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48)
외전: 혼돈 던전 – 4
날 보고 잠시 화색이 돌았던 이클립스는 옆에서 웃음을 참는 기사단장들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울상을 지었다.
손가락을 튕겨 목에 걸린 스케치북을 없애주자, 내 의도를 알아차린 이클립스가 차원을 넘어왔다. 기사단장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무서워하진 않는 것 같네.’
여신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겁먹은 기색이 없는 것 자체가 큰 발전이었다. 여신의 모습을 보고 웃다니, 예전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행동이니까.
‘이렇게라도 거리감을 좁혀나가야지.’
미래에 어떤 관계가 될지 확정된 이상 언제까지고 경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할 순 없었다. 황제와 영원의 마법사, 교황들이 그렇게 됐듯이 내 여자들 중 한 명 정도의 위치가 되는 것이 맞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내 방에서 벌을 받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약간의 이미지 하락을 감수해야겠지만, 이클립스 본인도 동의한 사항이다. 고작 여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는 건 자기도 원치 않는다면서.
이클립스는 쭈뼛쭈뼛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스케치북에 연결되어 있던 목줄을 손수 풀어주었다. 찰칵, 하고 가려져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앞으로는 그런 내기같은 거 함부로 하려고 들지 마세요, 여신님.”
“……네, 당신.”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클립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신이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 봐서 그런지 기사단장들이 조심스레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여기에 제가 모르는 숨겨진 비밀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숨겨진 비밀이라니요?”
적당히 쓰다듬다가 본론을 꺼냈다. 처음엔 뭘 말하는지 모르는 눈치던 이클립스는 얼마 안 가 의미를 알아차렸다. 조금씩 펴지던 어깨가 다시 소심해졌다.
“그건…… 그러니까…… 약간의 이스터에그 느낌이라고 보시면 되긴 하는데요…….”
내 주변 여자 이외의 사람들이 혼돈 던전에 진입해 있는 상태에서 내가 나타나면, 랜덤한 보스 하나가 나타난 다음 겁먹은 것처럼 도망치게 해두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나한테도 말해주려고 했는데 내가 혼돈 던전을 일주일만에 클리어하는걸 보고 얼이 빠진데다 벌까지 받아서 잠시 까먹었다나.
뭐라고 해야하나, 평소의 이클립스다운 행동이었다.
“저, 저도…… 이렇게 빨리 공개될 줄은 몰랐는걸요…….”
이클립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쭈뼛거렸다. 스케치북을 괜히 치워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 여기서 있던 일은 물어보고 치웠어야 하는 건데.
사실 말해줄 시간이 없긴 했을 것이다. 혼돈 던전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일주일 내내 클리어 과정을 지켜보기 바빴고, 나는 클리어 하자마자 벌을 주고 나온 뒤에 여기로 찾아왔으니까.
“다음 스케치북은 가볍게 세 시간 정도만 달고 있는 걸로 하죠.”
“엑.”
당연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여신과 내 관계가 어떤지를 알아차리고 경악에 차 있는 기사단장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연성 재료나 몇 개 주워갈 생각이었다.
“애들 황궁으로 돌려보내고 자취방 가 있으면 돼. 나도 금방 따라갈게.”
리제도, 아이리스도, 에리카도, 클라우디아도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털레털레 돌아갔다. 이 세계의 창조주가 푼수짓이나 해대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한지라 충격이 제법 컸던 모양이다.
보는 눈이 없어진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제일 가까이 있는 보스룸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첫 보스를 상대하면서 깨달았다.
‘카이킬리아가 브닼 4 처음 할 때 이런 느낌이었겠네.’
직접 상대하는 편이 게임에서 상대하던 것보다 훨씬 더 쉽다고 말이다.
공격을 훨씬 더 수월하게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스가 처치되는 속도까지 게임과는 비교조차 안 되게 빨랐다. 카이킬리아가 이래서 적응을 못했었구나 싶었다.
평가 기준이 브닼 4인 나와는 달리 카이킬리아는 평가 기준이 현실이었을 테니까. 이른바 역체감이라는 개념이다.
게임에서 이미 한번 와본 곳이었기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1층 보스까지 클리어한 나는, 드랍템과 연성 재료를 대충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피 묻은 검을 쥐었다.
손에 들린 새빨간 피 색깔의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극초반에 인간 도살자를 잡은 다음부터 사용하기 시작해서 세계를 먹는 자와의 첫 만남으로 파괴됐던 무기니까. 덕분에 날개 잃은 악몽을 찾으러 가야 할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었다.
‘……무기 강화도 세레스한테 한번 맡겨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의 세레스는 퀘스트로 날개 잃은 악몽을 주는 대머리 NPC였을 뿐이지만, 지금의 세레스는 다시 대장장이 일을 손에 잡았으니 무기 강화도 가능할지 모른다.
강화해봤자 더 이상 쓸모가 없긴 하지만, 노강 상태로 넣어두는 것보다는 풀강 상태로 넣어두는 편이 훨씬 더 보기에 좋으니까 말이다.
“오셨사옵니까, 성자시여.”
“무엇이든 시켜만 주시옵소서. 이 한몸 바쳐 따르겠나이다.”
날개 잃은 악몽 대신 피 묻은 검을 들고 동공으로 돌아오자, 심판관과 심문관을 비롯해 전투 수녀들까지 일제히 안쪽으로 머리를 조아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모습을 한두번 본 것도 아니었던지라 이젠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은빛 여명 기사단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단체로 멍해져 있던 상태라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맡은 일은 잘 끝낸 듯했다.
“들어라. 그대들은 내 의지를 받들어 이 장소를 수호하게 될 것이다.”
“…….”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다들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 중 몇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아 기절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신전 비스무리한 건축물을 하나 지어주면서 심판관과 심문관 양측에서 각각 전투 수녀 둘씩을 차출해 일정 주기마다 돌아가며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첫 순서는 굳이 정하지 않아도 됐다. 내가 직접 지어준 신전에서 거주하게 되리란 말을 듣고 대부분이 거품을 문 채 기절해버린 탓이었다.
“성자시여, 심판관 직책을 사퇴할 터이니 제게도 부디 기회를…….”
“그렇사옵니다. 부디 청컨대 저희에게도 이 영광을 맛볼 수 있도록…….”
심판관과 심문관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직위를 포기할 테니 기회를 달라고 애걸했으나, 내가 단칼에 거절했다. 둘은 서럽게 울다 말고 내가 위로해주자 똑같이 거품을 문 채 기절해버렸다.
나는 뒷일을 아직 기절하지 않고 남아 있는 전투 수녀들에게 맡긴 뒤 곧장 린네를 찾아갔다.
“흐, 히히.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그런 일을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린네가 음산하게 웃으며 날 맞이했다.
“의뢰입니다.”
나는 혼돈 던전에서 챙겨온 연성 재료를 내려놓았다. 절대 작지 않은 크기의 테이블이 금방 가득 찼다. 린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던전에 갔다 온 거야?”
“어쩌다보니요.”
만약 기사단장들이 거기 없었더라면 이렇게 일찍 가진 않았을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연성 재료 하나를 집어 가슴골에 끼운 린네가 저번처럼 가슴을 파이즈리하듯 움직이며 물건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워낙 무식한 크기의 가슴이라 그런지 재료는 안쪽에 푹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종류구나. 알았어.”
30초쯤 지났을까, 린네가 재료를 빼냈다. 그러더니 곧장 다음 재료를 집으려 하길래 선수를 쳤다.
“의뢰비는 어떻게 되죠?”
“의뢰비 말이지, 헤헤.”
린네는 손을 멈추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혹시 네 머리카락이나 침 같은 거ㅡ”
“되겠습니까?”
저번에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가 카이킬리아한테 들켜서 뿌리까지 뽑힐 뻔 했다던데 아직도 포기를 못 한 건가. 하여튼 이상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린네는 척 보기에도 한참 가라앉은 분위기로 숫자가 적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정상적인 액수가 적혀 있었기에 군말없이 금화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아, 하나만 더. 페치 걔가 너 여기 오면 자길 불러달라고 했어. 너한테 할 말이 있대.”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려던 나를 린네가 멈춰세웠다.
“어떤 할 말이요?”
“글쎄. 히히. 직접 보면 알 거라던데.”
어째 불안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짜잔! 어떠신가요!”
어째 불안한 감정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뜬금없이 커다래진 가슴을 출렁이며 나타난 페치가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 포즈를 취해보였다. 하나같이 야하다기보다는 어색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 동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슴은 어떻게 키웠어?”
“엣헴, 비밀이에요!”
“풍유환이구나?”
“…….”
반응을 보아하니 정답이다.
“재료에 빛을 머금은 성수도 있었겠네?”
“…….”
제작 방법은 세레스한테서 들은 것 같고.
“그거 더럽게 비싼데, 돈은 어디서 구했어?”
“……있는 거 거의 다 털었어요.”
단숨에 침울해진 페치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성수를 구매하느라 출혈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침울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페치는 비싼 대가를 치렀으니 반드시 원하는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열정을 한층 더 불태우며 가까이 다가왔다.
“한층 더 놀라워진 페치의 몸을ㅡ”
“잠깐 기다려 볼래?”
“……네?”
나는 페치를 멈춰세우고 미네르바가 했던 것처럼 폰의 갤러리를 허공에 띄웠다. 이 세계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영원의 마법사가 누구인지는 알지?”
“당연히 알죠……?”
“그분이 마법을 하나 개발했거든. 과거의 일을 저장해서 언제든 볼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인데, 잘 봐.”
이제는 단순히 내 모습을 찍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단계 더 나아가 본인들의 모습을 찍어서 내게 보낼 수도 있게 된 플로레타와 루나의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밤하늘을 배경삼아 서로 손을 맞잡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알몸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플로레타와 루나의 사진을 말이다.
“나 유혹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데, 할 수 있어?”
“…….”
페치는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플로레타와 루나의 사진이 하나씩 추가될수록 점점 더 어둡게 물들어갔다.
외전: 리바누스
카이킬리아는 최근들어 꽤 보람차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임감에 짓눌릴 일도 없고 과거의 기억으로 고통받을 일도 없는, 근심걱정이 모두 사라진 그런 시간. 황제였던 시절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을 평화와 여유였다.
가족의 복수를 이루지도 못했으며, 의무와 책임에 짓눌려 있었기에 항상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워야 했고, 미네르바를 제외하면 말 몇마디 나눌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아이테르눔 제국의 황제라는 직위와 더불어, 가족과 친인척마저 하나 빼고 모두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으니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니 성격 또한 자연스레 지금보다 훨씬 더 개차반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역시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수틀리면 성검부터 꺼내고 보거나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성향은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카이킬리아 스스로도 성격이 많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후우우우우우…….”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시도때도 없이 델타를 불러서 박살난 컴퓨터에 복원의 권능을 사용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을 테니까.
정확히 평타 3대 분량의 체력을 남기고 죽어버린 캐릭터가 조각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카이킬리아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방금 보스전은 평타 3대, 혹은 특수 능력 1번이면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못 버텨서 경험치바와 소지금이 눈 깜짝할 새 절반이나 날아가버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꾹꾹 억누르면서, 카이킬리아는 옆에 쌓아뒀던 초콜릿 하나를 집어 오독오독 깨물어먹었다.
입 안 가득 달콤한 맛과 초콜릿 향이 퍼지자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가 토막나버린 경험치와 소지금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진 않겠다.’
앉은 자리에서 초콜릿을 스무 개나 먹어치운 카이킬리아가 포장지를 정화 마법이 걸린 쓰레기통에 우르르 쏟아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게임을 시작하려 했다.
“어라?”
푸른 빛과 함께 뜬금없이 방 한가운데서 튀어나온 아우로라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카이킬리아가 아우로라를 흘끗 곁눈질했다. 황제의 직무를 너무 오래 등한시할 수는 없다면서 미네르바와 같이 분신을 점검하러 황궁에 갔었던가.
여태까지 분신이 처리했던 안건들을 요악해서 살펴보고, 명령이 내려질 방향을 지정하는 작업이 몇 달에 한번 정도는 필요하다고 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고모님.”
아우로라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카이킬리아는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했으나, 그것마저 처음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기에 아우로라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처음과 비교해 달라진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카이킬리아는 꽤 유순해졌고 아우로라는 제법 날카로워진지라 겉모습마저 예전보다 훨씬 더 닮아 있었다.
사실은 고모와 조카 관계가 아니라 자매였었나 싶을 만큼.
‘우리가 더 닮은 것 같은데.’
특히 델타의 곁에 서로 조금도 안 닮은 자매가 둘이나 있어서 더 그랬다. 은빛 여명 기사단장인 리제와 에리카, 그리고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인 플로레타와 루나.
하지만 리제와 에리카든 플로레타와 루나든 서로가 닮았다고 하기엔 어림도 없는 외모였다. 당장 머리카락 색부터가 그랬다. 언니 쪽은 청발과 은발인데 동생 쪽은 적발과 금발이니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아우로라.”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지자, 아우로라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킬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우로라는 우물쭈물했다.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망상을 그대로 털어놓을 순 없어서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음…….”
“되었다. 어떻게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가 붙을 수 있겠느냐.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신과 닮은 듯 조금은 다른 아우로라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킬리아는 그냥 몸을 돌려버렸다. 잠시 멈췄던 게임이 재개됐다. 이번에야말로 잡겠다는 듯 움직임이 무척 날카로웠다.
이왕 잘못 왔으니 시간을 보내다 가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건지, 아우로라는 어느새 흰 안개벽을 건너 보스룸으로 진입하는 카이킬리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시네요.”
“너 역시 다를 것 없지 않느냐, 아우로라.”
“황제 자리는 저한테 떠넘기시고 말이죠. 설마 이렇게 될 걸 예측하기라도 하셨나요?”
카이킬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농담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다.
“떠넘긴 것이 아니다.”
“알고 있어요. 그냥 농담으로 해본 소리에요.”
“농담에 소질이 없구나, 아우로라.”
아우로라는 방실방실 웃었다. 카이킬리아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제법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은빛 여명 기사단을 복직시켜주기 위한 시도를 들켰단 사실만으로도 목이 날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벌벌 떨어야 했을 땐 언감생심이었던 대화다.
뭐, 둘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부드러워진 데는 같은 침대에서 같은 남자를 공유한 경험이 제일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말이다.
델타의 앞에서 알몸으로 끌어안고 깍지를 낀 채, 혹은 입을 맞춘 채 한 덩어리처럼 뒤엉켜 쾌락에 겨운 교성만을 끝없이 내지르고 있으면 없던 유대감도 생겨나기 마련ㅡ
‘무슨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래.’
한숨을 쉬고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호시탐탐 그런 걸 노리는 사람이 집에 넷이나 있어서 그런가, 갈수록 사고방식이 오염되는 기분이었다. 분명 예전에는 안 이랬었다.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보스는 피가 반 정도 깎인 상태였고, 카이킬리아와 똑 닮은 캐릭터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착실히 공격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 녀석이네.’
먼젓번에 잡아본 적 있는 보스였다. 같은 루트를 타고 있기라도 한 걸까.
브닼 4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초회차 유저 두 명이서 같은 루트로 진행하는 게 더 어렵긴 하겠지만 말이다.
선택지 하나만 다르게 골라도 언제 어디서 나비효과가 일어날지 모르는 게임이다. 단순한 우연의 산물에 불과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혹시 원하는 엔딩이라도 있으세요, 고모님?”
“원하는 엔딩이라…… 이상한 질문이구나, 아우로라. 나 역시 너와 같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이 게임의 끝은 조금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
브닼 4를 시작한 초창기에 델타가 그렇게 말했었다. 초회차만큼은 아무런 사전 정보나 공략 없이 원하는 장소로 가보고 원하는 선택지를 골라가며 엔딩을 보라고 말이다.
그건 오직 초회차에서밖에 할 수 없는 경험이라면서. 그러니 원하는 엔딩이 있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죄송ㅡ”
“하지만, 원하는 결말이 아주 없지는 않노라.”
“어, 정말이신가요? 어떤 엔딩인데요?”
아우로라가 눈을 빛냈다.
“마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다 공평하게 쳐 죽이는 것이다.”
“……네?”
모두 다 공평하게 쳐 죽이다니, 대체 무슨 엔딩을 노리시는ㅡ
“그냥 농담으로 해본 소리이니라.”
아우로라는 놀라다 말고 멍해졌다. 방금 들려온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냥 해본 소리라고? 농담이었다고? 뭐가? 어떤 엔딩을 볼 예정인지 알려주는 게?
‘……방금 농담 하신 거야? 진짜로?’
예전같았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할 행동이었다. 아우로라는 뭉클하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 나머지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갔다.
그 카이킬리아가 농담을 했다. 무려 그 카이킬리아가 말이다. 예전의 카이킬리아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고, 지금의 카이킬리아가 어떤지를 알기에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변화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농담에는, 그, 소질이 없으시네요, 고모님?”
“알고 있느니라.”
보스의 피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대화는 그걸로 종료되었으나, 잠깐이지만 일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기는 충분했다.
아우로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카이킬리아가 활짝 웃기도 하고 스스럼 없이 먼저 다가가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평범하게 어울리는 미래가.
그런 미래에서조차 고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특유의 말투만은 그대로였지만, 아무튼 행동만은 평범했다.
‘좋아. 할 수 있어.’
지금 여기서 그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어보기로 결심한 아우로라가 의지를 다졌다. 마침 카이킬리아의 캐릭터가 광역 공격에 휩쓸려 죽어버린 참이었다.
아우로라는 보스의 피가 딱 평타 1대 분량밖에 남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클리어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선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
“티배깅은 대체 언제 배운 거야, 아우로라?”
“……고의는 아니었어.”
외전: 나이
주말이 되자 백유진이 반찬을 갖다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자취방에 찾아왔다. 굉장히 뜬금없는 방문이었다.
“엄마가 반찬통 빈 거 가져오고, 새로 해놨으니까 이거 먹으래. 냉장고 저쪽이지? 안에 넣어놓는다?”
“왜 또 왔어? 뭐 바라는 거라도 있냐?”
“……바라는 게 있기는! 그러니까…… 어…… 그, 그래. 새언니 얼굴 보러 온 건데? 새언니는 진짜 좋으신 분 같으니까 지금부터 잘 지내야지.”
솔직히 개수작으로밖에는 안 보였다. 저년이 아무런 꿍꿍이 없이 순수한 호의만으로 여길 찾아왔을 리가 있나.
이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백유진은 안 나갈 핑계라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 여자친구에게 달라붙어 조잘대기 시작했다.
“어? 진짜요? 그러면 언니 여기서 계속 오빠랑 살고 있는 거예요?”
“네. 저희 관계에 따로 살기에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와…….”
이번에 여자친구 역할을 맡은 사람은 스텔라였다. 백유진은 스텔라와 마주앉아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셀레네는 옆에서 묵묵히 쌍둥이 동생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백유진은 찾아올 때마다 나랑 같이 있는 쌍둥이 자매가 신기한 듯 셀레네를 계속해서 흘끔거렸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쌍둥이가 한 집에 있다 한들 그냥 언니를 찾아서 놀러왔다고 생각하지, 누가 남자 한 명을 공유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적어도 이쪽 세계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
“잘 먹을게, 오빠!”
결국 점심때까지 안 나가고 버틴 동생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초밥 포장지를 뜯었다.
원래는 곧바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런 아들의 속내를 읽었는지 엄마가 돈부터 입금하면서 선수를 치셨다. 유진이가 나랑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으니 잘 돌봐주라고 말이다.
이거 친해지려는 게 아니라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개수작 부리는 건데, 엄마한테 차마 그런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인지라 받아들여야만 했다.
“야, 이거 내 돈 아니다. 엄마가 준 돈으로 산 거니까 나중에 엄마한테 감사하다고 해.”
“그 정도는 알아. 저번에 10만 원도 알고보니까 엄마 돈이었는데 뭐. 오빠가 나한테 자기 돈으로 뭐 사줄 사람이야?”
“알면 그냥 돈으로 줄 테니까 나가면 안 되냐? 니가 여기 있어봤자 뭐하려고?”
“말했잖아. 새언니랑 친해지고 싶다고. 언니,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그렇죠?”
“…….”
스텔라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뻔했고, 백유진이 그걸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동생년은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가, 속옷 없이 헐렁헐렁한 박스티와 돌핀팬츠만을 걸치고 있는 스텔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알았어, 알았어. 누가 뭐래?”
전혀 알았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동생년은 ‘마침 할 일이 생각났으니’ 일찍 빠져줘야겠다면서 초밥을 깨작깨작 먹어나갔다.
“초밥 두 입에 나눠서 먹는 거 진짜 죽이고 싶네.”
“입이 작은 걸 어떡해? 한입에 다 안 들어가는데 이렇게라도 먹어야지.”
“더 커지게 찢어줄까?”
“미쳤어?”
중간에 초밥 한 피스를 두 입에 나눠서 먹는 꼴을 본 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시비를 거는 상황이 벌어지긴 했으나, 동생년은 꾸역꾸역 남은 초밥을 다 집어먹었다.
그리고 디저트로 시킨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마시다가 문득 궁금해졌다는 듯 질문했다.
“언니. 언니는 몇 살이에요?”
“저요?”
스텔라가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살짝 놀란 눈치로 되물었다.
“네. 저번에 나이를 못 들은 것 같아서요. 오빠랑 같은 나이라고 하셨던가요? 아닌가? 더 적으셨나?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한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요?”
초록색 눈동자가 흘끔흘끔 날 향했다. 나는 저쪽이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안이 다시 백유진에게로 돌아갔다.
“스물하나요. 성…… 주, 주원이랑 동갑이에요.”
평소 습관대로 성자라 부르려 했던 스텔라가 다급히 말을 주워삼키더니, 내 이름을 입에 담고선 새빨개진 얼굴로 안겨왔다. 흐으으으, 하고 달아오른 감정을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아주 그냥 나더러 빨리 나가라고 시위를 하네?”
백유진은 투덜대면서도 깔깔 웃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애정행각처럼 느껴질 테니 저런 반응일만도 했다.
가뜩이나 자기가 나간 다음에 우리 둘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며 오해중인 상황이기도 하고 말이다.
“몇 살인지는 왜 물어봐?”
“왜, 나는 새언니 나이도 궁금해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불만 있으면 말해봐. 들어주긴 할게. 대가가 뭔지는 너도 알테지만.”
동생년이 침묵에 빠졌다. 정말 더럽고 치사하지만 내가 자기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걸 쥐고 있어서 아득바득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표정까지 관리하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저렇게 할 말을 억지로 참는다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입을 닫고 있는 쪽이 놀려먹는 입장에서는 더 뿌듯하니까.
분을 삭히려는 듯 얼음을 으적으적 씹어먹은 동생년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 부분이 굉장히 깊게 파인 스웨터 안에서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가슴이 힘차게 출렁였다.
ㅡ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도저히 못 볼 수가 없는 각도였다.
‘……뭐지?’
분명 어디 한번 엿먹어보라고 키워놓은 크기였는데, 복장도 그렇고 방금 미소도 그렇고 절대 싫어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 작게 만들어버려야 하나?’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백유진이 되도 않는 연기를 시작했다. 주로 가슴이 너무 커서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에 대한 헛소리였다.
“그래? 줄여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오빠가 나한테 준 벌이잖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벌은 다 받아야지!”
이년이?
알고보니 린네와도 맞먹을 그 무지막지한 크기의 가슴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던 동생년을 가차없이 쫓아보낸 다음이었다.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방 안에서 거실의 대화를 모두 들었던 반말 닉스가 “미네르바 님은 나이가 확 줄어드셨네, 히힛. 이십사분의 일쯤 되지 않나?” 하고 내게 속삭였다가 딱 걸린 것이다.
나는 미네르바가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얼른 끌어안아 제압했다.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는 벌써부터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닉스 넌 네 방에 들어가 있어.”
존댓말 닉스와 플로르는 무척 억울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존댓말 닉스든 반말 닉스든 플로르든 결국에는 모두 다 닉스 플로르 본인이니까.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살아온 세월은 딱히 중요한 사항이 아니란다, 아이야.”
“알고 있습니다.”
미네르바는 내 품에 끌어안겨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끄덕끄덕 긍정해주면서 열심히 몸 곳곳을 어루만져주었다.
사실 저 말대로 이클립스의 세계에서 나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일단 노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컸다. 성장이 끝나고 나면 나이를 먹어봤자 달라지는 게 거의 없는 것이다.
혈연 관계에서나 호칭의 정리를 위해 기억하는 정도일까. 카이킬리아와 아우로라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다들 정확한 나이는 들어본 적이 없네.’
첫 만남에서 20대 초반이라고 말해줬었던 기사단장들, 각각 400살과 200살 이상이라는 것만 아는 미네르바와 닉스를 제외하면 정확한 나이는 들어본 적 없었다.
‘어차피 알아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다만, 굳이 신경쓰지 않았으니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걸 알아봤자 뭐 하겠는가. 오래 살아온 순서대로 줄세우기를 할 것도 아니고.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여, 여신이 있으니…… 신경쓰지 않으으으읏?!”
세계 창조 전부터 살아온 이클립스가 있으니 나이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진한 레몬향이 풍겨오는 ‘설득’ 끝에 미네르바는 숨을 헐떡이며 납득해주었다.
그리고 닉스는 일주일간 내 침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그러자 순간 교황들이 눈을 빛냈다. 빈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벌써부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ㅡ야
ㅡ네?
ㅡ가슴 일주일 압수
ㅡ왜??????????????
ㅡ아니잠깐만오빠갑자기왜이러는데
ㅡ전화좀받아봐제발진짜딱한번만
ㅡ내가진짜따지려는게아니라왜그러는지이유라도알고싶어서그래
ㅡ너 때문에 평화가 깨질뻔함
ㅡ??????????????????
괜히 나이 이야기를 꺼내서 그걸 듣고 있던 닉스가 이상한 말을 하도록 만든 원흉도 같이 벌을 받았다. 아마 지금쯤 원래의 가슴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백유진은 자기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게속해서 전화를 걸어왔지만, 깔끔하게 차단해버렸다.
일주일 뒤에 가슴 돌려주면서 차단도 같이 풀어주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