주먹을 쥐며 싸울 준비를 했다. 무기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공격 쯤은ㅡ
‘……?’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어느샌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키득키득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아빠는 날 못 이겨. 자기를 아직 인간이라 생각하는 신이랑, 스스로를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신. 둘 중에 누가 더 강할 것 같아?”
여자가 정확히 내 고간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몸이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찰싹 달라붙어버린 기분이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허리를 몇 번 움직여보던 여자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아랫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까 엄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사실 이 안에 있어. 내 자궁 안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지.”
“……?”
“아빠랑 내가 이어진 다음 여기를 아빠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 10개월 뒤에 우리 딸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는 거라고. 어때, 아빠.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
여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갑과 족쇄가 은색 빛무리로 변해 사라졌다. 기회를 틈타 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의지와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상체를 일으켜 오른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쥐었다. 가슴 첨단의 핑크빛 돌기가 손바닥에 오돌토돌하게 스쳤다.
“딸을 사랑하는 아빠와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관계도 충분히 마음에 들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해. 이제 서로가 한 발짝 더 나아갈 시간이야, 아빠. 우린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좋은 가족이 될 거야. 맹세할게. 아, 엄마는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우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날 테니까…….”
여자도 그에 호응하듯 내 제복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랑해, 아빠. 아니지, 이제부터는 아빠가 아니구나.”
ㅡ델타.
“……!”
자리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익숙한 천장과 주변 모습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 자취방이었다.
처음 보는 천장도, 날 향해 이상한 소리를 내뱉던 흑발 흑안의 여자도,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확인한 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꿈이었나?’
이마에는 식은땀이 살짝 배어나와 있었다. 방금 그게 꿈이라면 정말이지 지독한 악몽이었다. 두번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
‘그 여자는 대체 뭐였지?’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데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광기가 뚝뚝 묻어났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면서 이어지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클립스를 자궁 안에 집어넣어 딸로 키우겠다니.
재수없는 악몽으로 취급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활약을 해온 직감이 그냥 덮고 넘어가선 안 된다며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왜 그래, 당신?”
옆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던 닉스가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깬 탓인지 가뜩이나 음침했던 인상이 한층 더 가라앉아보였지만, 피부만은 무척 반들반들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뒤숭숭한 꿈을 꿔서.”
“뒤숭숭한 꿈? 당신이? 별일이네.”
닉스는 가볍게 웃더니 내 팔을 끌어당겼다. 얼굴이 거대한 가슴 사이에 푹 파묻혔다. 앙증맞은 손이 머리를 감쌌다. 비강으로 우유향 가득한 살내음이 침투했다.
“나쁜 기억 나쁜 기억 다 날아가라~”
“뭐야, 그 이상한 노래는. 음정이고 박자고 다 안맞는데?”
“당신을 위해 즉석에서 지어낸 거라서?”
웃음 소리가 겹쳐 들렸다.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앙증맞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닉스가 그 상태로 가만히 있을 리 없었고, 나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18시간쯤 늦게 이클립스를 찾아갔다.
처음엔 나를 반겨주던 이클립스는 악몽에 대해 설명을 듣자마자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분위기의 이클립스는 무척 오랜만이었기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건 예지가 분명합니다. 당신은 꿈이라고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직접 체험하고 오신 셈이에요.”
“예지라면…… 여신님이 사용하시는 그거 말입니까?”
“네. 책을 보듯 원하는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저랑은 달리, 당신은 아직 능력의 제어가 미숙하시니 직접 경험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들여다봐야 했겠죠. 그런 식으로 미래를 들여다본 결과가 방금 설명해주신 내용이고요.”
“그게 왜 저한테…… 아니지, 일단 다른 것부터 묻겠습니다. 미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클립스는 분명 예지로 인해 관측된 미래라 해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일에 불과하므로.
“……일단. 한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어떤 조건 말씀이시죠?”
“당신께서 그 미래를 한번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조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