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46)
외전: 혼돈 던전 – 2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이클립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커뮤니티를 둘러보았다. 절대다수는 아직 1층에 머무르는 중이었고, 그 이상 올라간 유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혼돈 던전 DLC가 열린 지 무려 일주일이나 흘렀는데도 그랬다.
‘나도 예전이었으면 이렇게 빨리는 못 깼겠지.’
168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고도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아슬아슬하게나마 모든 패턴을 첫트에 반응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최초 클리어 인증은 뒤로 미뤄야겠다.’
닼라모드 1렙 맨손런 최초 클리어 때처럼 인증글이라도 올려볼까 하다가 지금 올리면 100% 핵이나 트레이너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에 미루기로 했다.
굳이 해야겠다면 손캠 붙이고 영상을 찍는 방법도 있긴 한데, 내가 그렇게까지 최초 타이틀에 미친 인간은 아니라서.
“여신님.”
“……네, 당신.”
허망한 얼굴로 내 손에 뺨을 부벼대던 이클립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여신님 세계에 생성된 던전도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아요.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4의 인게임 요소를 그대로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까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뒀죠. 아, 그래도 너무 많이 바꾸지는 않았어요. 보스전을 다시 치를 수 있는 재소환 버튼과 흰 안개벽이 없고 디테일을 조금 추가한 수준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클립스는 뺨으로 그치지 않고 아래턱이나 목, 콧잔등과 이마까지 내 손을 이리저리 옮겨대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얼굴로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기 시작했다.
“저…… 당신. 제가 내기에서 졌잖아요. 뭘 시키실지 알려주실 수는 없나요?”
“지금 말인가요? 일단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무, 무슨 벌을 받을지 정도는 알아야 제가 마음의 준비도 하고…… 또…… 그, 그렇다고 시키면 안 되는 게 있는 건 아니고…… 진짜로 뭐든지 다 시키셔도 되긴 하지만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ㅡ
‘……잠깐만.’
좋은 생각을 떠올린 나는 책상을 뒤져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왔다.
“아까 목걸이 차고 싶다고 하셨죠, 여신님?”
“네!”
목걸이를 언급하자마자 이클립스가 눈을 빛냈다. 방금 전까지 침울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만약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붕붕 흔들렸을 게 확실했다.
“걸어드릴게요. 목걸이.”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러고 계시면 됩니다.”
웃으며 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클립스는 수치심에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내내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ㅡ와락!
거실로 나가자마자 누군가 내 품에 뛰어들었다. 전력을 다해 부딪혀왔는지 제법 묵직했다. 휘황찬란한 금색과 서늘한 은회색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배 근처에서 물컹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플로레타와 루나였다. 둘은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얼굴을 품에 묻은 채 정신없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한발 늦게 닉스가 뒤에서 달라붙어왔다.
스텔라와 셀레네는 저 뒤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사라졌다. 잠시 미래의 분위기가 덧씌워진 이후부터 계속 저랬다.
교황들과 닉스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카이킬리아가 특유의 오만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표정에서부터 감정이 드러나는구나. 성공하였느냐?”
“네. 가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내가 너를 믿으니 확인 따위는 필요치 않노라. 하나 그 지독한 장소의 내부에는 호기심이 생긴다.”
카이킬리아는 내가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다 침대에 앉아있는 이클립스를 보고 발을 멈췄다.
“……?”
한번 땅에 달라붙은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인 카이킬리아라지만, 세계의 창조신만큼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이 여신…… 님은 왜 이러고 있는 것이더냐, 델타?”
“그 던전 클리어까지 한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밖에 안 걸려서요.”
“한 달이라 하였느냐?”
카이킬리아가 여신이랑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신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비웃음을 담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였더라면 무조건 너의 말이 옳다고 하였을 터인데. 믿음이 한참 부족하구나.”
“…….”
이클립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여신을 비웃다니,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아니면 날 믿고 그러는 것이거나. 내가 여자들끼리 싸우는 걸 허락할 리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저렇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대는 행동도 허락 안 한다.
얼굴을 무표정하게 되돌린 카이킬리아가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샌가 밖으로 나와서 여신의 눈치를 살피던 아우로라도 슬그머니 따라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날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준 것은 덤이었다.
ㅡ아이야. 잠시 괜찮겠니?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으려니, 머릿속에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네르바가 자기 방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손짓을 하고 있었다. 교황들과 닉스를 대롱대롱 매달고 움직였다.
“손님이 제법 많구나.”
미네르바는 내게 찰싹 달라붙어 조금도 안 떨어지려는 3명을 보며 살포시 웃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쪽,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한참동안 혀를 얽어온 미네르바가 입을 떼고 요염하게 입술을 핥았다. 눈가에는 요사스런 눈웃음이 걸려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 유려한 눈썹이 잠시 까딱였다.
“기사단장들이 어디 있나 궁금하지 않니, 아이야?”
“혼돈 던전 때문에 나간 거 아니었습니까?”
“어머, 알고 있었을까?”
“적당히 유추한 거죠. 제가 나왔는데 넷 모두 조용하고, 미네르바 님은 그 애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냐며 묻고 계시니까요.”
미네르바는 아쉽게 됐지만 설명은 빨라지겠다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들이 없는 이유는 예상 그대로 혼돈 던전 때문이었다. 그 주변을 감시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니 최정예 병력이 출동했다나.
진실을 알고 있는 기사단장들은 자취방에서 놀고 있는 아우로라를 억울하게 바라봤지만, 아우로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고 했다.
“황제에게 눈을 흘기는 은빛 여명 기사단이라니, 지난 사백 년간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단다. 그리고 델타 네가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그러고 있었겠지.”
“최소한 제 여자들만큼은 계급으로 나누고 싶지 않아서요.”
카이킬리아야 아직도 상대가 누구든지 자기 멋대로 반말을 사용하지만, 그건 본인 성격이라서 어쩔 수 없다. 다들 그냥 적당히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네 여자라는 울타리 안에 나 역시 포함이겠지, 아이야?”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러십니까?”
미네르바의 뺨이 붉어졌다. 카이킬리아가 그렇듯이 미네르바도 옛날에 비하면 훨씬 더 얌전해진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대신 다른 쪽으로 무척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긴 했다. 지금도 날 보는 눈에서 음란한 욕망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침 잘 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혼돈 던전에 들르려고 했었는데, 기사단장들이 그곳에 있다면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할 이유가 생겼다.
“휴우…….”
임시 캠프의 침대에 걸터앉은 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천막 밖으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동공이 펼쳐져 있다. 이 동공을 감시하는 것이 은빛 여명 기사단이 받은 명령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기사 된 몸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알고 있는 속사정이 좀 많았으니까.
이 던전의 정체가 뭐인지도 알고, 황제의 명령을 사실 아우로라의 분신이 내렸다는 것도 알고, 진짜 황제는 델타의 자취방에서 열심히 놀고먹는 중이란 사실까지 안다.
게다가 진짜 황제님은 리제보다 나이가 적은 데다 최근에는 황제라기보단 델타의 여자들 중 하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웬 한숨인가, 리제?”
검을 손질하고 있던 아이리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대놓고 흐느적거리는 게 보이는 리제와는 달리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아우로…… 황제 폐하는 지금 델타 집에서 쉬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그러고 싶어서?”
하마터면 집에서 부르던 대로 아우로라라고 부를 뻔한 리제가 급히 말을 주워삼켰다. 자취방 안에서라면 괜찮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 대륙 전체에 공표된다면 몰라, 델타 본인이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기를 썩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니 언제까지고 비밀로 해야 했다.
“으음…… 내 생각엔 조만간 여기로 올 것 같다만.”
“여기로 온다고? 누가, 델타가?”
“그렇다.”
“무슨 근거로?”
“믿음이다. 델타의 여자 된 몸으로서 가져야 할 믿음.”
“믿음이라…….”
리제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내 남자는 절대 안 뺏는다고 할 땐 언제고, 떡 몇 번 치더니 이제는 아주 현모양처가 다 되셨네. 아주 그냥 말 한마디 한마디에 꿀이 뚝뚝 떨어져, 응?”
“……크흠.”
아이리스는 어물쩡 시선을 돌렸다. 저 놀림은 아마 이 관계가 지속되는 한 평생 이어질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그딴 말은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어쩌겠는가.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우리 왔다.”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입구의 천이 걷혔다. 던전 입구 근처 지형을 둘러보러 갔던 클라우디아와 에리카가 돌아왔다. 둘 다 던전의 진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의욕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너무 잘 놀았나, 갑옷이랑 대검이 왜이리 거추장스럽지?”
“아까부터 둘러보는 내내 징징대는데 한 대 때려도 됩니까, 클라우디아?”
“꼭 너는 불평 안 하고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한다?”
“그게 사실인데요. 어쩌실 거죠?”
에리카가 당당하게 묻자, 클라우디아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뭐, 그래도 곧 델타가 온다니까 이제 지루하지는 않겠지.”
“델타가 온다고요, 언니? 누가 그러던가요?”
“바로 옆에 계신 우리 아이리스가. 자기는 이제 델타의 여자라면서 아주 그냥 서방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시더라.”
시선이 집중되자 아이리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리제가 그런 아이리스를 팔꿈치로 톡톡 건드렸다.
“이거 나중 가면 내 자리도 노릴ㅡ”
ㅡ전투 준비!!!!!!
그 순간, 밖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준비? 4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분명 카이킬리아랑 아우로라가 이 던전에 대해서 설명해줬을 때는 이런 말은 없었는데.
천막을 뛰쳐나갔다. 그 말대로였다. 동공 안쪽에서 거대한 마물 하나가 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외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동공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은빛 여명 기사단과 전투 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집합해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이런 말은 없지 않았나?”
“그러게. 분명 델타를 위한 파밍용 던전이랬는데.”
“……나중에 돌아가면 물어보도록 하죠.”
“어쩔 수 없지.”
기사단장들이 각자 무기를 빼들고 성큼성큼 나섰다. 기사들이 좌우로 좌악 길을 텄다. 옆에서도 이단심판관과 이단심문관이 나서고 있었다.
“전원! 전투 준…… 비……?”
아이리스가 우렁차게 외치려는 찰나였다.
이쪽을 천천히 훑어보던 마물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몸을 돌리고 동공 안쪽으로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이리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나도 모르겠는데. 방금 어디 보다가 놀라서 도망치지 않았ㅡ”
“성자시여!”
“성자께서 이곳에 강림하셨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함성이 기사단장들의 말소리를 묻어버리며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불릴 사람이라면 하나뿐이다. 아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꿇은 채 땅에 머리를 박다시피 조아린 전투 수녀들 사이로 칠흑색 제복을 입은 델타가 걸어오고 있었다.
“…….”
델타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넷이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표정이지?’
‘맞네요. 그 표정.’
‘뭐야, 그럼 방금 일은 델타도 왜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뜻이야?’
‘아마 그럴 확률이 높겠군.’
저건 델타가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자주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