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54)
외전: 보스전 체험하기 – 2
설마는 가끔 사람을 잡는다. 아니, 사실 꽤 자주.
“…….”
날 제외하면 칠흑 성야 기사단에서 최고 서열로 통하는 라크시아가 딱 1번, 그 외 나머지 단원은 스치지조차 못했다. 부기사단장 5명을 포함해서 말이다.
무려 백 명이 넘는 인원 중에 누구 하나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검기를 날리거나 속성 공격을 사용하는 등의 변칙적인 공격마저 허용해준다고 했는데도 저런 꼴이었다.
케이라스는 온갖 기묘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저 커다란 덩치로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데 게임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앞 순서가 두들겨맞은 방법을 확인한 뒷 순서들이 나름대로 전략을 보완해서 덤볐는데도 그랬다.
라크시아 말로는 순서의 유불리를 감안해서 앞 순서가 돈을 더 많이 챙겨가기로 자체적인 합의를 했다고 하던데, 저래서야 돈을 더 많이 챙긴다는 조건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이다.
“난도가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
ㅡ어, 어라? 이렇게까지 세게 만들어졌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내가 조용히 읊조리자, 머릿속에 이클립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게까지 세게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니, 이 허접 여신이 뭔가를 또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 건가.
“으으…… 완전 괴물이네요.”
너덜너덜해진 라크시아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통 우그러지고 찌그러졌던 칠흑색 갑옷은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는 정신적인 충격은 아직 극복해내지 못한 듯했다.
관객석 중앙에 떠오른 직사각형 화면 속에서는 첫 번째 순서였던 기사들이 다시 보스에게 덤벼드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팝콘과 콜라도 마다한 채 그 전투 장면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공격을 겨우 1번밖에 성공시키지 못했기에 약속했던 보너스가 110명 전원에게 돌아가기엔 턱없이 적은 금액이 되긴 했으나, 지금 칠흑 성야 기사단이 악에 받친 이유는 돈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이지.’
한때 은빛 여명 기사단과 함께 제국 최고 기사단의 자리를 양분하며 황제를 직접 경호하기까지 했던 기사들이다. 자존심이 강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자기들이 공격을 스치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날 수밖에.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도전해 보고 싶다고 입을 모아 자청했을 정도였다.
“설마 저희한테 공짜 돈 주기 싫어서 일부러 제일 강한 놈으로 데려온 건 아니시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농담이었습니다. 충격이 하도 커서 잠시 투정 좀 부려봤어요.”
“그러면 나도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차지한 걸 축하해줘야겠네. 축하해, 라크시아.”
라크시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따위 1등은 공짜로 줘도 안 가집니다. 0번이나 1번이나 거기서 거기잖아요.”
“1위 소감이 그것 뿐이야? 너무 단촐한데.”
“어차피 두들겨맞은 게 전부인데 여기서 더 말할 내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저니까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지, 다른 애들은 죄다 한 대도 못 맞추고 두들겨 맞아서 뻗어버렸는데 소감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단장님을 잡아먹으려 들걸요.”
“날 잡아먹는다고? 어떻게?”
“그야 당연히…….”
라크시아는 잠시 멈칫 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방금 내가 한 말에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받아쳐주었다. 라크시아는 얼굴을 붉힌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 모양으로 봐서 약간 험한 말 쪽에 가까워 보였다.
뭐, 이런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내가 편하다는 방증이다. 그 금빛으로 번쩍번쩍하는 병신이 단장이었으면 이런 농담은 꿈도 못 꿨을 거다.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오신 겁니까?”
“너도 나랑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오면 알 수 있는데, 어때?”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에 등장할 보스다, 라고 세계의 비밀을 알려줄 순 없으니까.
“그냥 알려줄 생각이 없다고 똑바로 말하셔도 됩니다.”
라크시아는 피식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냥 농담이겠거니 하고 넘기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화면을 바라보았다. 보스의 칼질 한방에 두세명씩 붕붕 날아가 나뒹굴고 있었다.
‘스펙 차이가 그렇게 심한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부기사단장들은 중간 보스에 일반 단원들은 필드몹 포지션이라고 해도, 칠흑 성야 기사단은 최후반부에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최후반부 필드인 황궁을 돌아다니는 잡몹들은 초중반부의 중간 보스와 비슷한 스펙이다. 최후반부의 중간 봅스는 어지간한 초중반부 보스급 스펙이고.
그런 스펙을 지닌 애들이 칼질 한방에 무슨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내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자, 라크시아가 이쪽을 흘끔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별 거 아니야. 나중에 내가 잡아야 할 텐데, 저걸 어떻게 잡을까 고민중이었지.”
지금 당장은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나는 미리 생각해뒀던 다른 변명을 꺼냈다. 저놈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도 엄연히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럼 구태여 이러고 계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따로 사정이 있어서.”
내가 직접 잡는 게 아니라 키마 아니면 패드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라크시아였기에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단장님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시니 이런 점이 불편한 것 같습니다. 제대로 알려주시는 게 없네요. 업무가 부단장인 제게 떠맡겨지는 건 둘째 치더라도요.”
“난 엄연히 인간이야. 아직은.”
미래에는 이클립스처럼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고 하니 양심상 ‘아직은’을 붙였다. 라크시아는 이것도 내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입꼬리에 미소를 걸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직은’ 인간인 단장님. 그럼 말을 바꾸죠. 인간을 초월하신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실 존재라고요.”
라크시아도 첫 만남 때랑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은빛 여명 기사단에 시비를 걸다가 나한테 망가진 직검으로 엉덩이를 얻어맞으면서 신음 소리를 내던 것이 첫 만남이었으니까.
‘……잘 바뀌었을지도?’
어쩌면 좋은 쪽으로 잘 바뀐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먼저 잡아볼까?”
“네?”
“너희가 워낙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아서. 시범이라도 보여주면 참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음…… 그러시다면야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단장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을 저희가 참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마침 타이밍 좋게 첫 번째로 진입했던 편제가 전멸한 참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부기사단장이 관객석으로 소환됐다. 박살나고 찌그러진 갑옷이 순식간에 고쳐졌다.
“다음 순서ㅡ”
“나야.”
“……서어어? 단장님, 방금 뭐라고요?”
“네가 말한 그 다음 순서, 나라고.”
다른 사람들이 라크시아와 나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알 턱이 없었기에 단체로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날개 잃은 악몽을 빼들고 보스 앞으로 이동했다. 케이라스가 곧장 전투 태세를 갖췄다.
설정상 지금까지 명예로운 전사로 살았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전통에 따라 명예롭게 싸우다 죽기를 원하는 보스였다. 싸우다 죽으면 전쟁의 신이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설정이다.
몸을 저렇게 한껏 치장해놓은 것도 자신을 상대하는 전사들에 대한 본인 나름의 예우다.
‘브닼 5가 출시되면 명예랑은 거리가 먼 모습으로 죽게 될 텐데.’
아주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저런 설정을 가지고 있다면 고인물들의 능욕 목표가 되어버릴 것이 뻔했으니까. 아마 명예랑은 거리가 한참 먼 방식으로 죽게 될 거다.
발로 깬다거나, 보라색 피부의 망자 커마를 만들어서 맨몸으로 깬다거나, 예능 무기로 깬다거나 하는 그런 방식들.
‘뭐, 그건 그거고.’
안타까운 감정도 어디까지나 아주 약간이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할 예정인지라.
자세를 잡았다. 놈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오른쪽 윗팔이 들어올려지고, 동시에 왼쪽 아래팔이 뒤로 당겨졌다. 빙빙 돌면서 연타로 공격하는 패턴이던가.
따로 하단 공격도 없으니 가볍게 튕겨내기부터ㅡ
ㅡ째애애앵!!!!!!
‘뭐야?!’
첫 회전 베기를 튕겨내자마자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격까지 계속 튕겨내자 다리가 무슨 무빙워크에 올라탄 듯 뒤로 쭉쭉 밀려나고 있었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덤벼들었다지만 힘 대결에서 이렇게까지 밀리는 것은 명백히 비정상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밀려나던 다리는 밈췄지만, 팔에 닿는 충격은 여전했다. 놈은 8번째 공격까지 끝낸 뒤 곧바로 다음 패턴을 이어갔다.
바닥을 두 번 휩쓸고 팔 네 개 동시에 내려찍기라든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한 팔당 하나씩 총 4방향을 공격한다든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칠흑색 불꽃을 휘감아서 내려찍으며 폭발을 일으킨다든가.
대놓고 다수전을 저격하는 패턴이 무지막지한 속도와 대미지로 날아들어왔다.
‘이거 그대로 게임에 출시되면 레판테카 이상일수도 있겠는데?’
솔직히 내가 느끼기에 이클립스가 대놓고 제일 어렵게 낼 거라 말했던 히든 보스랑 맞먹는 난도였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
‘빨리 끝내야겠어.’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며 날개 잃은 악몽을 신성 속성으로 바꿨다. 검신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터져나왔다. 날개 잃은 악몽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특수 능력을 준비했다.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빛무리를 본 케이라스가 칠흑색 불꽃을 끌어올렸다. 검은색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놈의 머리 위를 향해 팔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ㅡ콰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무지막지한 굵기의 빛기둥이 내리꽂혔다.
빛기둥은 막 솟구치려던 검은색 불꽃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며 땅에 처박아버렸다. 신성 폭발이 터져나오며 일대를 휩쓸었다. 돌과 파편 섞인 흙먼지가 휘날렸다.
‘…….’
바닥에 착지했다. 놈은 이 공격을 맞고도 잠시나마 살아 있었다. 다 부서진 상태였고 칼 끝으로 톡 건드리자마자 와장창 부서지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나는 조용히 이클립스를 불렀다.
“여신님.”
“……네. 당신.”
“이번에는 뭡니까?”
당연히 잘못했다는 사실을 깔고 가는 듯한 태도였지만, 이클립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수, 수치를 잘못 입력했어요…….”
“이유는요?”
“…….”
“이유는요?”
척 보기에도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던 이클립스는, 내가 한번 더 재촉하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조, 조만간 제 차례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몸이 달아올라서요…… 자, 자궁도 욱씬거라고…… 생각만 해도 찌릿찌릿하고…….”
“…….”
이 여신이 진짜.
외전: 재능의 차이
“여신님은 왜 또 저러고 계신대? 이번에는 손까지 들고 있네?”
“뭐,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클라우디아는?”
“숙취. 미네르바 님이 치료해주겠다고 하셨는데 필사적으로 거부하더라. 시간 지나면 알아서 내려올 테니까 신경 끄고 있어도 돼.”
“숙취라고? 뭘 마셨길래?”
“달의 입맞춤.”
“아.”
짧은 대화를 끝내고 컴퓨터를 켰다. 화면이 떠오르는 동안 의자를 회전시켜 거실에 있는 이클립스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클립스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 용서해주세요…….”
다른 쪽 실수였으면 봐줬을 거다.
여신이 저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였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 대부분은 내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이클립스가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달라붙는 것으로 끝났었다.
하지만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와 관련된 실수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손이나 똑바로 드시죠, 여신님. 조금씩 내려가는 거 다 보입니다.”
“이, 이거 진짜 부끄럽단 말이에요…… 앞으로는 잘 할 테니까 제발요…… 네?”
“그러라고 세운 벌인데 당연히 부끄러워야죠. 안 그렇습니까?”
“당신…….”
“1시간 추가.”
“아아아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발 그것만은……!”
이클립스가 다급히 사과하며 팔을 머리 옆에 바싹 붙였다.
‘혹시 수치 플레이라면서 좋아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네.’
이클립스라면 예전에 벌을 받은 이후로 수치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연습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저것마저 벌이 아니라 포상이 된다면 내가 좀 많이 곤란해진다.
“…….”
닉스와 클라우디아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거실에 모여서 터질 듯이 새빨개진 얼굴로 반쯤 울먹이고 있는 이클립스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여신이 목에 스케치북을 건 채 거실에 꿇어앉아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그리 쉽게 구경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번이 두 번째고, 앞으로도 종종 나올 수도 있긴 하지만.
“성자시여.”
대충 두 시간쯤 있다가 풀어주면 되겠지, 하고 브닼 4를 실행하려는데 플로레타와 루나가 다가왔다.
이클립스가 처음 나타나서 벌을 받고 있을 때는 태양과 달께서 직접 강림하셨다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더니, 지금은 꽤나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태양께서 이름을 불리시는 것만으로 절정에 도달할 수 있으시다는 것이 정녕 사실인지요?”
“맞아. 사실이야.”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거실까지 전달되기에는 차고 넘쳤다. 거실에 모인 시선이 일제히 이클립스에게로 쏠렸다. 이클립스는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푹 떨궜다.
하나같이 저런 반응인 것으로 보아 이름만으로 절정할 수 있다는 건 저쪽 세계 기준으로도 상당히 놀랄만한 일에 속하는 듯했다.
‘그걸 해낸 카이킬리아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별다른 연습 없이 약간의 실전만으로 성공해낸 카이킬리아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아 이클립스를 구경하던 카이킬리아는 시선이 맞닿자마자 움찔 하더니 뺨을 붉히며 눈을 피했다.
뭐, 카이킬리아가 여신이랑 똑같은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ㅡ
“아이도 가능하지 않니?”
“무…… 그게 뭐…… 지,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었는데, 화살이 뜬금없이 카이킬리아에게 돌려졌다. 대체 얼마나 놀랐는지 카이킬리아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에 쥐고 있던 콜라캔을 박살내버렸다.
미네르바가 발빠르게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옷과 소파와 테이블이 콜라 범벅이 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루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이킬리아께서도……?”
“아,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무슨 터무니 없는 망발이더냐, 미네르바!”
카이킬리아가 허둥지둥 부정했으나, 다들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평소에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침착하던 인간이 저렇게 당황한 시점에서 이미 반쯤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머, 정말로 부정할 셈인 걸까, 아이야?”
“당연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잘 됐구나. 지금 바로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해보면 증명되지 않겠니?”
“무어라……?”
황금색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조금 전까지 반쯤 확정되어 있었다면, 저걸로는 100% 확정됐다. 그 카이킬리아가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 자체로 증거나 다름없었다. 미네르바가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아이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내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할 기회를 주는 거란다. 자, 어서 말하려무나. 카이킬리아, 라고 속삭여달라고.”
카이킬리아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카이킬리아에게선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말려줘야 할 듯했다.
“그쯤 해두시죠, 미네르바 님.”
미네르바는 그만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기가 언제 놀렸냐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결국 초기 목적은 달성한 셈인지라 딱히 의미 없는 고요함이었다.
리제가 시간이 필요할 거라면서 나머지 기사단장 둘을 이끌고 델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깃든 교황들이 카이킬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미네르바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던 카이킬리아가 눈을 돌렸다. 하지만 교황들을 쳐다보는 시선에도 딱히 좋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카이킬리아.”
“싫다! 썩 꺼지거라!”
플로레타와 루나는 으르렁대는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채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교황들이 물러설 기색이 없자 카이킬리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 걸어다니는 음란물들이 무슨 말을 할지야 뻔했다.
“혹 저희에게도 이름만으로 절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카이킬리아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꺼지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가뜩이나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몸이 점점 민감해져서, 최근에는 손만 잡아도 하반신에 먼저 반응이 오고 옆에 앉는 것만으로 등골이 찌르르 울리기까지 할 지경에 이르른 카이킬리아다.
여자로서 이래도 되는 것인가 자괴감이 들 정도이거늘, 그런 걸 가르쳐달라니 놀리는 것이나 진배 없지 않은가. 당장 미네르바의 반응도 그렇고 말이다.
“어찌하여 부끄러워 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셔야 할 것입니다.”
플로레타와 루나로서도 카이킬리아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둘은 카이킬리아를 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부러웠으면 부러웠지.
태양과 달께서 이름만으로 절정에 도달하실 수 있으신데, 카이킬리아는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 말인 즉 성국의 신과 똑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신과 똑같은 경지에 이르른 것이 왜 부끄러워 할 일이 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그걸 왜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는 말이냐!”
“인간의 몸으로 태양과 비슷한 경지에 오르셨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필시 어마어마한 위업으로 칭송받을ㅡ”
“그따위 칭송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노라!”
버럭 일갈한 카이킬리아가 냅다 방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잠그려 했지만 교황들이 한 발짝 더 빨랐다.
플로레타와 루나는 문고리가 걸어잠기기 전에 성공적으로 방 안까지 따라들어갔고, 곧이어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이킬리아! 부디 저희에게도 그 비법을!”
“원하신다면 저희의 동침 순서도 양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썩 꺼지라는 말을 정녕 듣지 못하였느냐! 이 빌어처먹을 음란녀들아!”
플로레타와 루나가 카이킬리아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스텔라와 셀레네가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슬그머니 발을 들이미는 사이, 미네르바가 이클립스에게 다가갔다.
은백색 동공이 스케치북에 적힌 글자를 훑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글자였다.
‘저는 이름만 불려도 절정할만큼 음란한 여신입니다. 제 음란함 때문에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저런 말이 튀어나온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델타의 의도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신이기 이전에 델타의 여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떠올려 거리감을 줄이도록 만드는 것.
미네르바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거리감을 줄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이클립스의 바로 앞에 살포시 쪼그려 앉았다.
“여신님. 잠시 괜찮으세요?”
특유의 나긋한 말투마저 완전히 바꿔버린 목소리에, 아우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여신님이라고 하셨으니, 엄청 오래 살아오신 거 맞죠?”
“그렇죠……?”
“그렇다면,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겠네요?”
“어…… 네, 네…… 일단은요……?”
명백히 ‘훨씬’이라는 글자를 강조한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클립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네르바가 잘 됐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어머, 잘 됐네요. 여신님이 나이가 더 많고 제가 나이가 더 적으니까, 앞으로는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우로라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