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5)
내가 영주를 처리하고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기사단의 분위기는 예전과 비교해 180도 달라져 있었다.
우선, 지금껏 은빛 여명 기사단의 속을 썩이던 고민들이 모두 해결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성에 걸려있는 원상복구 마법과 관련해서도 마탑으로부터 직접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받았고, 은빛 여명 기사단을 주구장창 괴롭혀대던 전 영주도 죽었고, 악마와 황제의 일도 무사히 넘어갔다.
분위기가 가라앉을래야 가라앉을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전 영주놈이 뒈져버린 게 무척이나 기뻤는지, 리제는 날 와락 끌어안고 몸을 비벼대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곧바로 에리카가 제발 좀 자제하라면서 떼어놓기는 했지만.
잠깐이긴 했어도 몸에 닿는 감촉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가는 편이 낫겠지.’
나는 전 영주가 내게 했던 제안을 끝까지 숨기기로 했다. 기사단장들을 성노예로 만들자는 제안 말이다. 어차피 당사자도 죽었겠다, 그걸 굳이 말해줘봤자 기분만 잡칠거다.
지금껏 당해왔던 일만으로도 충분히 더러운 기분이었을텐데, 거기에 굳이 좆같음을 더 추가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우리 은빛 여명 기사단은 가끔씩 도시를 순찰하고 성 내부의 연무장에서 가볍게 서로 대련을 하는 것이 할 일의 전부인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와, 그 개새끼는 일을 대체 얼마나 미뤄댄거야? 해도 해도 끝이 없잖아. 미치겠네, 진짜.”
“그래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드리고 있잖아요. 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아서 티도 안 나긴 하는데.”
“너희 다섯명이 하루종일 도와줘봤자 내가 처리하는 분량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거 알아? 애초에 최종 결정권자가 나거든? 너희가 처리하니 어쩌니 해도 내가 한번씩은 검토해야 된다고.”
가주의 자리와 영주의 직위를 동시에 승계한 아우로라만 빼고 말이다.
아우로라는 전 영주놈이 지금까지 미루고 또 미뤘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죽상을 해댔다. 그런 개막장 인성을 가진 인간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으니까.
당사자의 말을 빌리자면, ‘여기 처음으로 도착했던 날의 일을 지금까지 미룬 수준’ 이라나?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져나오는데,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새로 생긴다며 진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서류를 처리해도, 정말로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다음날에 그만큼의 서류가 또다시 쌓였다. 괜히 앓는 소리를 내며 죽상을 짓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것도 아우로라가 정말 미치도록 유능한 탓에 쌓인 걸 정리하려는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이지, 어중간하게 똑똑한 인간이라면 아마 손도 못 댔을거다.
영주가 뒈진 기념으로 저택에서 우리끼리 개최하기로 했던 축하 파티가 기약없이 미뤄진 이유도 그래서였다.
‘우리끼리만 축하하기도 좀 그러니까.’
아우로라는 우리들이 옆에 있으니까 정신사나워서 더 집중이 안된다며 축객령을 내렸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간이 몹시 남아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은 밀린 레벨링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틈을 타 혼자서 마물을 토벌하고 오겠다 말했고, 아이리스는 알아서 하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내가 입단하기 전부터 굵직한 사건들을 워낙 많이 터뜨려대고 그걸 또 혼자 알아서 해결해왔다보니 나름 신뢰가 두터워졌는지, 날 보는 시선에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고싶은 게 있다면 일일이 묻지 말고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대신 리제가 쫄레쫄레 나를 따라왔다. 브닼 4에서 NPC와 같이 다니는 상황은 한 번도 없었기에 조금 생소하긴 했지만, 따라온다고 딱히 문제될 것도 없어서 내버려뒀다.
“…….”
문제될 게 딱 하나 있긴 했다.
리제는 무기조차 뽑지 않은 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마물 잡는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시선이 잠시도 안 떨어져서 더럽게 부담스러웠다.
“아니,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왜, 보면 안 돼? 내가 좋아서 보는건데.”
대체 왜 좋은지 이유는 불명이었다.
하지만 일단 자기가 좋아서 보겠다는데 내가 뭐라 하기도 좀 그랬던데다, 정말 진심으로 싫었던 것은 아니기도 했기에 저런 식으로 당당하게 나오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내가 겨우 부담스럽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잡몹 잡다가 삐끗할 실력도 아니니까.
나는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리만치 끈적해지는 리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묵묵히 마물만 때려잡았고, 얼마 안 가 레벨 두 자릿수를 달성했다.
[능력치] [레벨] 10 [체력] 1 [마나] 1 [신앙] 1 [지구력] 1 [숙련] 1 [힘] 1 [마력] 1 [신성력] 10 [내구] 1‘됐다.’
지금껏 얻은 능력치를 신성력에 몰빵하고 나서야 간신히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능력치를 찬찬히 관찰했다.
다른 것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신성력만 10까지 찍는 것. 얼핏 보기에는 기형적인 스탯 분배지만, 닼라 모드에서는 이것이 제일 효율적인 빌드였다.
브닼 4를 처음 접하는 뉴비들에게야 당연히 체력이나 지구력, 힘이나 내구에 적절히 분산해서 투자하는 것이 낫다.
실제로 뉴비들에게 제일 추천되는 과거 태생인 ‘기사’의 스탯 분배가 딱 저렇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중갑이나 다름없는 방어력의 경갑은 물론이고 모난 곳 하나 없는 무기인 롱소드까지 기본으로 줬으니, 괜히 뉴비는 닥치고 기사 고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고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지독하게 어려운 게임이기는 했지만.
‘그래, 이런거 생각해서 뭐하겠냐. 어차피 여기서는 쓸모도 없는데.’
당연히 그건 바닐라까지의 이야기고, 닼라 모드가 적용되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닼라 모드에서는 아예 초기 빌드부터 새롭게 짜야 했다.
바닐라에서 사용하는 초기 빌드를 그대로 써도 아주 못할 건 아닌데, 효율이 병신이라서 그렇다.
길 가는 잡몹에게 한 대를 버티려면 체력을 10 이상 찍고 무조건 중갑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중갑을 입고 구르기를 패널티 없이 하려면 내구를 30 이상 찍어야 한다.
버려진 자 기준, 무려 40에 가까운 스탯 포인트가 고작해야 길 가는 잡몹에게 한 대를 버티겠답시고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이다. 심지어 저래봤자 보스전은 무조건 한 방이다.
경갑 입고 체력으로 때우겠다는 선택지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제일 방어 성능이 좋은 경갑인 기사셋 기준으로도 총합 스탯 포인트가 60이 훨씬 넘게 드니까.
닼라 모드에서 가져야 할 핵심 마음가짐은 절대로 안 맞겠다는거지, 맞고 버티겠다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딴 생각 가진 놈은 닼라 모드를 건드릴 실력조차 안 됐다.
지구력도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전투 피로 디버프야 룬으로 제거하면 되니 최대치를 늘리는 짓은 무의미하고, 지구력 스탯 1짜리 능력치의 스태미너로도 3연속 구르기는 가능하니 그걸로 충분하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이상, 무기를 바꾸기 전까지는 힘 스탯도 딱히 의미가 없고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공격력 버프 지속시간부터 늘리는게 맞는거지.’
게다가 앞으로도 스토리를 진행하는 내내 주구장창 달고 살아야 할 것이 버프다.
그 점을 고려하면, 신성력을 찍어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과 마력을 찍어 수치를 늘리는 것은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마력은…… 5까지만 찍어두면 되겠지. 아니다. 중후반에 마법 하나 정도는 쓰는게 더 좋으려나.’
능력 확인 구슬에서 손을 뗐다. 허공에 떠오른 스탯창이 자취를 감추고, 푸른 광원이 사그라들며 주변이 살짝 어두워졌다.
머릿속으로 다음 스탯을 어디에 찍고, 무슨 빌드를 탈지 고민하며 계단을 올라가던 와중에 바깥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점에 기사단이 소란스러워질 이유가 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바로 앞에 리제가 서 있었다.
“바깥이 좀 시끄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내 말에 리제가 시선을 돌렸다. 얼핏 보기에는 나를 평소처럼 맞이해주는 듯 했지만, 그 얼굴에 약간의 동요가 서려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거지.
“표정이 왜 그래? 뭐 사건이라도 터졌어?”
“사건…… 사건이라.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리제의 대답을 듣고 머리를 굴렸다.
‘이 시점에서 은빛 여명 기사단에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이벤트가 일어났던가? 황제도 돌아갔고, 내가 아직 20레벨을 찍은 것도 아니고. 뭐 이벤트 생길만한 건덕지 자체가 없는데?’
목 없는 철갑 기병을 잡고, 그 이후에 20렙을 찍어 룬 슬롯이 열리기 전까지는 사실상 자유 행동 구간이었다. 보스를 잡든, 서브퀘스트를 하든, 잡몹을 잡든 플레이어의 마음이라는 의미다.
‘뭔가 이상해.’
앞으로 조금 더 걸어나갔다. 성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서, 특유의 흰 민소매와 분홍색 돌핀팬츠 차림을 한 클라우디아가 어느 남자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언성이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너한테 명령권 넘겨줄 생각 따윈 있지도 않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응?”
클라우디아가 자기 키만한 대검을 바닥에 쾅 내리찍으며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되받았다.
“네 의견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중요한 건 황제 폐하가 내게 명을 내리셨다는거고, 그러니까 너희는 내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이지. 이게 이해가 안돼?”
“아, 그래서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선,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셨으니 닥치고 따라라? 지금 나랑 장난쳐?”
“장난? 폐하의 명이 장난이라고 생각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런 명령을 내리셨으면 말로만 하셨을 게 아니라 증거품을 같이 하사하셨겠지.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냐? 뭣도 없이 맨손으로 덜렁 와놓고선 이따구로 행동하게? 응?”
‘……뭐야. 저놈이 여기 왜 있어?’
그리고 나는 클라우디아와 언쟁을 벌이는 황금빛의 기사를 보고 제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황금, 황금, 그리고 또 황금. 전신을 완벽히 가리는 갑옷도 황금이고, 등 뒤에 달린 망토마저 황금색이고, 허리춤에 낀 투구는 물론 검마저 황금색인 기사.
비슷한 외형의 NPC는 많았지만, 저런 외형의 NPC는 게임에 딱 한 명 뿐이었다.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
‘쟤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나는 어이를 상실하고 눈만 깜빡였다. 스토리가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중간 과정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결국 황제는 여차저차 해서 잘 돌아가지 않았었나?
내가 그렇게 멍하니 굳어있으려니,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날 발견하고는 어깨로 클라우디아를 툭 밀치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기사단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야차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놈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길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기사단장이 한껏 거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은빛 여명 기사단에 들어왔다는 신입 기사로군. 맞나?”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부터 2주간 너를 감시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거부권은 없으니 명심하도록.”
‘감시? 황제 폐하의 명령?’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